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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Mar 20. 2023

꽃무늬의 습격

오래 사귄 남자친구가 결혼하자고 했다. 아버지가 은퇴하시기 전에 빨리 결혼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이유였다. 나는 2년 후든 3년 후든 결혼을 한다면 이 사람과 하게 될 거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아직은 결혼하는 게 이르다고 생각했다. 직장 선배들에게 상담하니 “사람 바꿀 거 아니면 그냥 해라!”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 결혼 상대 바꿀 건 아니니까 그럼 결혼하지, 뭐.



결혼 시작부터 준비까지 나는 내 결혼이 아닌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내가 보기에 결혼식과 결혼 준비는 쓸데없는 일의 집결체였기 때문이다. ‘실용주의에 입각하여 모든 허례허식은 빼고 딱 필요한 것만 하겠다’는 신조를 고집하다간 결혼이 엎어지게 생겨서 나는 꼭두각시처럼 행동했다. 사실 나는 많이 투덜대긴 하지만 한편으론 지극히 체제 순응적인 인간이라 남들 하는 대로 하는 건 자신 있다.


내가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 동안 내 결혼은 순조롭게 준비되고 있었다. 친정엄마는 말로는 “네가 관심 없어서 엄마가 혼수 다 사러 다니느라 얼마나 힘든 줄 알아?”라고 하시면서도 노리다케가 어쩌고, 포트메리온이 어쩌고 하면서 당신이 그동안 사고 싶었던 그릇과 접시를 마음껏 사느라 기분이 좋아 보였다. 물욕은커녕 세상사에 관심이 별로 없던 나는 ‘그릇이나 접시 따위 아무거나 쓰면 그만이지’라는 생각으로 엄마가 사온 물건도 구경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예쁜데? 어무이 감사합니다.
라떼는 말이야, 꽃무늬가 대세였어(냉장고와 김치냉장고)

나중에 신혼집에 가서 그릇을 봤더니 심플한 디자인에 예쁘긴 한데 꽃무늬가 있었다. 접시에도 꽃무늬, 찻잔에도 꽃무늬. 그러고 보니 세탁기에도 꽃무늬, 냉장고에도 꽃무늬 일색이다. 꽃이 현란하게 많은 건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는 데 불편함이 없었으므로 불만 없이 잘 사용했다.


나의 아이들이 태어나 서너 살 되었을 무렵, 엄마는 예전사용하던 (내 기억에 난 저 그릇을 평생 쓰며 살았건만) 코렐 꽃무늬 접시와 그릇을 “이게 잘 안 깨지고 진짜 좋아.”라며 갖다 주셨다. 

꽃무늬 추가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코렐 그릇과 접시


꽃무늬 접시와 함께한 지 10여 년이 지나 어느 날 친정엄마와 시어머니 집에 가서 단색 접시를 보고 문득 깨달았다. ‘아, 나 꽃무늬 싫어하네? 단색 접시랑 그릇이 예쁘네?’

아는 게 병이고 모르는 게 약이라고, 뒤늦게 알아버린 취향 덕에 10여 년을 잘 쓰던 그릇과 접시의 꽃무늬가 갑자기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멀쩡한 걸 버릴 수는 없으니 일단은 잘 쓰고 있다.



그나마 친정엄마가 사준 세간살이에는 꽃이 존재할지언정 꽃의 비중이 작다면, 시어머니는 한층 더 화려한 꽃무늬를 좋아한다. 어머니 댁에서 예쁜 커피잔에다 커피를 마시자고 꺼내신 커피잔은 금박 띠에 꽃무늬까지 휘황찬란했다. 나머지 커피잔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나에게 눈이 돌아갈 만큼 화려한 꽃무늬가 있는 앞치마와 홈드레스(집에서 편하게 입는 원피스), 에코백 등을 선물하였다. (어머니는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주변인들에게 소소하게 선물 주는 걸 좋아하신다.) 나는 빈말을 못 하는 편이라 앞치마와 홈드레스 받을 때는 예쁘다거나 맘에 든다거나 하는 말은 다 제외하고 감사하다고만 인사했다. 그러나 어느 날 화려함의 극치인 빨간 꽃무늬 장바구니를 어머니가 건넬 때, 나도 모르게 “우와! 되게 좋네요!”라고 외쳐버렸다. 왜냐하면 이 장바구니가 하도 신박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꽃무늬 장바구니는 물건을 넣기 전에는 작았다가 물건을 넣으면 잘 늘어나서 물건이 꽤 많이 들어가고, 물건을 빼면 다시 줄어든다. 다른 장바구니는 접었다 폈다 하는 것이 귀찮을 때가 있는데, 이 장바구니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 유용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취향보다는 실용성이 더 중요한 사람인가 싶다. 쓸모 있고 편하기만 하다면 취향 따위 포기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이 현란한 장바구니를 보고 진심으로 감탄한 건 왠지 자존심이 상한다ㅋㅋ)

멀리서도 잘 보이는 장바구니. 잘 쓰고 있어요, 어머님!


이 글을 쓰며 접시와 그릇을 찬찬히 살펴봤더니 이가 나간 부분도 거의 없이 온전하고 튼튼하다. 어릴 적에 내가 컵이나 그릇을 깨뜨리면 엄마는 어김없이 눈을 흘기곤 했다. 그러나 내가 어느 정도 자라고 나서 접시를 깨뜨렸을 때 엄마가 눈을 흘기는 대신 의외의 대답을 하였다.

“괜찮아. 그거 너무 오래돼서 질렸는데 멀쩡해서 다른 거 못 사고 있었거든. 깨졌으니까 이제 다른 거 사면 돼.”


어쩌면 엄마도 오래도록 본인 취향과는 무관한 그릇류를 사용하다가 당신의 취향에 맞는 그릇류를 살 날을 벼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딸의 결혼에 본인의 취향에 맞는 물건들을 사면서 보람을 느꼈을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니 40대인 나는 아직 자신의 취향을 고집하기엔 젊은 나이인가 보다. 꽃무늬에서 벗어날 날은 과연 언제가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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