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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냐 정 Aug 18. 2022

부산 출신 나의 부산 여행 로망

여행자가 되는 순간

"내가 크면 꼭 조선 비치 호텔에서 하룻밤 묵어볼 거야."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해운대 해변에 서서 했던 말이다. 그래. 이게 내 로망이었다. 부산 여행자라면 누구나 꿈꿀 법한, 그리고 실현할 법한 계획. 해운대 바다가 보이는 호텔을 예약하는 일.


저 멀리 보이는 조선비치 호텔. 해변 중간이 아니라 끝에 위치해서 길게 펼쳐지는 뷰가 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저 쓸데없는 일일 뿐. 멀쩡한 집을 두고 비싼 돈 주고 호텔을 예약하는 일은 말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내가 커서 돈을 벌면. 호텔 하룻밤쯤이 부담 없는 어른이 되면. 그때는 꼭 해변 끝에 위치한 조선 비치 호텔을 예약하겠다고. 그때가 되면 더 많이 낡겠지만 상관없다고. 꼭 여기였으면 좋겠다고.


그때 내가 몰랐던 게 있다. 어른이 되고 직접 돈을 번다고 해서 하룻밤 호텔 숙박비가 부담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 어느새 나는 어른이 됐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해서 돈도 벌기 시작했다. 꿈꾸던 해운대 해변의 호텔을 예약하려고 검색해 봤다. 망설이는 손가락. 결국 예약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부산에 멀쩡한 부모님 집이 있는데 생돈 주고 예약하기에는 하룻밤 값이 너무 비쌌다.


대학을 서울로 가면서 부산을 떠났다. 떠나자마자 내 방은 게스트룸으로 바뀌었다. 부산을 떠난 지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났다. 부산에 산 날보다 서울에 올라와 산 날이 더 길어졌다. 이제 나는 가끔 부산에 간다. 내 집은 없지만 여전히 부모님 집이 있고. 이제는 당연한 듯 부모님 집에 짐을 푼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돈을 들여야 할 곳과 아껴야 할 곳을 더 신경 써서 구분하기 시작하면서, 내 로망은 잊혔다.



부모님이 시골에 집을 지었다. 10살, 6살 아들들에게 마당이 넓은 단층 시골집은 천국이다. 마음껏 뛰놀아도 되는 곳. 마당의 식물들에게 물을 주고, 익은 열매를 따 먹고, 동네 강아지와도 교감할 수 있는 곳. 그래서 부산보다 시골로 가는 날이 더 많아졌다. 그런데 나는 시골보다는 부산이 좋다. 때가 되면 당연한 듯 해운대의 파도소리를 들으며 충전해야 하는 사람. 의도하지 않아도 매년 자연스레 해운대에 들르던 때에는 몰랐던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그래서 연휴 첫날 시골집에 도착하자마자 선언했다. 이번 연휴 마지막 1박은 부산에서 해야겠다고. 몇 년 만에 해운대 호텔 예약 사이트를 열었다. 물론 아직 부산에 부모님 집이 남아있다. 하지만 나와는 달리 언제나 정돈된 집이 당연하다 생각하는 엄마는 준비 없이 손님을 맞는 걸 싫어한다. 내가 아무리 사위도 자식이라고 말해도, 본인도 십 년쯤 되니 정말 사위가 편해졌다고 말하면서도, 정리되지 않은 집에 사위가 오는 건 부담스러워했다. 호텔이라도 잡아야겠다 생각한 건 그래서였다. 엄마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부산에 머물고 싶어서.


처음으로 부산 해운대에 위치한 호텔을 예약했다. 어릴 적 로망이었던 그 호텔은 아니다. 로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부산에 가기 위해서 예약한 거니까. 너무 비싼 숙박비를 기꺼이 부담할 마음이 없었다. 해변가의 호텔보다는 싸면서도, 달맞이 길에 위치해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고 내부도 깔끔한 가성비 좋은 호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방에 들어섰는데 "우와" 너무 마음에 든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 바다 뷰. 해운대 뿐 아니라 저 멀리 광안대교까지, 완벽한 뷰였다.


달맞이길 맛집을 검색해 바다 뷰가 제대로인 식당을 찾았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내려오는 길. 바로 해운대 해변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높은 타워에 푹 빠져있는 둘째는 부산에서 제일 높은 건물인 엘씨티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최근에 완공된 건물. 그 건물 앞에 섰을 때 나는 내가 완벽한 여행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20년의 시간 동안 부산은 변해 왔다. 내가 더 이상 스무 살이 아닌 마흔인 것처럼. 그사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부산도 달라졌다. "이야, 이 건물에 전망대가 있어." 부산은 내가 모르는 게 더 많은 도시가 되었다. 뜻밖에 마주친 엘씨티의 전망대를 보고 기뻐한 건 둘째 아들뿐만이 아니었다. 여행지에서 예상치 못한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나도 신났다. 입장료가 꽤 비싸 망설이는 남편에게, "우리 여기까지 왔으니까, 둘째가 이렇게나 좋아하니까 한번 올라가 보자." 말했지만, 사실 정말 올라가고 싶은 건 나였다. 서울의 롯데타워 전망대보다 더 설레는 곳. 해운대의 엑스 더 스카이.


엘씨티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여름의 해운대


전망대에 올라 해운대를 바라보고, 차를 마시며 한참을 머물렀다. 아쉬움을 남긴 채, 다음에 또 올라오자며 내려와서는 신난 강아지처럼 해변길을 산책했다. 우연히 고개를 들었다가 핑크 곰을 발견했고, "우리 저기 올라가 보자." 소리쳤다. 여행자였다. 그날의 나는 완벽히 여행자였다.


부산이 고향이라는 건, 유명 관광지인 그곳을 그저 여행자의 시선으로 볼 수 없다는 의미. 나는 평생 내가 그곳을 여행지로 볼 수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묵는 곳이 집이 아닌 호텔이어서였을까. 마음껏 해변에 머물다 그저 툭툭 걸어서 호텔로 쏙 들어가면 되는 여유 때문이었을까. (생각해보면 그게 바로 여행자의 특권이 아닌가 싶다.) 나는 여행자의 시각으로 해운대를 걷고 있었다.


아마 단지 호텔에 머물러서만은 아니었을게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부산을 떠난 시간이 길어질수록 거리감도 충분해졌다. 어릴 적 울적할 때면 해운대의 일출을 찾곤 했다고 말하면서, 누구보다 해운대가 익숙한 것처럼 굴었지만. 그건 그저 20년 전의 해운대일 뿐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이번 여행. 그곳을 걸으면서 그걸 온몸으로 느꼈다. 이제 나는 충분히 멀어졌다. 이 공간에서.


그렇다고 다른 여행자들과 완전히 같은 건 아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추억의 여운이 곳곳에 배어 있으니. 기억은 흐려졌어도 깊이 스민 향수만은 언제라도 느낄 수 있으니. 여전히 부산에 살고 있는 옛 친구들의 일상을 SNS에서 접할 때면 느낀 그리움이 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들의 일상이 나에게는 비일상이기 때문에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 그걸 알고 나니 나를 다르게 정의할 용기도 생긴다.


부산에 대해서만큼은 나는 특별한 여행자다. 그곳을 일상으로 하는 향수와, 이제 비일상이기 때문에 느끼는 새로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여행자. 그래. 이제 나에게도 부산은 여행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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