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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냐 정 Jan 20. 2020

퇴사, 이후에 찾은 진짜 나의 세계

퇴사는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불러왔다.

 퇴사원을 내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너무 아깝다."  아이를 위해 나의 것을 포기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회사를 그만둔다는 것은 나의 삶을 포기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이어왔던 나의 삶에 안녕을 고하는 거라고 나 스스로도 생각했다. 엄마의 삶도 나의 삶이겠지만 그것은 내려감을 의미했다. 지금까지 반짝반짝 빛나던 나의 삶을 포기하는 것.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언젠가 다시 반짝일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했던 삶을 내려놓았기에 나를 위로해야 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나 엄마로만 살겠냐고. 언젠가는 뭐라도 하지 않겠냐고. 


  내가 퇴사원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엄마로만 사는 것이 괜찮아서가 아니었다. 억지로 붙잡은 미래에 대한 희망 덕분이었다. 나는 내가 언제나 엄마로만 사는 삶에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내 삶을 버려야 하는 순간에, 억지로라도 미래를 꿈꾸어야 했다.


 그렇게 회사 밖으로 나와 엄마의 삶에 충실한 날들을 살았다. "저는 전업 주부입니다."라고 소개할 때마다 자존감의 상처를 마주해야 했다. 그것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말처럼 느껴졌다. 왜 나는 엄마가 되었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야만 하는가. 그것이 나의 선택이었다고 해서 그런 자괴감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저 문득 '진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회사에 다닐 때의 나'와 '엄마로 사는 나'는  타이틀만 다를 뿐 궁극적으로 같은 사람이다. 타이틀은 껍데기이고 진짜 나는 내 속에 있는데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것은 그 껍데기였다. 세상은 나의 껍데기에만 관심이 있었고, 나 역시 세상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니다. 버린 껍데기에 연연하지 말고 진짜 나를 키워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회사를 나오고 나서야 진짜 나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30대 중반에서야 세상이 좋아하는 껍데기가 아닌 나를 마주했다. 회사를 그만둔다는 것은 내 삶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진짜 나의 삶은 거기에서 시작되었다. 


 반짝이는 것을 가진다는 것은 어쩌면 더 위험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반짝이기 때문에 다른 것들이 빛을 잃기 때문이다. 반짝이는 것을 가졌기 때문에 다른 것들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빛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이 소멸되어 가고 있어도 그것을 깨닫기 힘들기 때문이다. 내가 내 껍데기에 신경 쓰느라 진짜 나를 찾지 못했던 것처럼. 내가 소위 명문대라 불리는 곳에서 공부를 하고 대기업을 다니면서, 거기에 반응하는 세상에만 집중했던 것처럼. 그때의 나는 진짜 나는 어떤 존재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진짜 나에게 어떤 성장이 필요한지도 알지 못했다.


 그냥 '나'가 되어 마주하는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렇게 마주한 나라는 사람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과거를 운운하며 "실은 나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웠다. 왜 나는 지금까지 몰랐을까? 내가 채워야 할 것은 껍데기가 아니라 내면이라는 사실을. 회사를 나와서 나는 나를 찾았다. 껍데기에 연연하던 삶은 끝났지만 진짜 나를 찾아가는 삶은 다시 시작되었다. 이제야 나는 내 삶의 주인이 되었다.


 얼마 전 아들러 심리학을 다룬 '미움받을 용기'를 읽다가 무릎을 쳤다. 내가 몇 년에 걸쳐 깨달은 진리가 이 책 속에 있었다. 몇 년 전, 이 책을 읽었다면 이 진리를 더 빨리 깨달을 수 있었을까?


"확실히 자네 말대로 무작정 우주를 상상하기란 힘들겠지. 하지만 눈 앞의 공동체에만 매달리지 말고 자신이 다른 공동체, 더 큰 공동체, 이를테면 지역사회나 국가에 속해있고 그곳에서도 어떠한 공헌을 할 수 있다는 자각을 얻기를 바라는 걸세." (출처: 미움받을 용기 p218)


"학교 바깥에 더 큰 세계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그 세계의 일원이다. 만약 학교에 내가 있을 곳이 없다면 학교 '바깥'에서 내가 있을 곳을 찾으면 된다. 전학을 가도 되고, 자퇴를 해도 상관없다. 자퇴서 한 장으로 인연이 끊기는 공동체 따위는 없어도 그만이다. 만약 더 큰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이 학교에서 느꼈던 고통이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 찻잔 밖으로 나오면 거칠게 몰아치던 태풍도 실바람으로 변할 테니까." (출처: 미움받을 용기 p221)


"물론이지. 눈앞의 작은 공동체에 집착하지 말게. 보다 다른 '나와 너', 보다 다양한 '사람들', 보다 큰 공동체는 반드시 존재하네."  (출처: 미움받을 용기 p223)


Photo by Joshua Earle on Unsplash


 회사 밖에도 세상은 있었다. 회사만 나의 기여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 세상 더 큰 공동체에 속해있는 사람이고, 작은 공동체에서 나온다고 해도 여전히 나는 존재한다. 나는 그 회사라는 작은 공동체를 위해서만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물론 그것을 깨닫는다고 해서 세상의 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이제 어느 작은 공동체 하나를 나오더라도 진짜 내가 빛나는 그런 삶을 살겠다고. 나 자신을 더욱 가꾸어 나가겠다고. 타이틀이 없어진 나는 초라하다고 작아지는 대신 타이틀 없이 빛나는 나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래서 독서를 시작했고, 시간을 다르게 쓰려 애쓰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나만의 글을 쓰고 책을 쓰고 투고도 했다. 


 회사라는 포장지가 날 감싸고 있는 한 나는 있는 그대로 평가받기 힘들다. 그것은 상당히 편리하기도 하다. 안주하더라도 타이틀의 후광이 나를 지켜준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이제 나에게 그런 후광은 없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가치 있다. 언젠가 회사 안에서 인정받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이다. 그때 내가 무언가를 이루었다면 지금도 할 수 있다. 다만 환경이 다르고 이루어야 할 목표가 다를 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그렇게 다시 나아간다.


 회사를 그만둔다는 것은 삶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새로운 삶을 찾는다는 뜻이다. 아니, 어쩌면 작은 반짝임에 밀려 찾지 못했던 진짜 삶을 되찾는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아직도 타이틀의 위엄 앞에 작아지는 날도 많지만, 다시 어깨를 펴고 나아가는 내가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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