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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묘미 Sep 15. 2024

시대의 관망자의 고백

심판의 역사는 미래를 불태우리

성조기를 들고 광화문이나 탑골공원을 거니는 노인은 상상하기 쉽겠으나, 빨갱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싫다고 열변을 토하는 좌파 노인이 존재한다는 상상은 쉽게 하지 못했다. 30대 K는 무대와 멀리 떨어진 횡단보도 앞에 서서 저 멀리 마이크를 든 80대 노인을 바라봤다.


자수성가해 불혹의 나이에 은퇴한 한 기업의 회장이 들고 있을 법한 고목 지팡이를 쥔 노인은 자신이 투병 중임을 밝혔다. 병마와의 숨바꼭질이 일상인 노인의 운명은 피해 갈 수 없겠지만은, 이 노인은 평생 이념의 총칼을 피해 살아온 패잔병처럼 보였다. 피부에서부터 골격까지 무너져가는 신체와 달리 목소리는 차분했고, 언어는 정갈했다.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었지만, K는 자리에 선 채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 가뜩이나 새하얀 무대 위에 홀로 선 노인에게서 갓 데뷔한 배우의 생생한 혈기 지켜봤다. 거대한 파도마저도 유유히 타고 넘을 듯한 여유는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꺾이지 않을 생명력이었다.


*


'지금 여기에 이렇게 앉아 있으면 안 된다. 나가서 촛불을 들어야 한다.' 강의실에 앉아 식후 졸음을 쫓기에 바쁜 학생들에게 40대 후반의 강사가 말했다. 교수의 등살에 치여 항상 기가 죽어 있던 강사의 다짐은 단단했다. K에게는 교과서에 수록된 혁명의 역사야 암기과목일 뿐이었기에 세상이 뒤집어질 분위기에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지 못했다. 맞다. 손바닥 뒤집듯 역사가 뒤바뀌었던 대한민국에 태어나 처음 겪는 혁명의 기운이었다. 짚단에 불붙듯 촛불은 순식간에 번져나갔지만, K는 수업을 일찍 끝내버리고 사라진 강사를 뒤로한 채 집으로 돌아가 TV로 '혁명'을 '시청'했다. 매스컴을 탄 남녀노소 불문 혁명의 물결은 세계로 퍼져나갔다.


현재 세상을 바꾸려고 촛불 든 젊은 좌파와 박정희 정권에서의 경제 활황기를 몸소 겪었던 늙은 우파의 싸움은 우리나라 권세의 큰 판도를 이루고 있다. (아니, 그렇게 '조성'되었다고 해야 맞을까) 다만, 혐오의 시선은 늙은 우파에게 집중된다. 과거 민주항쟁으로 세상을 바꾼 '구' 젊은 세대의 일원은 노년의 길에 접어들었고, 무대 위가 아닌 객석 끄트머리에 겨우 자리 잡아 20대 운영요원에게 팜플랫 하나 얻어갈 수 없냐고 묻는 처지가 되었다. '현' 젊은 세대들이 한 나라의 판세를 쥔 건 어쩔 수 없겠으나, 혁명의 구성원들은 냄새나는 노인네 취급을 받을까 노심초사하며 지하철에 오른다. 기념관에 걸린 수많은 흑백 사진 속에 속하지 못한 숨은 혁명군은 한 시대의 전유물이 돼버릴 뿐일까. 막바지에 겨우 마이크를 잡고 '빨갱이' 소리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그들은 어떤 트라우마를 겪는 것일까. 관광자 K는 이상하게 자신에게 닥칠 미래가 보여 털이 바짝 섰다. 관망자의 윤리. 그것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이었다.


*


우리나라가 유독 검사와 변호사 출신을 대통령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나라의 도둑놈이 그만큼 많다는 변증이면서도 심판의 역사로 점철되었기 때문이리다. 현재 진행 중인 지병에 가까운 이념의 전쟁과 뿌리 깊은 보복 심리는 국민의 질타에도 불구하고 접점 없이 지속 중이다. 유통기한이 지나도 한참 지난 이 '전쟁'은 텍스트로 시대를 암기하고 이해한 젊은이들이 물려받는 중이다. 우리에게 거부할 권리는 없는 것일까. 출산과 육아, 의식주 모두 정권이 바뀌어도 공감대 없는 탁상행정의 연속이다. K는 마치 그들 또한 현세대를 통계와 논문으로 파악하려는 건 아닐까 걱정스럽다. 서로의 희망은 뭉그러질 뿐.


패턴은 이제 바뀌어야 할 때가 왔다. 많은 것이 변화했다고 느끼는 것은 어떻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지만, 일상에서 그리고 온몸으로 느껴진다. 누군가를 감옥에 집어넣기 위한 권력의 용도는 변화해야 한다. 권력은 정의로서 일상에 더욱 밀접해야 한다. 나라를 먹여 살리는 길 또한 많이 바뀌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돈과 권력의 힘이 아니라 '마음'을 어루만지는 손길이어야 한다. 혐오의 악취를 피해 뒤로 숨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줄어야 한다. 그들이 다시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만드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들이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세상을 상상하자니 시대의 수장은 불균형에 예민한 급식소 영양사나 직접 기른 꽃과 나무로 정성스럽게 공원을 조성하는 조경가 맡는 것이 인류에 훨씬 이롭지 않을까. K는 그런 상상을 해보았다.


*


K는 평일 대낮 연차를 쓰고 극장에서 보았던 영화 <짝코>가 떠올랐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짝코>(1980)에서 늙은 행려자 신세인 송기열은 우연히 들어간 갱생원에서 전투경찰이었던 시절 자신의 삶을 망쳤던 '짝코'를 만나게 된다. 과거 기열은 악명 높은 일명 빨갱이였던(이 영화는 1980, 81년 대종상 영화제에서 반공영화상을 받았다.) 짝코를 잡았다가 실수로 놓쳐 불명예 제복을 벗고 가정 또한 풍비박산난 난다. 기열은 30년 동안 짝코를 증오하며 추적해나갔는데 이게 웬 떡인가. 하지만 병에 걸려 하루하루 죽음만 세는 같은 노인 신세인 짝코는 끝까지 자신이 그 짝코가 아니라고 말한다. 기열은 짝코가 짝코라는 증거를 수없이 대고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주변 수감자들을 설득한다. (그 중 짝코임을 증명하는 이유 중 하나는 얼굴에 점이 박힌 생김새였다.) 기열의 노력으로 짝코가 짝코라는 인식이 확실해졌을 때쯤, 기열은 짝코를 고향으로 끌고 가 자신의 누명을 벗기려고 한다. 둘의 이해관계과 확실해지자 기열은 주변에 짝코가 짝코가 아님을 증명하고 다닌다. 갱생원을 탈출한 둘은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가던 중 기열은 집념의 허무함을 느낀다. 짝코는 기열의 옆에서 숨을 거둔다.


싸움에 패한 쪽이 링 아래로 내려가야 함은 힘의 질서다. 매번 정치인이 부르짖는 것처럼 죽지 않으려면 ‘승리’ 뿐이다. 승리하지 못하면 자의로 왕좌에서 내려오거나 밧줄에 목이 묶여 끌려 내려와야 한다. 남은 이들은 재빨리 썩은 줄에서 손을 떼고 단단한 줄의 끄트머리에라도 올라타야 한다. 한편, 이념의 권력이 바뀔 때마다 세상의 부조리와 싸워 승리를 쟁취했던 시대의 영웅들은 서로 정치 보복을 해대는 싸움판 위에서 등 터질까 두려워 머리와 팔다리를 껍데기 속으로 쏙 집어넣고 살아가야 한다. 공기의 흐름에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먼지와 같이 인간 부유물이 되어버릴 뿐이다. 혁명의 불씨를 들었던 한 톨의 쌀알이 되는 것이 옳았을까, 시대의 관광객을 선택함이 옳았을까. K는 한 손에는 혁명의 단추가, 한 손에는 무딘 바늘이 들려있는 것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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