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아카이브 73.
73번째 씨네아카이브는 지난호에 이은 12번째 감독 특집으로 그 주인공은 동시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자리매김한 셀린 시아마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선보이는 작품마다 섬세한 각본과 연출로 평단은 물론 여러 감독과 배우들로부터 찬사를 받아왔는데 2019년에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으로 칸영화제에서 <기생충>과 선의의 경쟁을 펼치며 국내에도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이후 영화의 호평과 함께 역으로 이전 작품이 개봉되는 등 두터운 팬층을 보유하고 있는 감독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셀린 시아마 감독의 작품은 인물의 내면과 관계 변화의 미묘한 순간을 포착해서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서정적인 연출이 돋보이기 때문에 좋아한다. 데뷔작부터 꾸준히 이어져온 확고한 주제의식과 이를 섬세하게 표현해 내는 방식이야말로 프랑스 예술 영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 같달까. 팬심으로는 필모그래피 전부를 추천하고 싶지만, 이번에는 국내 관객들에게 셀린 시아마라는 존재감을 확실하게 각인시킨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감독의 필모에서 가장 좋아하는 <쁘띠 마망>을 소개한다.
씨네아카이브 73. "셀린 시아마가 그린 사랑과 성장의 초상" 전문 읽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 셀린 시아마 감독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셀린 시아마 감독의 이름을 전 세계적으로 알리게 된 작품으로 18세기말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작은 섬을 배경으로 결혼을 앞둔 귀족 여성과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 여성 화가의 사랑을 그렸다. 마치 고전주의회화를 보는 듯한 영상미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사랑과 예술을 통해 당대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는 섬세한 연출로 평단의 호평을 받았으며 제72회 칸영화제에서는 각본상과 퀴어종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감독의 데뷔작부터 호흡을 맞춰온 아델 에넬이 정략결혼을 앞둔 귀족 여성 ‘엘로이즈’ 역을 맡았는데 셀린 시아마 감독은 처음부터 아델 에넬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통해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노에미 메를랑은 여성 화가 ‘마리안느’ 역을 맡아 결혼이라는 제도적 속박을 거부하고 예술가로 살아가는 인물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극 중에서 마리안느가 그리는 작품들은 프랑스의 여성 작가 ‘엘렌 델메어’가 그렸는데 감독은 단순한 소품이 아닌 작가의 화풍이 담긴 작품을 요청했고 작가는 본인의 시선에서 ‘초상화에 담길 엘로이즈를 연기하는 아델 에넬’의 특징을 포착해 완성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 줄거리
18세기말 프랑스에서 여성 화가로 활동하는 마리안느는 브르타뉴 지역의 한 귀족 부인으로부터 정략결혼을 앞둔 딸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고 외딴섬으로 향한다. 부인이 의뢰와 함께 내건 조건은 딸인 엘로이즈가 본인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모르게 그림을 완성해 달라는 것. 당사자에게 들키지 않고 초상화를 완성해야 하는 마리안느는 비밀스럽게 그녀를 관찰하며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엘로이즈 역시 산책 동반자로 소개받은 마리안느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며 두 사람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영화는 개인의 운명이 계급과 성별에 따라 결정되던 18세기라는 시대 배경을 통해 그 속에 놓인 여성의 삶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엘로이즈’의 경우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의 정략결혼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인물로 그녀의 결혼이 원래는 언니의 혼처였으나 언니의 죽음으로 인해 세습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여성들이 억압적인 사회와 체제 속에 갇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다. 반대로 ‘마리안느’의 경우 당시에는 드물었던 여성 화가로서 결혼이라는 제도적 속박을 거부하고 주체적인 예술가로 살아가기를 선택한 인물이다. 영화는 결국 두 사람이 초상화를 완성하기까지 함께한 짧은 시간 동안의 ‘기억’이 서로의 남은 생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동성애를 다루는 감독의 방식이었는데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사랑을 단순한 로맨스가 아닌 ‘서로를 사랑했던 기억을 통해 남은 생을 살아갈 원동력’으로 표현한 것처럼 보였다. 사실 영화는 오프닝부터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여전히 서로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오프닝에 등장했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잊지 않았음을, 많은 이들이 명장면으로 꼽는 비발디의 사계 엔딩은 엘로이즈 역시 마리안느를 기억하고 있으며 사랑했던 기억으로 평생을 살아갈 힘을 얻었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서로에 대한 기억으로 주어진 생을 묵묵히 살아내고 있다는 것은 설령 시대에 저항하지 못하더라도 기억을 통해 기록을 남기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 의미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전지적 관찰자 시점, 가끔인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영화 이야기.
시선기록장 @bonheur_archive
파리 사진집 <from Paris>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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