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아카이브 77. 왕관을 쓴 자 그 무게를 견뎌라
77번째 아카이빙은 20세기 영국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의 전기 영화를 골라봤다. 말더듬이 왕, 고독한 리더, 외로운 왕세자비까지. 시대를 넘어 영국을 상징하는 인물들이지만 왕관의 무게 뒤에 가려진 그들의 진짜 이야기를 그린 <킹스 스피치>, <철의 여인>, <다키스트 아워>, <스펜서> 4편을 소개한다.
씨네아카이브 77. "왕관을 쓴 자 그 무게를 견뎌라" 전문 읽기
<킹스 스피치 (The King's Speech)>, 톰 후퍼 감독, 2010년 개봉
<킹스 스피치>는 영국 국왕이었던 조지 6세와 그의 언어치료사 라이오넬 로그의 우정에 초점을 맞춰 조지 6세가 말더듬증을 이겨내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전기 영화로 라이오넬의 손자가 쓴 동명의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영화는 어릴 때부터 말을 더듬었던 조지 6세가 라이오넬과의 만남을 통해 말더듬증과 연설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고 진정한 국왕으로써 위엄을 갖춘 연설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우여곡절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냈다.
영화 <킹스 스피치> 줄거리
1939년 세기의 스캔들과 함께 왕위를 포기한 형을 대신해 왕위에 오르게 된 조지 6세. 모든 것을 다 가진 그에게도 두려운 것이 있는데... 바로 연설! 조지 6세는 어릴 적부터 사람들 앞에 서면 말을 더듬는 말더듬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국왕의 자리에 오른 후 연설할 일이 더 많아지자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물려받게 된 국왕의 자리만큼 나아질 기미조차 없는 말더듬증이 버겁기만 하다. 와중에 2차 세계대전까지 발발하며 불안한 정세 속 새로운 지도자를 간절히 원하는 국민들을 위해 조지 6세는 엘리자베스 왕비의 소개로 괴짜 언어 치료사 라이오넬 로그를 만나게 된다. 언어치료사와 환자로서의 동등한 관계를 요구하며 국왕 앞에서도 쫄지 않는 당당함으로 무장한 라이오넬은 기상천외한 치료법을 통해 조지 6세의 말더듬증 치료에 나서는데... 과연 조지 6세는 오랜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국왕으로서 위엄 있는 연설을 완성할 수 있을까?
사실 <킹스 스피치>의 각본은 개봉 30년 전에 완성되었다고 하는데 조지 6세의 아내이자 엘리자베스 2세의 어머니인 퀸 마더가 영화화를 반대하면서 그녀의 사후에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제작 당시 엘리자베스 2세 역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작품을 보고 난 후에는 극찬했을 만큼, 영화는 평론가들과 관객들에게 준수한 평을 받으며 제83회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까지 주요 영역의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당시 <킹스 스피치>의 수상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함께 후보에 오른 작품이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소셜 네트워크>,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의 <블랙 스완> 등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뛰어났기 때문. 그러나 <킹스 스피치>도 못지않게 훌륭한 작품으로 조지 6세의 삶의 단면을 다루며 그 속에 장애를 극복하고 진정한 국왕으로 거듭나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와 신분을 넘어선 두 남자의 우정을 적절하게 녹여냈다. 무엇보다 조지 6세를 연기한 콜린 퍼스와 라이오넬을 연기한 제프리 러시의 앙상블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철의 여인 (The Iron Lady)>, 필리다 로이드, 2012년 개봉
<철의 여인>은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 마거릿 대처의 일생을 그린 전기 영화로 말년의 치매 투병 과정과 그녀의 정치 인생 속 굵직한 사건들을 교차해서 보여주며 의회 입성부터 총리가 되기까지의 고군분투, 총리 재임 당시 보여준 냉철함, 노년의 쇠약함까지 모두 그려내며 강인한 정치인으로서의 대처와 고독한 한 인간으로서의 대처의 모습을 모두 담아냈다.
영화 <철의 여인> 줄거리
식료품점 딸로 태어났지만 장차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은 야망을 품은 마가렛. 옥스퍼드 졸업과 함께 부푼 꿈을 안고 지방 의회 하원선거에 출마하지만 중산층 신분에 여성이라는 이유로 낙선의 고배를 마신다. 그러나 마가렛의 당돌함에 반해 그녀를 눈여겨본 사업가 데니스가 프러포즈를 하게 되고, 결혼 생활과 함께 남편의 전폭적인 내조에 힘입어 마침내 의회에 입성한다. 더 나아가 마가렛의 정책과 신념을 지지하는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로 선출되는 쾌거를 이룬다. 이후 자신만의 확고한 원칙과 냉철함으로 정책들을 밀어붙이며 ‘철의 여인’이라는 별칭과 함께 영국의 번영을 이루지만, 복지 사각지대에 내몰리게 된 이들의 반발이 거세지기 시작하자 정치적 반대 세력과의 격렬한 대치 끝에 11년간 지켜온 총리직에서 물러날 위기를 맞이한다.
영화는 실존 인물의 삶을 다층적으로 조명하고 있지만, 대처는 자신의 이야기를 회고로 남기는 것을 꺼려해 허구도 가미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작품성은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마거릿 대처를 연기한 메릴 스트립의 연기만큼은 훌륭한 작품으로 메릴 스트립은 <철의 여인>으로 아카데미에서 3번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은 물론 골든 글로브, 뉴욕 비평가 협회 등 유수의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휩쓸며 호평받았다. 영화의 제목이자 마거릿 대처를 지칭하는 ‘철의 여인’은 냉전시절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정책을 관철시켜 나간 그녀의 정치적 행보에 소련이 붙인 별명이기도 한데 실제로 대처는 총리 재임 당시 ‘영국병’으로 불린 과도한 복지 정책과 노조의 입김을 해소하기 위해 과감한 민영화와 노조 개혁을 실시하며 영국의 경제 부흥을 이끌었지만, 동시에 ‘대처리즘’으로 불리는 강경 정책으로 빈부차를 심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총리로서 대처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리지만, 신분에 따른 계급이 존재하는 영국에서 중산층 가정의 딸로 태어나 유리천장을 깨고 최초의 길을 개척해 나간 여성 정치인으로서의 업적은 후대에 많은 여성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다키스트 아워 (Darkest Hour)>, 조 라이트 감독, 2017년 개봉
<다키스트 아워>는 윈스턴 처칠의 전기 영화로 그의 삶 중에서도 2차 대전 발발 초기 수상에 임명된 처칠이 덩케르크 철수작전을 시행하고 성공시키기까지 4주간 겪은 고뇌에 시간에 집중한 작품이다. 영화는 독일과의 평화 협정을 종용하는 세력에 맞서 덩케르크에 고립된 연합군을 구출하기 위해 작전을 진두지휘하는 과정 속에 위기의 순간에도 국민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처칠의 인간적인 면모와 뛰어난 통솔력을 지닌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영화 <다키스트 아워> 줄거리
유럽 전역이 나치의 손 아래 들어가기 직전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전임 수상이 강제로 사임하며 윈스턴 처칠이 차기 수상으로 임명된다. 오랫동안 꿈꿔 온 중직에 올랐지만 기뻐할 틈도 없이 히틀러와 영국의 관계, 나아가 유럽의 운명을 결정짓게 될 중책이 주어진다. 그러나 벨기에를 시작으로 프랑스까지 독일 나치군에 함락될 위기 속에서 40만 연합군이 최후의 보루 덩케르크에 고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처칠의 견제 세력은 그에게 독일과의 평화 협정을 종용하기 시작한다. 실패할지라도 굴복하고 싶지 않은 처칠의 고뇌는 갈수록 깊어지는데... 과연 윈스턴 처칠은 견제 세력에 맞서 무사히 연합군을 구출해 낼 수 있을까?
‘윈스턴 처칠’이라는 인물에 집중하며 처칠의 시선을 따라 진행되지만, ‘덩케르크 철수작전'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를 떠올리게 되는데 <덩케르크>가 육해공에서의 일주일, 하루, 한 시간을 각각 다른 시선으로 담아내며 병사들의 고립과 탈출을 그렸다면, <다키스트 아워>는 지하 워룸에서 치열한 두뇌 싸움으로 고뇌하는 영국 수뇌부의 모습에 집중하며 색다른 관점과 재미를 선사한다. 무엇보다 게리 올드만의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한데 특수 분장과 의상으로 완성한 놀라운 싱크로율은 물론 목소리, 말투, 손짓까지 완벽하게 처칠을 구현해 냈다는 호평과 함께 제90회 아카데미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스펜서 (Spencer)>, 파블로 라라인 감독, 2021년 개봉
<스펜서>는 영국의 왕세자비였던 다이애나의 삶을 다룬 전기 영화로 그녀의 삶 중에서도 찰스 왕세자와의 불화가 절정에 달했던 1991년 영국 왕실 별장에서 보낸 3일간의 크리스마스 휴가를 배경으로 다이애나 내면의 심리 변화에 집중한 작품이다.
영화 <스펜서> 줄거리
1991년 크리스마스. 영국 왕실 가족들은 전통에 따라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기 위해 샌드링엄 별장에 모이고, 세기의 결혼 이후 줄곧 찰스 왕세자와 불화에 시달리며 힘든 시간을 보내던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뒤늦게 별장에 도착한다. 그러나 왕실 구성원들은 크리스마스 연휴 내내 전통과 규율을 힘들어하는 다이애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며 그녀를 통제하려 든다. 3일의 휴가 동안 심리적 고립 속에서 의심과 결심 사이를 오가던 다이애나는 마침내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다이애나는 20세기 모든 여성을 통틀어 가장 많은 사진이 찍힌 인물로 불릴 만큼 영국을 넘어 전 세계적인 대중들의 관심을 받았는데 대외적으로 알려진 ‘왕실의 일원이자 왕세자비’로서의 모습 이면에 ‘인간 다이애나 스펜서’의 모습은 예상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이 부분에 집중하며 왕실의 일원에서 인간 다이애나 스펜서로서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냈는데 영화의 제목 <스펜서> 역시 왕세자와의 결혼으로 ‘웨일스 공비’라는 가면 아래에서 살아가던 다이애나가 ‘스펜서’라는 자신의 이름과 정체성을 찾게 되는 과정을 함축적으로 담아냈다. (참고로 ‘웨일스 공비’는 영국 왕실에서 왕위 계승 서열 1위 왕세자인 ‘웨일스 공’의 아내에게 주어지는 공식 칭호로 현재는 윌리엄 왕세자의 아내인 케이트 미들턴이 물려받았다.)
전지적 관찰자 시점, 가끔인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영화 이야기.
시선기록장 @bonheur_archive
파리 사진집 <from Paris> 저자
영화 뉴스레터 ciné-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