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세상을 울린 목소리 뒤에 가려진 이야기

씨네아카이브 76.

by 마리

새해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연말의 향기가 느껴지기 시작하는 계절이 되었다니... 혹시 내 시간만 빠르게 흐르는 걸까 싶은 요즘. 괜히 센치해진 허한 마음을 채우고 싶어 선택한 11월의 씨네아카이브는 음악으로 삶을 표현하고 노래한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들의 전기 영화를 골라봤다. 각자의 시대를 노래로 살아낸 예술가이자 음악이 곧 인생이었던 네 명의 전설적인 가수 밥 딜런, 에디트 피아프, 퀸의 프레디 머큐리 그리고 주디 갈런드의 삶과 그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를 그린 영화 4편을 소개한다.


씨네아카이브 76. "영화가 된 그들의 노래" 전문 읽기


<아임 낫 데어 (I'm Not There)>, 토드 헤인즈 감독, 2007년 개봉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아임 낫 데어>는 밥 딜런의 삶과 음악을 7개의 서로 다른 캐릭터를 통해 표현한 독특한 형식의 전기 영화로 ‘밥 딜런’의 전기 영화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의 일대기나 특정 시간대의 특정한 사건을 다루며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보통의 전기 영화와는 궤를 달리 한다. 대신 밥 딜런을 은유적으로 상징하는 7개의 캐릭터를 통해 그를 둘러싼 이미지를 표현했다.


영화는 데이비드 보위를 모티브로 삼은 <벨벳 골드마인>을 연출했던 토드 헤인즈 감독이 이례적으로 전기 영화 제작에 대한 허락을 얻어내며 완성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평소 밥 딜런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감독은 밥 딜런의 오랜 매니저에게서 ‘천재적인’ 혹은 ‘시대의 목소리’ 같은 표현을 절대로 쓰지 않은 기획안을 작성하라는 조언을 듣고 “아임 낫 데어: 딜런에 관한 영화에 있어서의 추정들”이라는 제목의 기획안으로 프로젝트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영화는 러닝타임 동안 밥 딜런을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인식, 개인사, 영감의 원천 등을 소재로 7명의 인물을 밥 딜런의 페르소나로 만들어 그의 삶을 그려냈다.


<아임 낫 데어> 줄거리

저항음악으로 사랑받는 포크 가수 잭과 음악적 변신으로 비난받는 뮤지션 주드, 회심한 가스펠 가수 존. 3명의 캐릭터가 음악가로서의 밥 딜런을 보여준다면, 영화 속 영화에서 잭을 연기하는 배우 로비, 은퇴한 총잡이 빌리와 시인 아서, 음악적 스승 우디 거스리는 밥 딜런의 문화적 배경과 영감의 원천으로서 그의 정체성을 농밀하게 완성해 낸다. 밥 딜런과 그의 시적인 가사를 줄기 삼아 탄생한 7개의 페르소나 캐릭터를 통해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렬한 아이콘의 초상이 된 밥 딜런에 대한 토드 헤인즈 감독의 영화적 추정이 펼쳐진다.


사실 <아임 낫 데어>는 여러 캐릭터가 뒤섞여 비선형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다소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에게 비치는 밥 딜런의 이미지를 각기 다른 캐릭터를 통해 해부해서 보여줌으로써 ‘당신이 알고 있는 밥 딜런은 누구이며, 밥 딜런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관객들에게 현학적 영화의 묘미와 즐거움을 선사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케이트 블란쳇, 벤 위쇼, 크리스찬 베일, 리차드 기어, 히스 레저까지, 명배우들이 밥 딜런의 페르소나 캐릭터를 표현해 내는 것을 지켜보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케이트 블란쳇의 남장 연기는 ‘가장 밥 딜런과 근접한 외모를 보여주었다’는 호평과 함께 화제를 불러 모은 만큼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 차력쇼를 보고 싶은 이들은 꼭 감상해 보길 추천한다!



<라 비 앙 로즈 (La Môme)>, 올리비에 다한 감독, 2009년 개봉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라 비 앙 로즈>는 샹송의 여왕으로 불린 ‘에디트 피아프’의 생애를 그린 전기 영화로 장밋빛 인생을 노래했지만 실제 삶은 크고 작은 비극의 연속이었던 에디트 피아프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그려냈다.


에디트 피아프는 프랑스 대중가요사에 한 획을 그은 가수로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발적인 에너지와 독특한 음색을 바탕으로 세대를 넘어 지금까지 꾸준히 회자되는 샹송들을 남겼는데 가장 대표적인 곡이 장밋빛 인생을 뜻하는 ‘라 비 앙 로즈(La vie en rose)’로 영화의 영문 제목이기도 하다. 영화의 원제목은 프랑스어로 ‘작은 아이’를 뜻하는 ‘라 몸므(La Môme)’로 에디트 피아프를 발굴한 루이 르플레가 그녀에게 붙인 애칭이었던 작은 참새라는 뜻의 ‘라 몸므 피아프(La Môme Piaf)’에서 따왔는데 르플레의 죽음 이후 에디트 피아프의 재기를 도운 레이몽 아소가 ‘피아프’라는 애칭에 ‘에디트’를 붙여 ‘에디트 피아프’라는 예명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라 비 앙 로즈> 줄거리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서커스 단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방랑생활을 하다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어린 소녀 조반나. 어느 날 길에서 그녀의 목소리에 반한 루이 르플레는 그녀에게 ‘작은 참새’라는 뜻의 ‘피아프’라는 애칭을 붙여주고 자신의 클럽에 가수로 데뷔시킨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녀에게 열광하기 시작할 무렵, 루이 르플레가 살해되며 다시 시련이 찾아오지만 프랑스 최고의 시인 레이몽 아소에게 발탁되어 완벽한 ‘에디트 피아프’로 거듭난 그녀는 레이몽의 시를 샹송으로 부르며 프랑스 전역에서 명성을 얻게 되고, 그녀의 인기는 프랑스를 넘어 미국까지 뻗어 나간다. 그리고 인생의 절정에 올라 선 순간 그녀는 생에 단 하나뿐인 사랑 ‘막셀’을 만나 장밋빛 인생을 만끽하지만, 자신을 만나러 오던 중 비행기 사고로 막셀이 사망하면서 깊은 절망의 늪에 빠지는데... 연인을 잃은 상실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점점 술과 약물에 의존하는 에디트 피아프는 다시 한번 장밋빛 인생을 맞이할 수 있을까?


영화는 죽음을 앞둔 에디트 피아프가 인간 ‘조반나 가시옹’과 가수 ‘에디트 피아프’로서의 삶을 회고하며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무엇보다 에디트 피아프의 환생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놀라운 싱크로율을 보여준 마리옹 코티아르의 열연으로 화제가 된 작품이기도 한데 영화의 전 세계적인 흥행과 함께 제80회 아카데미를 비롯해 골든글로브, 영국 아카데미, 세자르 영화제 등 유수의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보헤미안 랩소디 (Bohemian Rhapsody)>, 브라이언 싱어 감독, 2018년 개봉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영국의 전설적인 록 밴드 ‘퀸’의 보컬이었던 ‘프레디 머큐리’의 전기 영화로 프레디 머큐리를 중심으로 ‘퀸’이 결성된 1970년대부터 세기의 공연으로 회자되는 1985년 ‘라이브 에이드’ 공연까지의 시기를 중점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영화는 대략 15년의 짧은 시간을 다루며 한 인물의 삶을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는 방식의 서사 보다 퀸의 ‘음악’에 집중하는 것을 택해 평론가와 관객 사이의 호불호가 크게 나뉘기는 했지만 평소 퀸의 음악을 들어 본 적 없는 관객들도 영화에 몰입해서 즐길 수 있을 만큼 음악 영화로서는 훌륭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보헤미안 랩소디> 줄거리

공항에서 수하물 노동자로 일하며 음악가의 꿈을 키우던 이민자 출신의 아웃사이더 ‘파로크 불사라’. 그는 로컬 밴드에 리드보컬로 들어가게 되면서 ‘프레디 머큐리’라는 이름으로 밴드 ‘퀸’을 이끌게 된다. 시대를 앞선 독창적인 음악과 화려한 퍼포먼스로 관중들을 사로잡으며 승승장구하던 퀸은 대중들에게 외면받을 것이라는 음반제작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6분 동안 이어지는 실험적인 곡 ‘보헤미안 랩소디’로 대성공을 거두며 세계적인 스타의 반열에 오른다. 그러나 밴드 내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였던 프레디 머큐리는 솔로 데뷔의 유혹에 흔들리며 멤버들과의 결별을 선언하지만, 솔로로 활동하며 느낀 공허함과 외로움 끝에 다시 퀸 멤버들을 찾게 되고 멤버들과 함께 라이브 에이드 공연에 오르고자 하는데... 과연 관중들은 다시 한번 전설적인 밴드 퀸의 모습을 만날 수 있을까?


프레디 머큐리의 삶을 표면적으로만 다뤘다는 아쉬움과 별개로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며 이전까지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라미 말렉’에게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선사했는데 사실 라미 말렉의 캐스팅 역시 기존에 물망에 오른 배우들과의 촬영이 모두 불발되면서 최종적으로 그에게 프레디 머큐리 역이 돌아가게 된 것이라고 한다. 비록 캐스팅 1순위는 아니었지만, 지그재그로 리듬을 타며 걷는 걸음걸이부터 스탠딩 마이크를 쥐는 방식까지 프레디 머큐리의 사소한 습관을 몸에 익히며 높은 싱크로율과 함께 준수한 연기력으로 호평받았는데 이런 일화를 들을 때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인생에 단 한 번 찾아오는 일생일대의 순간을 알아차리고 준비된 모든 것을 쏟아낼 수 있느냐에 따라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건 아닐까.



<주디 (Judy)>, 루퍼트 굴드 감독, 2019년 개봉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주디>는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를 연기한 배우이자 가수 ‘주디 갈런드’의 삶을 그린 전기 영화어린 나이에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당시 영화 제작 시스템의 희생양이 되어 평생 약물 중독에 시달렸던 주디 갈런드의 말년을 중심으로 그녀의 비운의 삶을 조명한 작품이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런던 공연은 1969년 주디가 사망하기 몇 달 전 이루어진 마지막 무대로 영화는 런던 웨스트엔드 뮤지컬로 먼저 그려졌던 <무지개의 끝>이라는 작품을 각색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영화는 ‘주디 갈런드’를 연기한 르네 젤위거의 싱크로율과 섬세한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촬영 1년 전부터 유명 보컬 코치에게 성대 훈련을 받으며 주디 갈런드의 음색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물론 외적으로도 매일 2시간에 달하는 분장을 거쳤다고 하는데 단순히 분장과 음색으로 주디를 모방하는 것이 아닌 같은 여배우로서 그녀의 삶을 이해하고 탐구하며 내면의 고뇌와 슬픔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제92회 아카데미를 비롯해 골든글로브와 미국배우조합상 등 그해 여우주연상을 휩쓸며 호평받았다.


<주디> 줄거리

<오즈의 마법사>의 영원한 도로시이자 시대를 초월한 명곡 ‘Somewhere Over The Rainbow’의 주인공 주디 갈런드. 그러나 화려한 무대 이면에 가려진 억압과 착취의 희생양이 된 그녀의 삶은 파산직전의 몰락한 스타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돈도 집도 없는 상황에서 아이들의 양육권마저 빼앗길 처지에 놓인 그녀는 아이들과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간절한 마음으로 공연 제안을 받아들이고 런던으로 향하는데... 과연 주디는 과거의 고통스러웠던 기억에서 벗어나 자신의 모든 것을 담은 생애 마지막 무대를 무사히 끝마칠 수 있을까?


영화는 약물 중독으로 삶을 마감하기 직전,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뜨겁고 화려했던 런던 콘서트를 중심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전개되는데 비록 시스템의 희생양이었지만, 음악을 향한 순수한 열정만큼은 잊지 않았던 진정한 가수로서의 주디 갈런드의 모습에 집중한 방식이 인상적이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것을 쏟아내 열창하는 'Somewhere Over The Rainbow'신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깊은 여운을 남긴 명장면이자 이를 섬세하게 표현한 르네 젤위거의 연기에 감탄하게 된다.



전지적 관찰자 시점, 가끔인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영화 이야기.

시선기록장 @bonheur_archive

파리 사진집 <from Paris> 저자

영화 뉴스레터 ciné-archive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신카이 마코토 감독 <너의 이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