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12
어드밴스 과정을 무사히 마친 기념으로 다이빙 샵에서 조촐한 파티가 열렸다. 이제 주말을 제외하고 남은 기간 동안 펀 다이빙만 즐기면 되었다. 카이로에 간다면 이틀, 그렇지 않으면 오 일정도 펀 다이빙을 즐길 수 있었다. 처음의 다짐과 달리 카이로에 갈 지를 고민하는 것도 일이었지만, 우선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한편 오스트리아인 부부는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 다합은 다양한 인종들이 방문하는 곳이었지만, 그다지 인종들이 무차별적으로 섞여서 어울리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서양인들은 서양인들끼리, 동양인들은 동양인들끼리 노는 게 일반적인 것 같았다. 간간히 일본인이나 중국인들과는 교류했지만,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끼리 커뮤니티를 이루어 다니는 게 암묵적인 규칙과 같았다.
부부를 제외한 모두가 테이블에 둘러 앉아 치킨을 뜯었다. 낡은 소파가 여러 사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끽 소리를 내며 푹 꺼졌다. 자파리와 무스타파는 원래 술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나와 재희 언니, 태형도 그냥 탄산음료를 먹기로 했다. 이집트에 온 뒤로 슈웹스라는 석류맛 탄산음료에 중독된 나는 한 손에 치킨을 든 채로 붉은 빛 음료를 꿀꺽꿀꺽 목으로 넘겼다. 한국에서는 뭘 먹어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었는데, 바다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집 나갔던 입맛도 제 발로 돌아왔다. 온종일 사무실에 앉아서 일했을 때와는 딴 판으로, 참을 수 없이 허기가 지는 게 반가웠다.
자파리와 무스타파에게서 몇 가지 아랍어를 배웠다. 안녕하세요, 실례합니다, 고맙습니다와 같은 기본적인 인사말을 똑바로 발음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따지고 보면 외국에 오면서 기초 회화도 연습하지 않은 셈이었다. 내게 영어나 일본어가 동네 뒷산 정도라면 아랍어는 에베레스트 정도로 보였다. 그럼에도 무지한 한국인이 된 것 같아서 새삼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주말 동안에는 다이빙 샵을 운영하지 않는다고 했다. 갑작스럽게 비어버린 주말을 보낼 계획을 세워야 했다. 재희 언니는 30회 이상의 다이빙을 마친 사람이 취득할 수 있는 레스큐 자격증을 따고 있어서 주말에도 운영하는 스쿠버 다이빙 샵에 간다고 했다. 실로 대단한 열정이었다. 난 뭘 하지.
“베두인 카페”
무스타파가 망설임 없이 내뱉었다. 다합에 오는 한국인들이 한 번씩 꼭 들리는 관광지 같은 곳이라고, 내가 좋아할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시나이반도의 베두인이라는 유목민들이 다합 근방에서 운영하는 카페인데, 커피를 마시는 카페가 아니라 캠프파이어를 할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혼자 즐길 만한 곳은 아닌 것 같았다.
“같이 갈 사람 선착순 모집합니다.”
자파리와 무스타파는 주말이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재희 언니는 레스큐 자격증 연습을 해야 하고, 태형은 딱히 말이 없었다. 나와 캠프파이어를 하러 가는 건 아무래도 불편하겠지. 그러나 이대로 숙소에 박혀서 핸드폰이나 하면서 주말을 보내기엔 아쉬웠다.
“나.”
태형이 오른 손을 들며 말했다.
“거기 가 봤는데 좋더라. 또 가고 싶어.”
이번에 당황한 것은 내 쪽이었다. 마음을 표현한 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았다. 그런 상대와 캠프파이어를 하러 가겠다고 자원하는 심리가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피할 것도 없었다. 태형과는 이야기를 좀 더 해보고 싶었다.
“낮에 만나서 같이 가. 이것저것 사야해.”
“그래.”
원하는 목적지에 같이 갈 동행을 구한 양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지만 마음이 복잡했다. 태형이 불편하게 대해주기를 원하는 건 아니었지만, 어떤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는 건 심기에 거슬렸다. 이런 식으로 계속 자신을 좋아해주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 태형은 어장 속의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면서 관리를 하는 타입인걸까? 매일같이 부대꼈지만 일주일 남짓 본 사람이기에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기엔 짧은 시간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좋지 않은 징조다. 내일 얘기해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무스타파가 블루홀에서 고프로로 찍은 사진을 보여 주었다. 머리까지 꽁꽁 수트로 싸맨 모습이라 예쁘고 말 것도 없는 모습이었지만, 불규칙적으로 흩어져 있는 산호 위에서 유영하는 모습이 잘 담겨져 있었다. 산소통을 매고 공기방울을 뿜어내면서 브이를 내밀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적어도 수심 이십 미터에서 찍힌 사진일 것이다. 마우스 휠을 넘기면서 보이는 사진들에는 자파리와 내가 앞 뒤로 헤엄치고, 재희 언니와 태형이 춤추듯 오리발을 움직이며 장난을 치고 있었고, 또 아름다운 블루 홀의 광경이 있었다.
“슈크란.”
고맙다는 뜻의 아랍어를 말하자 무스타파와 자파리가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발음을 제대로 했는지 확신이 없었지만 두 사람 다 개의치 않아보였다. 무스타파가 유어 웰컴, 과 같은 의미의 뭔가를 말했지만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그냥 웃음으로 답했다. 술 없이 사람과 교류한 게 얼마만이던가. 무스타파와 자파리는 종교적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했지만, 취하지 않고 자리를 즐길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는 점에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서울에서는 낯선 이에게 마음을 내주는 게 힘들었다. 생각해보면 그다지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고등학교 동창, 대학교 동기, 입사 동기가 아닌, 공통분모가 그다지 없는 사람들과는 애초에 친해지리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지금껏 알던 사람들과만 간헐적으로 만났으며 어느 시점부터는 그마저도 많이 줄어들어서 타인에게 곁을 내어준다는 감각을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 했다. 다합에 와서는 전공이나 대학과 같은 다른 요소가 중요하지 않았다. 아침이 되면 바다로 들어갔고, 모두가 똑같이 물에 흠뻑 젖어 뭍으로 나왔다. 스쿠버를 하러 온 사람들은 스쿠버를 했다.
낮에는 이십 도까지 올라갔지만 밤이면 제법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외벽의 뚫려있는 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소파를 팡팡 치면서 큰 소리로 태형과 이야기하는 재희 언니가 보였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태형은 실실 웃으면서 언니를 약 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스타파와 자파리는 카운터의 컴퓨터 앞에 앉아 고프로로 찍은 블루 홀의 영상을 보고 있었다. 컴퓨터 옆 간이의자에 앉아 샵을 둘러보면서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를 생각했다. 비디오를 빨리 감기 재생한 듯, 시간을 건너뛴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 이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