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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경 Oct 07. 2024

어장 속 물고기

chapter13

 태형은 베두인 카페에 가기 전에 간단히 장을 봐야 한다고 했다. 커피를 마시는 곳이 아닌데 어쩌다 카페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건지 궁금했지만 이유를 태형도 알 것 같지는 않았다. 가판대가 늘어서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자 알록달록한 과일들이 성의 없이 쌓여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오늘도 햇살이 강했다. 비를 싫어하는 나에게 비가 오지 않는 이집트는 맞춤형 여행지였다. 

 길 건너 파란색 천막 아래 옷걸이에 요란한 옷들이 걸려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도저히 보지 않고 지나칠 수 없는 형형색색의 옷들이 자신의 색을 뽐내듯 거리에 반쯤 나와 있었다.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네. 시장에서는 냉장고 바지 파는 거.”

바람에 흔들거리는 얇은 소재의 바지가 옷걸이에 걸려 나풀거리는 게 꼭 주유소 앞 풍선인형 같았다. 

 “들어가 볼래? 저거 은근 좋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갑자기 웬 냉장고 바지. 태형 앞에서 입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색감이었다. 

 “그래.”

 머리와는 다른 말을 내뱉는 입을 기막혀 하며 태형을 따라 길을 건넜다. 횡단보도도 없는 길을 태형은 잘도 건넜다. 

 “하나 사줄게. 삼천 원이면 사.”

 태형이 파란색과 진한 분홍색이 요란하게 섞인 긴 바지를 집어 들고 말했다. 미적 감각이 대단히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태형의 감각도 참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웬 바지야. 이거 밭에서 일할 때나 입는 거 아니냐고.”

 “입어봐 그냥. 여기 사람들 많이들 입는 거니까.”

 말릴 틈도 없이 값을 지불한 태형이 흐물흐물한 바지를 내게 내밀었다. 나도 숙소에 몇 개 있어. 진짜 편해 입어봐. 계속 권하는 사람 앞에서 거절할 수는 없었다. 

 “농활 온 것도 아니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태형이 나를 생각해주는 것 같은 상황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쟤는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도저히 탈의실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커튼 뒤에서 입고 있던 청반바지를 벗고 냉장고 바지를 입었다. 입은 것 같지도 않은 느낌, 부들부들한 감촉. 잠옷을 걸쳐도 이보다 안락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 이거 입고 갈래.”

 키득키득 웃으며 거 봐, 하는 태형은 뿌듯해 보였다. 졸지에 까만 색 반팔 티셔츠에 요란한 냉장고 바지를 입게 된 내 꼴이 우스우면서도 그저 즐거웠다. 입고 있던 청 반바지를 비닐봉지에 넣고 흔들며 태형과 걸어가는 길이 한층 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마트에 들어가서 고구마와 감자, 맥주를 샀다. 캠프파이어를 하면서 군고구마를 먹을 생각에 점점 신이 났다. 매일 같이 걸어가던 평범한 길이 페스티벌을 향해 가는 길처럼 느껴졌다. 

 베두인 카페는 광활한 사막이 있는 황량한 모래벌판에 뜬금없이 있는 곳이었다. 쌓여있는 모래 산들 사이로 느닷없이 나타난 장작들과 그 주위를 둘러싼 방석이 정말 캠프파이어를 생각나게 했다. 무릎까지 오는 크기의 바위들이 서로 기대어 장작 주변을 동그랗게 감쌌고, 천막 뒤로는 모래 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다. 지붕과 말뚝 사이를 이어놓은 전구들과 주위를 둘러싼 조명들은 아직 켜지지 않았지만, 해질녘인만큼 직원들은 불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능숙하게 쪼갠 나무를 켜켜이 쌓고 그 사이 공간을 확보하는 손놀림은 홀린 듯이 바라보게 되는 면이 있었다. 무스타파는 평소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했는데, 어쩐 일인지 오늘 한국인은 태형과 나뿐인 것 같았다. 

 안쪽 구석 자리에 앉자 직원들이 주전자에 담긴 차와 컵을 가져다주었다. 차를 줘서 카페구나. 별 생각 없이 주전자를 잡으려다 뜨거운 기운에 앗뜨뜨, 하며 황급히 손을 뗐다. 

 “은근히 조심성이 없어.”

 귀에 손을 댔다가 뗐다가 후후 불고 있는 나를 보며 태형이 한 마디 했다. 바다 속에서 위험천만한 행동을 하는 걸 고스란히 목격한 사람 앞에서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었다. 

 “차 따라주려고 그랬지.” 

 옷소매 끝 부분으로 주전자 손잡이를 감싸 쥐며 태형이 말했다.

 “뭐든지 조심 좀 해.”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하늘이 옅은 남색으로 물들어가자 조명이 하나 둘씩 켜지고, 여기저기서 불을 피우는 직원들의 속도가 빨라졌다. 태형은 고구마와 감자를 호일에 싸서 장작 밑 부분에 넣었다. 베두인 차 역시 자파리가 줬던 차처럼 달콤한 맛이 났다. 혀 끝에 남아있는 설탕가루를 입 안에서 굴리며 녹여먹는 재미가 있었다. 장작에 불이 점점 붙고 있었지만, 밤하늘의 채도가 짙어질수록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아까 긴 바지로 갈아입은 덕에 한결 나았음에도 워낙 추위를 많이 타는 탓이었다. 장작불이 얼른 더 커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 추워···.”

 태형이 흘긋거리더니 어깨에 매고 있는 가방의 지퍼를 열더니 구깃한 남색 셔츠를 꺼내 내게 건넸다.

 “나 진짜 알았어. 그렇게 말할 줄 정확히 알았어.”

 참을 수 없었다. 실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관자놀이가 아플 지경이었지만 미소가 새어나왔다. 

 “어떻게 알았어?”

 “우리 샵에서 다이빙 수트 제일 두꺼운 거 입고도 맨날 춥다고 하잖아. 그러면서도 보면 겉옷 안 챙겨 다니고. 뻔하지.”

 “아, 간파 당했어. 자존심 상해.”

 입가에 만연만 미소를 애써 감추며 팔을 끼워 넣으려고 셔츠를 펄럭이자 평소 태형에게서 나던 체취가 은은하게 풍겼다. 처음 봤을 때의 날라리 같던 면모를 생각하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의 반전이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다정함에 더 마음이 동했다. 그러나 순간 드는 생각은 나를 착 가라앉게 만들었다. 서율이한테도 이랬을까?

 서율이와 나는 거의 열 살 차이가 났다. 그야말로 어린애를 대상으로 질투를 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태형이 서율이에게도 지금처럼 행동했다면 서율이의 마음에는 태형의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잡한 마음을 감추면서 어둠이 내려앉은 태형의 옆모습을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조금 튀어나온 눈썹 뼈, 그다지 높진 않지만 오똑한 콧대, 도톰한 입술. 지내다 보면 좋아할 수는 있겠다 싶었다. 

 “일주일 뒤에 한국 갈 거야?”

 태형의 목소리 뒤로 타닥거리는 장작의 불 소리가 점차 커져가는 게 들렸다.

 “가야지 그럼. 휴가 끝나는데.”

 “취미로 왔다가 몇 달씩 살다 가는 사람들도 있더라. 재희 누나만 봐도.”

 무릎에 양 팔을 기댄 태형이 불쪽으로 몸을 기울여 손부채질을 했다. 

 “나도 가지 말라고?”

 “홍지연 오고 나서 다합 재밌긴 해.”

 내 쪽을 바라보지 않고 말하는 태형이 괘씸했다. 

 “너 원래 그래?”

 “뭐가.”

 “원래 그렇게 어장 속 물고기들한테 먹이 주고. 희망고문하고 그러냐고.” 

 “이게 뭐가 먹이 주는 건데.”

 “먹이 주는 거지.”

 “먹이 주는 거 아니야.” 

 “주는 거 맞아. 난 너 좋아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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