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중잡담(醉中雜談) - 술김에 적는 솔직한 이야기들
※ ‘취중잡담(醉中雜談) - 술김에 적는 솔직한 이야기들’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지인들이 익명으로 참여해, 술자리에서나 나눌 법한 솔직한 생각과 이야기를 가볍지만 진지한 시선으로 풀어내는 프로젝트입니다.
스타트업의 초기를 떠올려보면, 조직이 가진 자원은 언제나 부족했다. 법인 계좌의 잔액은 늘 긴장감을 만들었고, 대표는 조심스러웠으며, 모든 지출은 타당한 사유와 함께 검토되었다. 지출 승인에는 고민이 있었고, 불필요한 집행은 자연스럽게 걸러졌다. 그 시기에는 누구도 회사의 돈을 가볍게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투자를 받고 정부 과제를 확보하고 계좌 잔액이 늘어나기 시작하면 분위기는 변한다. 처음에는 작은 예외로 시작된다. “이 정도는 대표로서 사용할 수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은 대표 스스로에게는 사소한 자기설명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예외는 반복되면 금세 기준을 대체한다. 대표는 자신이 창업자라는 이유로 법인의 자금을 개인적 재량으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급여를 스스로 결정하고, 검증되지 않은 사택 계약이 이루어지고, 친한 직원에게 필요성 검토 없는 고가 장비를 제공하며, 업무와 무관한 식사에도 법인카드가 사용된다. 출장 항공권은 비즈니스석으로 바뀌고, 접대 명목의 고급 식사는 점차 관행화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세금 여부가 아니다. 기업의 자금은 구성원의 신뢰, 투자자의 신뢰, 그리고 회사 운영의 기준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다. 조직이 초기에 가졌던 긴장감과 신중함은 자금이 늘어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사라진다.
많은 대표들은 이렇게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 회사는 기준이 없는 게 기준이다.
스타트업은 에자일하게 일해야 하고, 그러려면 기준이 없어야 유연하다.”
언뜻 민첩한 조직을 만드는 방법처럼 들리지만, 실제 운영에서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기준이 없는 상태는 유연함이 아니라 임의성을 뜻하며, 임의성은 투명한 운영 체계를 가장 빠르게 무너뜨린다.
대표가 직접 이렇게 말하는 경우도 있다.
“품의 결재 꼭 해야 합니까?
직원들도 힘들고, 나도 매번 승인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책임질 테니 그냥 가자.”
그러나 CFO 입장에서 보면 이 말은 대개 ‘무슨 방식으로, 어디까지 책임지겠다는 것인지’가 불명확하다. 대표 개인의 책임과 법인의 책임이 실제 어떤 상황에서 분리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표들은 종종 이렇게 항변한다.
“우리 회사는 아무 문제 없다.
감사보고서도 있고, 전에 일하던 회계·재무 담당자들 말로는 아무 이상 없다던데,
왜 당신만 문제라고 하는가?”
그러나 ‘그 회계·재무 담당자는 왜 회사를 떠났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경우는 드물다.
회계감사 역시 자주 오해된다. 감사를 받았다는 사실은 어디까지나 회계기준에 따라 재무제표가 적정하게 표시되었는가를 확인하는 절차일 뿐, 경영 윤리나 내부 통제의 건전성을 보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표가 이를 “우리 회사는 문제가 없다”는 식의 인증서로 받아들인다.
실제 문제는 대체로 그 이후에 드러난다. 법인카드 규정이 없고, 승인 프로세스가 존재하지 않으며, 비용 기준이 모호한 상태에서 “이건 대충 처리된다”는 말이 조직 내에서 자연스럽게 오간다. 출장 식사비를 교육비로 돌리고, 개인 간식비를 복지비로 분류하고, 대표의 이동비를 직원 명의로 결제한다. 회계 항목을 돌리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는 것은, 숫자만 보고 실질을 보지 못하는 판단이다. 내부에서 ‘이상하다’는 감각을 느끼는 순간, 이미 문제는 시작된 상태다.
특히 자금 권한을 초기 구성원이나 대표의 측근에게 맡기는 관행은 구조적 위험을 키운다. “오래 함께 일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는 판단은 개인적 신뢰와는 별개로, 지출의 투명성을 포기하는 결정이 된다. 실제 집행 내역과 그 근거를 누구도 검토하지 않는 구조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경영자의 통제력이 약화된다.
감사는 이러한 허점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낸다. 법무·회계법인이 “작년 마케팅비의 실제 집행 내역이 무엇인가” 라고 묻는 순간, 많은 조직에서 대답은 멈춘다. “담당자가 정리했지만 이미 퇴사했다”는 말이 반복된다. 이는 단순한 회계 미비가 아니라, 경영 윤리와 통제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대표가 회사의 돈을 기준 없이 사용하기 시작하면, 그 변화는 조직 전체에 빠르게 확산된다. 초기에는 직원들도 머뭇거린다. “이건 가능한 지출인가?”, “개인 비용은 아닌가?”와 같은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하지만 대표가 비즈니스석을 이용하고, 가족 식사를 법인카드로 결제하고, 고급 식당에서 접대를 반복하는 모습을 조직이 직접 보게 되면 기준은 다시 정의된다.
직원들은 대표의 패턴을 학습한다. 출장 중 친구와의 식사를 법카로 처리하고, 야근 식대를 인원보다 넉넉하게 청구하며, 개발팀은 개인용 프린터를 회사 명의로 구매한다. 마케팅팀은 재택 상황에서 사용하는 도구들을 회사 명의로 프리미엄 결제한다. 한 번 시도해서 아무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면, 그 행동은 곧 ‘허용된 행위’가 된다.
문제는 더 은밀한 방식으로 확장된다. 대표가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만 예외와 특혜를 부여하기 시작할 때다. 처음에는 재무팀만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내부에서는 모든 정보가 자연스럽게 퍼져나간다. 조직은 숨겨진 특혜를 비밀로 유지하지 못한다. 대표가 조심하는 이유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게 뭐가 문제인가”라는 태도로 전환되는 순간, 경영자는 스스로 통제력을 잃기 시작한다. 이때 구성원들은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예외의 그룹’에 속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쉽다. 이는 조직이 무너지는 가장 빠른 경로다.
나는 다양한 회사에서 CFO로 일하며 상장 과정도 경험했고, 여러 조직의 내부를 깊이 들여다볼 기회를 가졌다. 그 과정에서 매우 다양한 형태의 특혜와 예외를 직접 봤다. 가족을 임원으로 두는 일은 드물지 않고, 애인에게 강남 사택을 제공하거나, 측근에게 고급 법인차를 리스해주거나, 수백만 원 상당의 선물을 제공하는 사례도 있었다. 골프를 좋아하는 대표가 본인 뿐만 아니라 가까운 직원에게도 회사 자금으로 골프 강습을 결제하는 일 또한 실제로 존재한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러한 혜택을 받은 사람들조차 이를 조직에 대한 공헌과 무관한, 당연한 권리처럼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대표가 기준을 허물면, 조직은 그 기준을 그대로 따라 새로 만든다. 대표의 예외는 결국 조직 전체의 기준이 된다.
윤리가 반복된 선택이라는 말은 단순한 도덕적 조언이 아니라, 실제 조직 운영에서 반복적으로 관찰되는 패턴에 가깝다. 작은 선택 하나는 별문제가 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선택이 같은 방향으로 반복되면 곧 구조가 된다. 구조는 관행을 만들고, 관행은 결국 문화라는 이름으로 고착된다. 이때부터는 한두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조직 전체의 기본 태도가 바뀐다. 경영자 역시 처음의 작은 편의적 선택이 어느 순간 되돌리기 어려운 결과를 만든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경우가 많다.
경영자의 반복된 예외는 구성원에게 묵시적인 메시지를 보낸다.
“이 회사에서 기준은 선택적이다.”
“정책보다 관계가 더 중요하다.”
“규정보다 예외가 더 강력하다.”
이 메시지는 빠르게 전파된다. 조직 내부에서 가장 빠르게 확산되는 것은 언제나 ‘규정’이 아니라 ‘예외’다. 예외는 입소문을 타기 쉽고, 규정보다 큰 보상처럼 작동한다. 이때 사람들은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예외의 대상이 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한다. 구성원들이 기준을 따르기보다 ‘예외 그룹의 일원’이 되는 것을 선호하는 순간, 조직은 더 이상 건전한 방식으로 운영되기 어렵다.
반복된 예외는 회사의 외부 신뢰에도 균열을 만든다. 회계법인, 투자자, 이사회 등 외부 이해관계자는 숫자 자체보다 숫자 뒤에 숨어 있는 패턴을 본다. 투명하지 않은 지출 관행이 지속되면, 언젠가는 감사를 통해, 실사를 통해, 혹은 내부 제보를 통해 드러난다. 한 번 잃은 신뢰는 단순한 제도 정비나 인사 교체만으로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윤리가 반복된 선택이라는 말은, 결국 경영자의 일상적인 판단이 조직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의미다. 단 한 번의 편의적 선택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행동이 방향을 바꾸지 않고 반복되면, 그것이 곧 ‘경영자의 기준’이 된다. 그리고 이 기준이 구성원의 행동을 결정하고, 구성원의 행동이 조직의 방향을 결정한다. 윤리는 개인의 성향이나 도덕적 기호가 아니라, 구조적 결과로 이어지는 선택의 누적이다.
따라서 윤리를 지킨다는 것은 거창한 선언의 문제가 아니다. 매일의 작은 지출, 작은 승인, 작은 선택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는 문제다. 경영자의 선택이 곧 조직의 기준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때, 윤리는 제도나 문서 속 문장이 아니라 실제 경영 행위로 존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