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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진 Dec 14. 2019

유학생의 프랑스 집밥: 스테이크 덮밥

크리스마스 2주 전, 파업 2주 째



  하루에도 스무 번씩 이 나라가 좋아졌다가 싫어진다. 내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어서, 무언가 쓰는 일이 괴로웠다. 마감을 앞둔 작가들이 호텔로 도망을 치듯 한동안 브런치 대신 유튜브 창을 띄워놓았다. 유튜브 속에서 보이는 프랑스는 반짝반짝하고 아름다운 땅인데 내가 살아가는 나라는 그렇지 않다. 파리지앵들에 대한 환상은 하루에 다섯 번쯤 니하오를 들었을 때 포기했다. 샹송을 들으며 느꼈던 불어의 아름다움은 남성 명사와 여성명사를 배울 때 잊어버렸다. 화면 속 하얗게 화장한 유튜버들이 에펠탑 앞 잔디밭에서 브이로그를 찍으며 웃는다. 프랑스에 오면 저렇게 될 거라고 상상했던 날이 있었다.


  기운이 없는 날은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 저기압에는 고기 앞으로, 오래된 인터넷 농담을 흥얼거리며 장을 보러 나선다. 프랑스는 지금 대대적인 파업 중이다. 파업에 동참하는 건 학교도 마찬가지라서 지난주부터 몇 개의 수업과 몇 번의 시험이 미뤄지고 당겨지거나 취소되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한국인 교환학생들은 먼저 한국으로 돌아갔고, 크리스마스를 앞둔 지금 거리는 어디를 가도 별 모양 전등으로 빛난다. 무엇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 환경에서 나는 비로소 혼자임을 느낀다.


  혼자 걸어간 마트 입구에는 진짜 나무로 된 크리스마스트리들이 가득하다. 알록달록한 부쉬 드 노엘이 든 냉장고와 빨간 리본을 묶은 샴페인들을 지나면 고기를 모아둔 구역이 나온다. 처음 프랑스에 와서 소고기를 먹었을 때는 너무 맛이 없어서 깜짝 놀랐다. 인터넷으로 등심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고 산 건데도 한국과는 맛이 너무 달랐다. 몇 번의 실패를 더 겪고 나서야 이곳에서는 값이 더 싼, 지방이 적당히 붙은 고기를 골랐다. 지방이 붙지 않은 것보다 1유로 정도 싼 4유로짜리 소고기는 한국에서 사면 분명 만 원이 넘었을 고기였다. 나의 값어치는 결국 모양이 아니라 환경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멍한 기분으로 소고기, 맥주, 양파 몇 개와 오렌지 몇 개를 샀다. 마트를 나와 프랑스가 좋은 이유와 싫은 이유를 번갈아 부르며 걸었다.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인종차별, 피카소의 그림이 걸린 동네 미술관, 캣 콜링, 횡단보도 앞에서는 무조건 서는 차들, 불친절한 교수와 예고도 없는 휴강, 휠체어를 타고도 안전하게 지하철을 탈 수 있는 곳. 밉다가도 좋고 좋다가도 미운 나라.






  차가운 소고기를 책상 위에 두고 밥을 짓는다. 얼마 전에 마트에서 조금 더 비싸지만 조금 더 맛있는 쌀을 찾았다. 천육백 원만큼 한국 쌀에 더 가까운 쌀을 씻고, 한 컵의 물을 붓는다. 작은 밥솥이 버튼을 누르자마자 희미한 소음을 내며 일을 시작한다.


  이케아에서 사 온 도마에 양파를 꺼내 썬다. 양파 반 개를 덮밥에 들어갈 정도로 얇게 썰고 나면, 프라이팬을 달굴 시간이다.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잘게 썬 마늘을 넣는다. 마늘이 노릇노릇해 보일 때 불을 약간 줄이고 소고기를 올린다. 소고기가 뜨거운 기름에 닿아 치직거리는 소리가 난다. 고기를 적당히 굽고 양파를 썰었던 도마에 옮긴다. 고기를 구운 기름이 마늘과 함께 남은 팬에 간장 조금과 설탕, 케첩, 굴소스를 넣는다. 적당히 소스가 끓을 때 미리 썰어둔 양파를 넣고 숨이 죽도록 볶는다. 양파가 아삭거리지 않을 정도로 익으면 프라이팬을 두고 도마로 돌아간다. 식은 소고기를 얇게 썰고, 양파와 함께 볶으면 덮밥 재료는 완성이다.


  고기를 굽는 사이 혼자 취사를 마치고 뜸을 들이고 있던 밥솥을 연다. 흰쌀밥을 숟가락으로 퍼서 그릇에 옮기고, 소고기와 양파를 그 위에 올린다. 콩나물밥을 만들 때처럼 또 쪽파가 그리워지지만 참는다. 한국에서 받은 참기름을 덮밥 위에 두르곤 이제 익숙해진 혼자만의 인사를 했다. 입과 귀가 트이지 않은 아이로 살았던 반년 간, 대답이 없는 인사를 하는 데엔 능숙해졌다. 특히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나'를 위해서는.


  한국에서는 하루를 준비할 시간,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오늘도 수고했어요. 잘 먹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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