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밴쿠버 공립 도서관 중앙점
집을 나올 때도 캐리어 하나 가득 책을 싣고 가출했던 아이는 십 년 가까이 지난 뒤에도 캐리어 하나 가득 책을 싣고 캐나다에 왔다. 대학원생 때에도 읽어야 할 책이 아니면 눈길도 안 주었는데, 근 몇 년 간 활자가 왜 이렇게 반가운지 모르겠다. 그래서 얼마나 무겁던지 간에 가방 속에 책 한 권은 꼭 들고 다니는 어른이 되었다.
그런 내가 8개월이 지날 때까지도 밴쿠버 공립 도서관(VPL, Vancouver Public LIbrary)에 가보지 않았다는 것은 나로서도 신기한 일이었다. 집 근처만 해도 3개나 있을 정도로 상당히 많은 지점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VPL 중앙점(Central Library)을 찾아낸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다. 군대에 있을 때에도 거의 모든 시간을 독서로 보내고 공익근무를 할 때에도 하루 8시간씩 책을 읽었는데 이 나라에 와서는 남는 시간에 책을 읽기보다 술을 마셔댔으니, 지금 보니 나는 이 나라가 퍽 적응이 안 되었던 게 분명하다. 어쨌든 마음이 점점 이곳에 정을 두기 시작해서 그런지 최근 들어서야 겨우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도서관에 도착하고서야 알게 된 사실은, 알고 보니 밴쿠버 다운타운에 올 때마다 매번 본 건물이었다는 것이다. 원래부터 건축물 자체로도 유명한 곳이었어서 그런지 지나칠 때마다 건물이 콜로세움 같고 정말 멋지다고는 생각했는데 그 건물이 도서관일 줄이야? 더군다나 막상 가보니 웬걸, VPL 중앙점은 멋진 외관만큼이나 알맹이가 뛰어난 곳이었다.
가장 반가웠던 점은 뭐니 해도 한국어로 된 장서들이 6면 빼곡히 비치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어로 된 소설이 6분의 3, 학술서적과 에세이가 6분의 2, 어린이 도서가 6분의 1. 그중에 이미 한국에서 읽어 본 책들도 있어서 내심 반가웠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부터 읽고 싶었던 책들까지도 몇 권 발견하게 되어 무척 기뻤다. 거기에 더해 내가 지금까지 알지도 못했으나 내 눈길을 잡아끄는 새로운 책들은 낯익은 책 보다 두세 배가량 많았다. 도서관에 오기 이전까지는 다운타운 근처에 살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 이 도서관을 알게 된 이상 다운타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여권과 워크퍼밋을 챙겨서 도서관에 방문하니 도서관증도 발급받을 수 있었다. 발급받자마자 미리 점찍어둔 책 2권을 얼른 대출했다. 지금까지의 도서관 경험으로 보아 빌리고 싶은 책은 그 자리에서 바로 빌려야 한다.
항상 책을 읽기 위해 집 근처 카페에 가서 꼬박꼬박 커피 한 잔 값의 돈을 치렀던 내가 이제는 책가방 하나 메고 다운타운 도서관까지 꼬박꼬박 찾아간다. 물론 새로운 직장을 찾기 전까지 돈이 부족하고 시간은 넘쳐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집에서 싸 온 커피를 조금씩 마시며 하루 온종일 도서관 자리에 앉아 빈둥거리면서도 ‘그래도 뭔가 하고 있으니 개백수는 아니다’하며 자기 위안을 삼고 있다. 어쨌든 마음이 점점 이곳에 정을 두기 시작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