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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아들 잡으려다 무릎이 나간 건에 대하여

비대위의 비대위를 출범합니다

by 다비드

비대위 체제가 정착되고 우리의 일상은 순조롭게 굴러가고 있었다. 그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그때까지 우리의 비대위 시스템은 정말 완벽했다. 엄마나 장인장모님이 오시면 직접 운전해서 아내의 출근과 아들의 등하원을 담당해 주셨다.

아침 루틴:

8시 30분: 아내와 아들을 차에 태우고 아내 회사로 출발

8시 55분: 아내 회사 도착, 아내가 아들을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출근

부모님은 집으로 돌아가서 집안일과 휴식

저녁 루틴:

오후 4시: 직접 어린이집에 가서 아들 픽업

4시 30분: 집 도착, 아들과 함께 시간 보내기

아내와 나는 각자 알아서 퇴근

이 시스템 덕분에 아내는 출퇴근 스트레스 없이 회사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나도 마음 편히 분당까지 출퇴근할 수 있었다.

20210815_122339.jpg 할머니 손 잡고 집으로

그렇게 평화롭던 2021년 11월 어느 날 오후, 엄마가 평소처럼 아들을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나와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들이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뛰어간 것이다.

"어? 얘야! 천천히 가!"

2살 아이가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뛰어가는 상황. 엄마는 반사적으로 아들을 잡으려고 급히 몸을 꺾어서 뛰어갔다. 그 순간, 무릎에서 "뻑!" 하는 소리가 났다. 다행히 아들은 별일 없었다. 하지만 엄마의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다.

퇴근하고 돌아와서 엄마에게 상황 설명을 들었다.

"아들이 갑자기 뛰어가길래 잡으려고 했는데, 무릎에서 소리가 나더라."

"많이 아프세요?"

"걸을 수는 있는데 좀 아프다."

바로 다음날 휴가를 내고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갔다. 정밀 촬영 결과, 무릎 연골이 찢어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행히 연골 중앙부에 조금 찢어진 거라 심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연세가 있으시니 앞으로는 뛰시면 안 되고, 걷기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의사의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당장 몇 개월은 요양이 필요하겠네요."

그렇게 엄마는 비대위에서 갑작스럽게 하차하게 되었다.

20211017_165024.jpg 니 잡을라다 우리 엄마 연골 잡았다(...)

아들 봐주시다가 무릎을 다치신 엄마에게 정말 죄송했다.

"엄마, 정말 죄송해요. 우리 때문에..."

"아니야, 괜찮다. 이런 일도 있는 거지."

엄마는 담담하게 말씀하셨지만,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 엄마는 아들 다 키우고 아들의 아들까지 키우다 무릎이 나가버렸네

몇 개월 동안 걱정 없이 도움을 받으면서 이런 위험에 대한 경각심이 부족했던 것 같다. 어르신들이 매월 1주씩 와서 도와주시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확 들었다. 연세가 있으신 분들이 2살 아이를 돌보는 것은 언제든 이런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구나.

엄마가 하차하시면서 비대위 시스템을 재편해야 했다.

장인장모님께 매월 2주씩 와달라고 부탁드리기는 죄송했다. 당신들도 무리가 될 것이고, 무엇보다 엄마와 같은 사고가 또 일어날 수도 있었다. 결국 새로운 시스템으로 변경했다. 비대위의 비대위랄까(...).

수정된 비대위 시스템:

1주차: 장인어른, 장모님 파견

2주차: 셋이서 버티기

3주차: 셋이서 버티기

4주차: 셋이서 버티기

3주는 우리끼리 버티고, 1주만 장인장모님께 도움받는 것으로.

20210904_161541.jpg 외할아버지의 허리는 아직 건재하다구!

다행히 내 분당 프로젝트가 겨울 동안 일이 좀 줄어드는 일정이었다. 그래서 내가 육아에 더 투입하는 걸로 방향 설정. 사고에 의한 계기였지만, 육아 홀로서기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기적으로 부모님 도움을 받는 비대위를 언제까지고 계속할 수는 없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엄마의 무릎 연골과 맞바꾼 뼈저린 교훈(...).

첫째, 부모님의 도움이 당연한 게 아니라는 것.
둘째, 언제든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길 수 있다는 것.
셋째, 결국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렇게 우리는 육아 홀로서기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을 시작했다. 비대위의 비대위 기간 동안 셋이서 버티는 3주를 잘 보내고 적응하는 것부터. 그리고 비대위 해체 후에도 지속가능한 육아 시스템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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