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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J Nov 30. 2019

고양이에게 리본을

고양이에게 리본을

'고양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고양이라면 마땅히 목걸이를 차고 있어야 한다.' 장 그르니에의 이 문장이 집요하게 내 기억을 붙잡고 있다. 녀석이 지난 4월 우리 집에 들어온 이후, 저 문장의 중독성은 더 강해진 듯하다. 아침에 우연히 듣게 된 어떤 노래의 한 소절처럼, 나도 모르게 저 짧은 문장을 종일 중얼거릴 때도 있다.

녀석을 ‘후추’라고 부른 이유는 조미료 후추와 털 색깔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르건 말건 녀석은 한 번도 자신의 이름에 반응한 적이 없다. 창가에 똬리를 틀고 낮잠을 자거나 자신의 몸을 연신 혀로 핥다가도, 내가 다가가려고 할 때 더 먼 곳으로 이동하거나 빠른 동작으로 사라진다.

옆에 두려고 완력을 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녀석의 날카로운 발톱과 어금니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아프리카 벌판을 누비며 영양의 목덜미를 도모하는 살쾡이의 그것들과 백지 한 장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친구가 내 몸에 난 상처를 보고 그 이유를 물었을 때, 나는 갠지스 강가의 성자처럼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이렇게 폼 나게 한마디 했을 뿐이다. ‘벗이여 고양이를 기른다는 것은 그에게 손목과 발목을 내어 주는 것이라네.’

녀석의 동공은 어둠이 짙어질수록 크게 열리고 날이 밝아지면서 서서히 작아진다. 사람들이 잠이 드는 심야나 이른 새벽은 특히 사냥이나 전투를 하기에 최적의 시간이다. 잠을 자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깨면 어김없이 녀석이다

보이지 않는 적과 대치하고 있거나, 골프공을 굴리며 사냥감을 추격하거나, 도움닫기를 하며 방충망 위에 있는 적을 덮치고 있다. 날이 밝아질 무렵이면 승패와 관계없이 녀석의 전투는 끝난다. 기지개를 몇 번 켜고 하품을 늘어지게 한 다음, 소파 위의 적당한 곳에 코를 박고, 가장 편안한 자세로 긴 잠을 청한다. 심야의 전투가 평소보다 치열했던 날은 코까지 고는 경우도 있다.

고양이는 가장 독립적인 동물이다. 마실 물을 갈아주고, 모래의 배변 흔적을 없애주고, 제때에 간식거리만 챙겨주면 만사 오케이다. 볕이 잘 드는 창가 의자에 앉아 낮잠을 자거나, 창 밖 풍경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거나 캣타워를 오르내리며 혼자만의 유희에 몰입할 뿐이다.

녀석의 장점 중 하나는 무엇보다 과묵하다는 점이다. 사랑받는 것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인 듯 사람 주위를 맴돌면서 무언가를 끝없이 갈구하는 개 하고는 사뭇 다르다. 가끔 녀석이 무언가를 소리 내어 발음할 때는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중요한 무엇인가를 소홀히 했을 때뿐이다. 녀석은 소리 내어 그것을 지적하고 나를 질책하는 것이다.

‘사람을 싫어하는 이들과 이기주의자들은 고양이를 좋아한다.’라고 그르니에는 말한다. 평생 자기밖에 모르는 고양이와 이기적인 사람과의 평화로운 공존은 자기 영역 밖의 세계에 대한 본능적인 무관심을 기초로 하고 있다. 세상의 온갖 부조리와 불화가 내 눈 앞의 참치캔 하나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근거란 대체 무엇인가.

늦은 귀가 후 소파 등받이 위에 녀석이 보이지 않을 때는 무언가 사고를 쳤을 가능성이 크다. 역시 거실 바닥은 깨진 화분 조각과 뿌리 뽑힌 서양란, 그리고 사방에 흩어진 흙으로 어지럽혀져 있다.

십중팔구 녀석이 숨은 곳은 텅 비어있는 아들 방의 먼지 쌓인 침대 밑일 것이다. 고양이는 불안감을 느낄 때 가장 후미지고 어두운 곳을 찾는다. 그것은 오랫동안 그의 야생의 선조들이 경험으로 터득했던 생존방법이었고 그것의 유전형질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고양이 길고 긴 수난사는 중세에 절정을 이루었다. 가톨릭이 신의 역할을 대행했던 그 시대에 고양이는 마녀와 사탄의 현신이었다. 고양이는 일상적으로 베어지고 신체의 일부분이 절단되었으며 급기야 고양이 화형식은 제도화되었다.

수백 년 동안 고양이는 사람의 눈을 피해 어둡고 습한 배수구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설치류를 찾아 헤맸고, 인근 야산의 냉기 어린 바위틈에서 불안한 잠을 청해야만 했다.

고양이는 결국 살아남았지만 그 수백 년 동안의 풍찬노숙, 모멸과 치욕의 역사를 잊을 수 없었고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방법을 DNA에 꼼꼼하게 기록했다. 그는 누구도 신뢰하지 않으며 그 누구에게도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의 주인이므로 그 누구도 그를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녀석은 의심을 눈길을 거두고 다시 어슬렁거리며 거실로 나온다. 어느 한순간, 거실을 빠르게 가로질러 창가로 뛰어오르는 저 눈부신 도약, 오랜 침묵, 그리고 다시 바닥으로의 돌연한 착지.

녀석을 보고 있노라면 다시 그르니에의 저 문장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고양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고양이라면 마땅히 목걸이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리본 목걸이를 좋아할지 여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창가에 앉아 먼 곳을 응시하는 녀석처럼 세상의 모든 고양이는 교감과 단절 사이에 존재한다. 햇살과 어둠 사이에, 사랑과 상처 사이에 고양이는 존재한다. 가장 차갑거나 혹은 가장 뜨거운 모습으로 그것은 홀로 존재한다.

#고양이

#장그르니에

#고양이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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