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
요즘 따라 지갑이 자꾸 무겁다.
지갑 속엔 카드 몇 개, 지폐 몇 장 정도인데
왠지 무게가 손끝에 느껴질 정도다.
돈 때문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건 돈 때문이 아니다.
지갑 속을 열어보면
언제 넣었는지도 모를 영수증,
식당이나 병원의 명함,
몇 달 전 들렀던 전시장 입장권,
심지어는 이제 번호마저도 지운 사람의 명함까지
가지런한 듯 무심하게 들어 있다.
하나하나는 별 게 아니지만
다 모이면 그 안엔
작은 ‘기억의 무게’가 눌려 있다.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대부분 필요 없는 것들이라는 거.
영수증은 이미 결제 알림으로 남아 있고,
명함은 휴대폰에 입력돼 있거나,
더는 연락할 일도 없는데
나는 이상하게 그걸 버리지 못한다.
‘언젠가 쓸지도 몰라.’
‘그래도 한때는 소중했던 기록이니까.’
‘이걸 꺼내면 그날이 잠깐 떠오르잖아.’
그렇게 애매한 이유들 속에서
지갑은 조용히 부풀고,
나도 모르게 그 무게를 품고 다닌다.
그러나 그 무게는 가방 속에서만 느껴지는 게 아니다.
계산대 앞에서 결제를 하려다가
찾고 싶은 카드가 안 보일 때,
명함을 빼려다가
엉뚱한 영수증이 쏟아질 때,
나는 내 안에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걸 느낀다.
왜 이렇게 쌓아뒀을까.
아니 왜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을까.
왜 ‘정리’보다 ‘그냥 넣기’를 더 자주 택했을까.
그러다 문득,
지갑이라는 공간이
나의 마음과 너무 닮았다는 걸 깨닫는다.
겉으로 보기엔 말끔하지만
속엔 내가 아직 정리하지 못한
이름들과 순간들과 감정들이
잊힌 듯 눌려 있고,
어쩌다 꺼내질 때마다
잠깐씩 울컥하게 만든다.
정작 중요한 카드 하나 찾는 데
몇 초밖에 걸리지 않으면서도
쓸모도 없는 걸 그대로 품고 있는 모양이,
마치 사라진 인연을 아직도
마음 한켠에 담아두고 있는 못난이를 보는 것만 같다.
그럴 땐, 조금 슬퍼진다.
그리고 동시에 그 무게만큼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살았는지도 느껴진다.
그 기억들을 당장 다 지워버릴 순 없다.
버리려 해도 손이 망설여지고,
한 장 한 장 꺼내다 보면
‘이건 그날 같이 갔던 곳인데’
‘이 사람, 그땐 참 고마웠는데’
같은 감정들이 따라온다.
그래서 이제부터 나는
지갑을 정리하는 날엔
그냥 물건만 버리는 게 아니라
마음을 한 번 정돈해보려 한다.
한 장씩 꺼내본다.
구겨진 영수증은
그날의 피곤함을 말없이 증명해주고,
접힌 명함은
한때 내가 누구를 만났는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내게 묻는다.
“이건 아직도 내 안에 있어야 할까?”
“혹시 그냥 두는 게, 익숙해서 그런 건 아닐까?”
모든 걸 다 버리진 못하더라도
내가 지금 붙잡고 있는 것 중
‘이제는 보내도 괜찮은 것들’을
조금씩 덜어내고 싶다.
그렇게 정리하고 나면
지갑이, 마음이
살짝 숨을 쉬지 않을까.
비움이란 건
잊는 게 아니라,
남겨둘 가치 있는 것을
더 잘 간직하기 위한 정돈이니까.
오늘도 지갑 속 작은 무게에
잠깐 발걸음이 느려졌다면,
그건 아마
지금 이 순간의 내가
내 과거의 나를 다시 바라보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