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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탐색자 Sep 13. 2020

2019년, 그때 왜 '아파트'를 사지 않았던가?

집은 '사는 게' 아니라 '사는 곳'이라며, 내 집 마련 따위는 관심 없었던 첫째 딸은 요즘 생각이 바뀌고 있다. 9년 전 결혼을 할 때와 비교해서 서울의 집값이 올라도 너무 오른 거다. 어머니 말대로 그때 집을 샀어야 했다.

 

2000년대 초반 공부를 위해 영국으로 떠날 때만 해도 그녀는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주택문제는 궁극적으로 공급이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어머니한테서 귀가 닳도록 내 집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이야기를 들었어도, 우리 사회도 곧 외국처럼 주택이 소유에서 거주의 개념으로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택보급률이 100%에만 도달하면 집에 대한 집착도 사그라들지 않겠는가... 돌아보면 그게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영국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줄곧 세입자로 살았지만, 어머니가 겪었다는 셋방살이의 설움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세입자로 사는 것이 더 마음이 편했다. 집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집주인에게 연락만 하면 되는 거였다. 물론 집주인을 잘 만난 덕분이긴 했다. 못된 집주인을 만나 계약기간이 끝나 이사를 나가는데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보증금을 못 받는 경우를 주변에서 더러 보기는 했었다. 공부를 마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매달 나가는 월세가 아까워 집을 살까 고민도 했었지만, 주택 구입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다운페이먼트(주택 가격의 20% 정도)를 마련하기 위해 아등바등 살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집보다는 '경험'을 소유하고 싶었다. 2-3일 정도의 시간적인 여유만 생겨도 어디론가 훌쩍 떠날 수 있는 삶이 더 값지게 생각되었다. 더구나 집을 산다는 건, 어쩐지 일정한 장소에 얷매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한 곳에 정착해서 살아야 할까? 이곳저곳 살고 싶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집에 살아보고 싶었다.

 

첫째 딸은 영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호주에서 일을 했다. 외국에서 생활을 하는 동안 그녀가 만난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우리 사회처럼 집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았다. 주택청약통장에 생활비의 대부분을 쏟아붓고 복권 당첨과도 같은 아파트 분양 당첨에 목을 매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주택을 소유하지 못해도 불편하기는 하지만,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개인의 형편에 맞추어 공공임대주택이나 사회주택, 민간임대주택에 살면 되는 거였다. 공공임대주택이나 사회주택은 개인의 경제적인 능력에 따라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을 수 있고, 민간임대주택도 임대료 폭등으로 쫓겨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선진국의 복지시스템에 대해서 복지 의존적인 문화를 만든다, 가난한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드는 것이다 등등의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지만, 어쨌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주거의 문제는 교육이나 의료 서비스처럼 기본적인 권리로 인식되어 있었다. 집이 없어서 당하는 설움이 억울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내 집을 마련해야 하는 우리 사회와는 너무나 달랐다.

 

더구나 한번 주택을 마련하면 웬만하면 이사를 하지 않고 계속 살았다. 주택의 자산적 가치보다 삶의 추억이 묻어나는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심지어 대를 이어 같은 집에 거주하고 있었다. 집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다. 말 그대로 '홈 스위트 홈(Home Sweet Home)'인 듯했다. 친구 부모님이나 지도 교수님 댁을 방문할 때면, 늘 집안 이곳저곳을 가꾸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가든센터에서 새로운 꽃이나 나무를 사다가 정원에 심거나 페인트를 사서 새로운 칼라로 집안 분위기를 바꾸고 있었다.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저마다 자신의 스타일대로 조금씩 천천히 필요에 따라 고친, 손때 묻은 집이었다. 모델하우스에서 본 듯한, 다들 그저 그런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우리네 집들과 너무나 달랐다. 자신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집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는데 신이 나서 대로변에 ‘재건축 사업 승인 축하 현수막’를 붙여대는 우리와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2010년 결혼을 했을 때만 해도 주거의 안정만 찾을 수 있다면 굳이 주택을 소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남편도 그녀의 생각에 동의했다. 첫째 딸이 신혼살림을 시작한 곳은 서초동의 낡고 작은 아파트였다. 전셋집이었만, 노란 꽃무늬 벽지로 포인트를 주고 방문과 몰딩은 하얀색으로 칠을 하였다. 부엌가구도 새로 장만하고 낡은 화장실도 수리를 했었다. 남의 집에 뭐하러 돈을 들이냐고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생긴 '우리만의 공간'이었다. 우리가 사는 동안은 어쨌든 ‘우리 집'이 아닌가. 당시만 해도 전세가에 1억만 더하면 살던 아파트를 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어릴 적부터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에 사는 게 꿈이었기에 돈을 모아 언젠가 마음에 쏙 드는 집을 마련하고 싶었다. 그게 한옥이면 더욱 좋겠다고 생각했다. 외국생활을 하면서 보아왔던, 따뜻한 집의 모습을 마음에 그렸었다.  

 

전세 살고 있던 아파트가 재건축을 시작하자 어쩔 수 없이 이사를 해야 했다. 불과 몇 년 사이 아파트 전세 가격이 꽤 많이 올라있었다. 그래도 신반포에 있는 친정집 가까이에 살고 싶어서 아파트보다는 비교적 저렴한 빌라로 이사했다. 빌라는 아파트와 단독주택의 중간 형태라고는 하지만, 아파트에서의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네도 마음에 들고 이 빌라에 계속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2019년 겨울, 12.16 부동산 대책안이 발표된 이후, 첫째 딸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대책안의 불똥이 전세시장으로 튄 것이다. 투기과열지구의 집값 상승은 주춤했을지 모르나 서울의 주요 인기 거주지역의 전셋값이 하루가 다르게 급등하고 있다. 투기꾼을 잡겠다던 정부의 부동산 대책은 오히려 돈 없는 무주택자들만 압박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현금 보유자들만 알짜배기를 '줍줍'하고 무주택 서민 실수요자들은 집을 살 수 없다"(경향신문, 2019년 12월 18일 자)는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이우진 교수님의 이야기가 뼛속까지 와 닿았다.


당장 내년에 전세 계약을 다시 해야 하는데, 어찌해야 하는가... 지금은 은행에서 대출도 받기 어려운 형편이다. 우리 사회에서 임차가구의 평균 거주기간이 고작 3년 정도라는데, 그럼 3년마다 이사를 다녀야 한다는 건가? 더구나 임대료가 지금처럼 지속적으로 오른다면 주거의 안정은커녕 주거를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우리나라 국민의 82.5%가 '내 집을 꼭 마련해야 한다'라고 밝힌 데는 바로 주거 불안정의 문제도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국민이 가장 필요로 하는 주거지원 프로그램이 '주택구입자금 대출 지원(31.7%)'이고 그 다음이 '전세자금 대출 지원(18.8%)'라고 나타나지 않았던가.

 

지난 일을 돌아보고 싶지는 않지만, 첫째 딸이 살던 신혼집은 재건축 승인이 나자마자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격이 올랐다. 남편과 아무리 아껴도 도저히 모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이었다. 집은 역시 소유해야 하는 것인가... 최근 들어 30대가 서울에서 최대 주택 구매층으로 떠올랐으며, 40대는 교육, 교통, 그리고 쇼핑 등 모든 주거환경이 뛰어난 서초와 강남권 입성을 서두른다는 기사를 읽었다. 우리 사회에서 내 집 마련은 비단 주거의 안정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어느 순간부터 개인의 사회적, 경제적인 위치를 말해주는 바로미터가 되어 있었다. 어렵게 마련한 그 집이 어디에 위치하는 가가 매우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투기과열지구에 살고 있다는 것은 내 집의 자산적 가치가 그만큼 높다는 의미인 동시에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처럼 우리 사회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내 집부터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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