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4일 저녁 6시 30분. 취리히 공항에서 파리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파리행 비행기 탑승을 두 시간가량 앞두고 취리히 공항의 Pret a manger 카페에서 헤이즐넛카푸치노를 마시며 쓰는 글.
불과 전날까지만 하더라도 ‘일기의 저주’라고 부르던 것을 나는 이제 ‘일기의 축복’으로 부르기로 했다.
기적이 일어났다. 오늘 오후 두 시경 나는 스위스의 드넓은 상공에서 눈이 가득 덮인 설산을 향해 풍덩 뛰어내렸다. 그토록 꿈꿔왔던 스위스에서의 스카이다이빙에 성공하고야 만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8시간 전, 일기를 쓰고 있던 오전 10시 무렵으로 다시 돌아와 보자. 나는 전날 밤 잠들기 직전 알 수 없는 기이한 이유로 비행시간이 변경된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곧장 스카이다이빙 업체에 연락부터 해 이미 취소하기로 한 23일의 스카이다이빙 일정을 24일로 변경하는 것이 가능하겠냐는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업체로부터 답장이 왔다. 업체에서는 환불절차는 이미 진행 중이라 환불을 취소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새로 예약을 잡아줄 수는 있다고 했다. 다만 또다시 기상이 악화될 경우 일정은 재차 취소될 수 있으니 이번에는 현장결제 방식으로 도와주겠다는 답변이었다.
재빨리 일기예보부터 봤다. 오후 1시, 인터라켄의 예상 날씨는 ‘맑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전날 집결지까지 모이고서도 인솔차량 탑승 10분 전에 취소되었던 경험이 있으니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비행 일정도 분명 뭔가 이상했다. 고객센터와 처음 통화했을 땐 30만 원의 추가요금을 내지 않으면 변경이 안된다고 해서 원래 일정대로 가겠다고 답변했는데 자동으로 시간이 바뀌어 있는 것이 수상했다. 대체 어떤 연유가 있어 비행시간이 낮 12시 30분에서 밤 8시 45분으로 바뀌었단 말인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온갖 것들이 오리무중인 상태였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다시 한번 마음속 열망을 끄집어내 끝까지 밀어붙여보기로했다. 이러다 기상이 악화되어 스카이다이빙도 못하게 되고 항공일정도 문제가 생겨 낮 12시 반 비행기도 못 타고 밤 8시 45분 비행기도 자리가 없고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스카이다이빙에 실패했을 때 어떠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지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반대로 말하자면 내게 그것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실패를 통해 깨닫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그건 또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이 있겠지.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었다.
오늘은 스위스에서의 마지막 날이기에 모든 짐을 챙겨 숙소를 나왔다. 무거운 가방 두 개를 짊어지고 패딩을 껴입은 채 전날 갔던 스카이다이빙 집결지, 인터라켄 동역 Coop마트로 다시 향했다. 집결시간은 마찬가지로 낮 12시. 혹시라도 또다시 직전에 취소메일이 올까 봐 11시 45분에도 50분에도 계속해서 메일함을 열어보았다. ‘새로 받은 메일’ 폴더가 깨끗한 것이 내 마음을 놓이게 했다. 집결지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며 계속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쾌청하고 맑았다. 11시 55분쯤이 되어 하나둘씩 집결지 근처로 모여드는 한국인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드디어 12시가 되자마자 마치매 SKYDIve SWITZERLAND라고 적힌 봉고차가 나타났다.
차에서 내린 선글라스 낀 직원은 마치 영화 속에서 위기에 빠진 주인공을 구출해 주는 슈퍼히어로처럼 보였다. 이보다 더 반가울 수가 없었다. 전날 느낀 좌절감의 곱절만큼이나 어마어마한 감격이 몰려왔다. 울컥 치밀어올라 벌써부터 눈물이 날 것도 같았다. 이제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지금부터 내가 느끼게 될 세 시간가량의 특별한 경험 속에 무엇이 담기게 되든 그 모두를 한껏 듬뿍 즐길 준비가 되어있었다.
인터라켄 동역에서만 여덟 명의 사람을 태운 뒤 흰색 봉고차가 출발했다. 다이빙장소까지 가는 25분 정도의 시간 동안, ’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 ‘라는 무시무시한 조항이 담긴 규정과 60만 원가량의 스카이다이빙 비용, 그리고 카메라 촬영에 따르는 20만 원 정도의 추가 비용에 동의한다는 서류를 작성했다. 혼자온 사람이 나를 포함해 서넛 정도, 그 외에 몇 팀은 커플도 섞여있었다. 대부분이 한국인이었다.
모두들 태연하게 앉아 가고 있었지만 묘한 기대와 긴장이 섞인 들뜬 기운이 작은 차 안을 채우고 있었다. 뒷자리에 앉아있던 아마 부부로 보이는 젊은 커플 중 여자분과 규정에 대해 서로 모르는 것들을 물어보며 짧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이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흰색 바탕에 빨간 무늬가 섞인 작은 비행기 한대와 다이버 열명 가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터라켄 서역과 각 호텔에서 출발했던 사람들까지 집결했고 우리는 모두 붉은색 점프슈트로 갈아입은 뒤 스카이다이빙에 관한 기본 교육을 받았다. 스무 명가량의 사람이 원으로 빙 둘러서 다이버의 시범에 따라 자세를 취했다.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때는 고개를 천장에 두고 손으로 어깨에 있는 벨트를 잡고 있어야 했다. 그때는 낙하산도 그 어떤 안전도구도 우리를 돕지 않을 것이다. 다이버에게 몸을 의지한 채 45초가량 하강한 뒤 다이버가 툭툭 치며 신호를 주면 고개를 다시 내리고 양팔을 90도로 내밀며 양다리는 개구리 뒷다리처럼 위로 향하게끔 구부려야 했다. 착륙하기 전에는 다리를 앞으로 쭉 뻗어 슬라이딩하도록 한다.
기초교육을 받고 글러브와 넥워머를 쓰자마자 직원은 도전자 중 첫 번째로 내 이름을 호명했다. 20명의 사람은 총 세 팀으로 나뉘어 비행기에 탑승하게 되는데 나는 그중 첫 번째 팀, 다섯 번째로 뛰게 되는 멤버였다. 맙소사. 마치 오징어게임 징검다리 게임을 앞둔 기분이었다.
내 바로 다음으로 이름이 불린 참가자는 다이빙교육 시 내 옆에 계셨던 한국인 할머니였다. 그 할머니에게 쪼르르 달려가 말을 붙이니 할머니는 지난해 무릎 수술을 하시고 이제 겨우 나았는데 무릎이 낫고 나니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져 지난달에는 패러글라이딩을 하셨고 이번에는 스카이다이빙에 도전하게 됐다고 말씀해 주셨다. 할머니의 손짓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그를 향해 손을 흔드는 가족들이 보였다. 스위스에서의 여행이 끝나면 오로라를 보러 아이슬란드로 가실 예정이라고 하셨던 할머니. 나이가 들어도 끊임없이 하고 싶은 것들이 있고, 그 꿈을 실행할 만큼의 결단력과 에너지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멋지게 느껴졌다. 이런 할머니처럼 될 수 있다면 나이 드는 것도 두렵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작 삼사십 년 살고도 인생의 매너리즘을 느끼는 나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모습과 여전히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소녀처럼 두근거려하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대비되었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80년가량의 짧은 인생이지만 그 한정된 시간을 누구나 같은 방식으로 쓰는 건 아니었던 거야. 정답은 없지만 적어도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은 어느 쪽인지 더욱 선명해지는 느낌이었다.
나와 할머니 외에도 여섯 명의 이름이 1팀으로 호명되었고 각각의 도전자에게는 함께 뛸 다이버가 한 명씩 파트너로 붙었다. 내 다이빙파트너는 기초교육을 진행해 줬던 다이버로 전체 중 가장 믿음직해 보이던 사람이었다. 캘리포니아 출신의 미국인 다이버인 내 파트너는 내게 안전장치를 씌워준 뒤 안내사항을 다시 읊어줬는데, 그러다가 그냥 다른 건 다 까먹어도 되니 뛰어내리면 그냥 기분 좋게 실컷 웃으라고. 그것만 기억하면 되고 나머진 자기한테 맡기라고 말했다.
여덟 명의 도전자에 여덟 명의 다이버가 붙어 총 열여섯 명이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에 탄 자세 그대로 뛰어내려야 했기 때문에 올라탈 때부터 다이버가 먼저 앉고 그 위에 포개듯 내가 앉았다. 비행기는 땅을 잠시 구르더니 순식간에 상공을 향해 치솟았다.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 압도당할 정도로 거대해 보이던 산이 미니어처처럼 보일 정도로 끝없이 올라갔다. 눈 덮인 알프스가 아득해 보이던 어느 지점에서 마침내 비행기 문이 열렸다. 우리에게는 준비할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앞의 너 다섯 명이 마치 ’비자발적 자살특공대‘처럼 거의 2초 연속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두려움을 느낄 새도 없이 순식간에 내 차례가 됐다. 다리를 비행기 밖으로 꺼내두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눈이 가득 뒤덮인 스위스의 겨울이 발아래 가득했다. ’하나 둘 셋‘같은 카운트다운도 없이 그대로 추락. 하늘에서 지상으로 수직 낙하가 시작됐다.
중력에 가속도가 붙어 하강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얼굴로 온 바람을 막아내느라 눈이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데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눈앞에 펼쳐진 비현실적 일정도로 멋진 풍경을 하늘을 날면서 내 두 눈으로, 생 눈으로 본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높은 하늘에서 크게 환호하며 소리를 내질렀다. 심장이 미친 듯 요동치더니 다 터져버릴 것만 같던 순간 낙하산이 펼쳐졌다.
이제부턴 패러글라이딩타임. 다이버가 내게 낙하산 손잡이를 넘기며 직접 운전해 보라고 했다. 줄을 왼쪽으로 당기니 왼쪽방향으로 부웅- 오른쪽으로 당기니 오른 방향으로 스르르 미끄러졌다. 자유로운 새 한 마리가 되어 가고 싶은 방향대로 하늘을 이리저리 누비다가 다시 다이버에게 손잡이를 맡겼다. 다이버는 몇 번의 짜릿한 날갯짓을 더 선보인 뒤 착지 준비를 하라고 내게 알렸다. 나는 두 다리를 들어 올렸고 눈밭으로 엉덩이부터 다리까지 스르르 미끄러지며 파묻었다. 착지 완료.
”I survived!“ 내리자마자 외친 말. 착지를 마치고도 한참 심장이 쿵쿵거려 진정할 수가 없었다. 나보다 먼저 뛰어내리셨던 할머니에게 달려가 “말도 안 되죠 정말! 너무 재밌어요!“라고 외치며 포옹한 뒤 다시 착륙장으로 돌아와 후발 주자들의 착지를 지켜봤다. 스무 명 남짓의 도전자들. 우리는 오늘 분명 한 팀이었다. 뒤늦게 내리는 사람들 중 몇 명의 착지장명르 영상으로 찍었는데 혹시 보내드릴까요?라고 수줍게 여쭤봤더니 모두들 너무 고마워하시며 감사 인사를 건네주시고 초콜릿에 선물에, 심지어 연락처에(?) 온갖 것들을 갖다주셨다. 별안간 ‘스카이다이빙장 인싸’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나는 생애 첫 스카이다이빙 도전을 끝으로 스위스에서의 일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파리를 향하는 발걸음이 이제야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취리히 공항에서 샤를드골로 향할 비행기 출발 시간을 기다리며 마시는 헤이즐넛 카푸치노 이 한 모금이 어느 때보다 향긋하고 고소하게 느껴진다.
결국 나는 내가 지금 느끼는 이토록 짙은 감격은 분명 내게 바로 전날 모든 일들이 꼬이면서 느꼈던 깊은 아쉬움과 후회가 없었다면 얻지 못했을 감정일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절망했고 슬퍼했고 또 낙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밀어붙였다. 첫 번째 도전에서 실패했던 나는 잔뜩 풀이 죽었지만 또다시 미친척하고 두 번째 도전을 택했고 그 무모한 선택이 내게 준 선물은 첫 번째 실패에서 느낀 좌절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진 것이었다. 두 번이 아니라 세 번, 네 번, 다섯 번 실패하더라도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그 어느 것도 완전히 끝나버리는 일은 없었다. 나는 이제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조금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