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 2년쯤 살았는데 건너건너 알게 된 여자가 있었다. 이름은 에이미, 당시 나이 29세. 중국 쑤저우 출신으로 교사인 홀어머니 아래 평범하게 자랐으나 홍콩대 유학 왔다가 미국계 투자은행에 취직하고 그 나이에 이미 코스웨이베이에 원베드이긴 하지만 아파트까지 소유하고 있었으니 잘난 여자였다. 얼굴도 예뻤다. 홍콩 영화배우 서기를 닮았었다.
에이미는 바람 나서 엄마랑 자기를 버리고 간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가득 갖고 있었다. 아버지가 바람나 떠난 후 양육비는커녕 연락이 없다가 재혼 후 낳은 딸이 홍콩대나 홍콩과기대를 가고 싶어한다며 네 배다른 동생 좀 도와주라고 갑자기 연락 온 후 아버지라면 더더욱 치를 떨게 됐다.
잘은 모르지만 그때는 중국 본토 학생이 홍콩 대학에 오려면 상위권 학교에 장학금 대상자여야 가능했다.
에이미가 가끔 만나자고 해서 나가보면 프라이빗 와인 테이스팅하는 곳, 멤버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고급 멤버십 식당이었다. 한 번은 센트럴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뒤 피아제 매장으로 나를 불렀다.
그때 나는 고급 쥬얼리라고 하면 까르띠에나 티파니 밖에 몰랐다. 아는 건 그 정도고 예물 외 차고 다니는 건 판도라나 제이에스티나, 스와로브스키 정도였다. 이름도 생소한 피아제에 처음 가 봤다. 귀걸이 한 쌍에 억대가 넘어가는 것도 있는 그 곳. 풍채 좋은 써큐리티 네 명이 인이어 무전 차고 매장 5미터 밖에서부터 위협적으로 서 있는 곳.
가 보니 매장 문 닫고 초대장 있는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고 직원이 샴페인을 막 들고 다니면서 서빙하고 새로운 컬렉션을 매장에 진열하기 전 초대한 사람들에게만 선공개하는 자리였다.
깔끔한 정장을 입은 직원들이 고급 샴페인을 따라 주는 곳에서 뚝딱거리며 두 손으로 황송하게 샴페인을 받는 나에 비해 에이미는 아주 의연하고 자연스러웠다. 똑똑하고 잘난 여자긴 해도 급여 상황을 대충 아는데 이런 곳에서 일상이라는 듯이 행동하는 에이미가 의아했다.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어봤다.
"어떻게 이런 곳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았니?"
에이미는 피아제 안에서는 끝까지 스탠스를 유지하며 금방이라도 호주머니에서 지폐 뭉치를 꺼내 몇 개쯤 구매할 것처럼 캐럿과 등급을 운운하며 상세한 상담을 이어가다가 2시간으로 예정됐던 그 행사가 끝나고 그곳을 나와서 근처 바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야 내 질문에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쯤 전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가 있었다고 했다. 능력이 좋은 남자였지만 아직 젊었던 탓에 피아제쯤 턱턱 사 주는 정도는 아니었던 그 남자. 하지만 자기는 꼭 피아제를 받아야 결혼을 "해 줄" 거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5살 때 아버지가 바람나서 집 나간 이후로 엄마랑 단둘이 살았던 에이미. 연락 한 번 하지 않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느끼며 악바리가 된 그녀. 이 악물고 열심히 살아서 하는 것마다 다 두각을 나타내고 학생회장 같은 것도 도맡아 했지만 홀어머니는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고등학교 졸업생 대표로 단상에 올라가 연설하는 자리에도 참석한 가족이 아무도 없었던 그 여자.
남친을 어거지로 피아제 매장에 끌고 가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착용도 해 보고 황홀한 꿈에 젖었다고 했다.
홍콩이 어떤 곳이냐? 그땐 우산혁명 전이었다. 예전의 자유롭던 분위기가 많이 잦아진 현재와 비교해 보면 그땐 아직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서 위용을 떨치던 때였다. 부자도 많지만 빈부격차가 심한 곳. 특히 집값이 어마무시한 곳. 한 예로, 커플이 둘 다 비교적 고소득 직종인 금융계에 종사한다고 해도 애널리스트나 어소시에이트 레벨일 때는 결혼 후에도 각자 부모님 집에서 살며 따로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몇번의 방문 끝에 예물을 고르고 그 중 우선 팔찌 하나만 완납 후 가져온 날이었는데 남친이 흐뭇한 표정으로 행복해하는 에이미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지그시 보기는 커녕 살짝 큰 거 아니냐며 우선 하루 착용감을 체험해 보고 커스텀을 할 건지 어떻게 할 건지 다시 생각해 보자는 식으로 말하더라고 한다.
에이미는 꿈에 그리던 피아제 팔찌를 손에 넣은 셈이 됐지만 느낄 수 있었다. 남자의 갈등을.
에이미는 노심초사했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열병처럼 마음에 품고 있던 피아제를 마침내 손에 넣었지만 만족감보다는 불안이 앞섰다.
왜 하필 피아제냐는 질문은 부질없을 듯. 누군가에게는 에르메스 켈리백일 테고 누군가에게는 포르쉐 카이엔일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잠자리를 하고 가라며 은근슬쩍 몸을 밀착하며 실수인 듯 은밀한 곳에 손길을 스치는 에이미를 무시하고 피곤하다며 자기 집에 가버린 남자한테서 새벽 2시쯤 연락이 왔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너의 허영을 채워 주기엔 내가 역부족인 것 같다 라는 식으로 정면돌파를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을까.
집에 간 후 그 시간까지 몇 시간 동안이나 생각해낸 게 고작 그거였을까 싶을 정도로 한심한 이유를 들이대며 다짜고짜 헤어지자고 했다고 한다. 결혼하면 너네 엄마까지 홍콩으로 모셔와 같이 살아야 되는 거 아니냐 그런 문제는 좀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싶다 네가 내 친구를 보는 시선이 내내 거슬렸다 등등.
에이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에이미는 화도 안 냈다고 한다. 울지도 않았고.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자기가 무리한 요구를 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니라고. 자기의 허영을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면 어차피 자기랑 결혼할 자격이 없다고도 생각했다. 자기도 남자를 더이상 원치 않게 됐다고 했다.
하지만 피아제라는 영롱한 이름을 마음에 품었던 순간부터 그 가능성을 수없이 타진해 왔던 역사 속에서 가장 피아제에 가까워진 순간이었다. 팔찌는 완납되어 에이미의 손에 있었다.
남자와 에이미가 같이 여러 번 매장을 방문했었기 때문에 누구의 강요도 아닌 남자의 자발적인 선물이라는 건 자명했다. 코즈웨이베이의 소고 뒷길에 아파트를 구매한 후 다시 제로에 가까운 상태에서 아무리 시뮬레이션을 돌려봐도 에이미에게 자기 월급으로 피아제는 요원했다.
너무 소망해 왔던 탓에 포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다행히 에이미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법적으로 문제될 만한 짓을 무모하게 하기에는 너무 애써 살아왔던 인생이었다. 에이미는 차분하게 딱 두 가지 부탁을 했다.
첫번째 부탁은 내일 당장 피아제 매장에 같이 가서 구매 고객을 여자의 이름으로 바꿀 것. 두번째 부탁은 4일 후로 예정되어 있던 아버지와 배다른 동생의 홍콩 방문 때 팔찌를 찰 수 있게 해줄 것. 그 후에는 순순히 팔찌를 내어 주고 헤어져 주겠다고 했다.
부탁이라기보다는 조건이었다. 남자는 망설였지만 동의했다. 에이미한테 오만 정이 다 떨어졌지만 감정에 휩싸여 일을 그르치기에는 대가가 너무 클 테니까.
다음 날 둘은 같이 피아제 매장에 들러 구매 고객 명단에 에이미의 이름을 올렸다. 매장에 몇 번이나 들락날락하는 동안 여자는 알게 됐던 거다. 구매할 때 구매 고객 정보를 남겨야 했고 구매 정도에 따라 차등을 두었겠지만 일단 구매 고객 명단에 들게 되면 새 라인 출시 때 미리 연락이 간다든지 하는 '관리' 대상이 된다는 것. 피아제 패밀리가 된다는 것. 상류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발판이라도 되는 양 에이미에게는 그게 중요해졌던 거다. 남자가 마음을 바꿀까 싶어 정작 구매시에는 요구하지 못했던 걸 드디어 해냈다.
그리고 또 3일이 지나 중국 본토에서 아버지와 배다른 동생이 왔다. 새된 소리로 차갑게 거절하기를 여러 번이었지만 궁금한 마음도 있었다.
'나와 아버지가 같은 여동생이라고? 고작 5살일 때 내 아버지를 빼앗아 간 상간녀의 딸이라고?'
평생을 얼굴 한 번 안 비추고 안부 한 번 안 묻다가 뻔뻔하게도 곁에서 애지중지 키워 온 '자기 딸'이 홍콩에 가서 대학교도 다니고 좋은 외국계 직장도 잡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내자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아 내가 딱 그 전철을 밟은 사람을 마침 안다는 듯이 연락해 온 그 아버지.
비빌 언덕 하나 잡겠다는 비굴한 마음으로 따라 온 그 배다른 동생은 또 어떻고?
절대 만나 주지 말라는 울분 섞인 엄마의 당부에도 에이미는 그 둘을 만났다. 섬세하게 디자인된 피아제를 손목에 차고서. 피아제가 주는 힘은 대단해서 울고 불고 원망이 쏟아지지도 분노 섞인 외침이 나오지도 않았다. 그저 세련되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으니 건투를 빈다라고 했을 뿐.
그리고 미련 없이 전남친에게 연락하여 같이 피아제에 갔다. 사업차 중요한 일이 생겨 부득이하게 결혼을 미루게 됨에 따라 일단은 팔찌를 돌려주고 환불을 받겠다고 유려하고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든 다시 오겠다는 여지를 강하게 남겼다. 그래야 결과적으론 구매를 안한 게 됐지만 “구매 여력을 한번 증명한” 잠재 고객으로 구매고객 명단에 살아남을 테니까.
예상은 적중해서 이후 피아제에서 특별한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에이미에게 연락이 갔다. 그렇게 초대된 이벤트 중 한 번에 뜻밖에도 나를 대동해 줘서 나 역시 피아제의 달콤함에 빠질 뻔했다. 살면서 그렇게까지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샴빠니에 루이 호드에흐를 내게 마르지 않게 따라줬던 자리는 없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