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가장자리의 시선

마음숲지기의 에세이

여름에 시작됐던 옅은 허리 통증은 79일 만에

수술대에 오르는 결과를 가져왔다.


“환자분! 눈 떠보세요. 회복실입니다.”

“네?... 네….”


간호사의 우렁찬 목소리에 마취가 덜 풀린 듯 힘없이 눈을 떴다.

‘지금.. 여기가 디.. 지? 집인가?’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물음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얀 벽과 형광조명,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 덕분에 병원임을 인식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전 9시에 수술대에 오른 육신은 오후 12시가 넘어서야 입원실로 옮겨졌다. 입원실로 옮겨진 후에도 몽롱했지만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수술 부위의 통증이 날 것(?) 그대로 느껴져 정신이 바짝 드는 상황이 벌어졌다. ‘수술 후라 당연히 아픈 거겠지?’ 생각하며 30분쯤 식은땀을 흘리며 참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호출 버튼을 눌렀다.


“간호사님… 통증이 너무 심한데…

진통제가 잘 들어가고 있는 건가요?”


“정신이 좀 드시면 말씀드리려고 했는데요.

지금 저혈압 상태라 진통제를 놓으면

쇼크상태가 되실 수도 있어요.

상태를 좀 더 지켜봤다가 혈압이 좀 올라가면

 놓아드릴게요.”


“네?? 저혈압이요?


‘정말 가지가지하는구나.’ 싶었다.

등 뒤에 칼을 꽂고 누운 듯한 통증을 고스란히 맞보자,

한낮의 우울감이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몽롱함을 수시로 깨우는 예리한 통증…


-------------------------------------------------------------------------------------------------------------


다행히 수술경과는 좋았다.

3일 뒤 담당의사로부터 퇴원해도 좋다는 진단을 받았다.

집에 돌아왔지만 몸에 철심을 박아놓은 사람 마냥 허리를 곧게 뻗고 있어야만 하는 상황이 두어 달 이어졌다. 6년 전 허리수술 후에도 통증을 달고 사시는 친정 엄마와 시어머님의 전례를 목격했기에 더욱 염려가 되었다. 두려움과 더불어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책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욕심만 안 부렸어도…

이렇게까지 고생하지는 않았을 거야.

괜히 유명한 운동 유튜버 따라 하다가 이렇게 된 거잖아.

무식하게 허리 디스크 경험자가 전문가의 코칭도 없이 영상으로 데드 리프트 따라 하다가…

나를 너무 맹신한 거지… 허리를 조심했어야 했어.’


비난의 목소리와 함께 신념도 덩달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회복탄력성 강사라면 꿋꿋하게 이겨 내야지!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회복탄력성 강사도 별 수 없네.’라고 생각하지 않겠어? 약한 소리 하지 마. 언제까지 징징 될 거야!’

‘강해져야만 한다’는 당위적 신념과 주위의 평판을

 우려하는 모습은 마음까지 뻣뻣하게 했다.

힘들다고 털어놓지 못하고 강한 척해야 했으니까.


‘현실 속에 약한 나’와 ‘이상 속에 강한 나’를

저울질하며 스스로를 경멸하다가 문득,

 ‘다시 그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 날 밤, 짐을 챙기며 마음에 위로가 될 만한 책 한 권을 골라 담았었다.

여든이 다 되어가는 노장의 작가, 파커 J 파머가 쓴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라는 책이었다.

어떤 책을 가져갈까 고민하며 몇 가지 책을 읽다가 이 책의 프롤로그를 읽는데 그가 서문에서 고백한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절망의 시간 속에서조차 그 모든 것이 어떻게 어우러지는지를 알겠다. 내가 한때 탄식했던 불운도 이제는 더 커다란 직조물에 가장자리에서는 한가운데서 보지 못한 온갖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수술하기 전 날, 아니 통증이 점점 심해져 오던 여름 내내 삶의 가장자리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게 ‘한가운데서 보지 못한 온갖 것을 볼 수 있다.’는 표현이 마음에

와닿았다.

 ‘노장의 작가가 바라본 가장자리의 시선! 그것 좀 빌려 씁시다. 내 마음이 지금 절벽 끝에 있으니 그 시선 좀 빌려 마음에 안식처로 삼아봅시다!’라는 마음으로 세면도구와 함께 그의 책을 가방에 넣었던 것이다.


입원실에 누워 책을 읽을 요량으로 누워있었지만

통증은 나를 벽면으로 밀어붙이며

‘삶의 가장자리란 이런 거야!’ 알려주는 듯 집중력을 떨어뜨렸다. 다행이다.

통증과 긴 사투를 벌이기 전에 1장에서 귀한 문장을 만났으니! 내가 내 모습이 싫어 지려 할 때 그가 묻는다.


나는 무엇인가? 내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나는 주의를 기울이는 것, 모두가 나 자신이다.

어둠으로 내려앉는 것, 빛 속으로 다시 떠오르는 것.

모두 나 자신이다. 배반과 충성심, 실패와 성공, 모두 나 자신이다. 나는 나의 무지이고 통찰이고 의심이고 확신이다.

또한 두려움이자 희망이다. 온전함이란 완전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부서짐을 삶의 총체적인 부분으로 끌어안는다는 뜻이다.”


나의 상황으로 표현하자면,

‘삶을 배반하고 싶은 나와 정성스럽게 경작해 보고 싶은 나.

강한 나와 나약한 나, 우울한 나와 기쁜 나, 까칠한 나와 친절한 나. 의심하는 나와 확신에 찬 나, 모두 나 자신이다.’라고 표현되지 않을까 싶다.


양극성을 띄고 있는 나를 온전히 수용한다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작가의 ‘가장자리의 시선’이 약간의 틈을 선사했다. 완전함보다는 온전함의 시선으로.

'한가운데서는 보지 못한 것을 나는 보고 있다.'

'건강할 때는 보지 못한 것을 나는 보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이상해 ...앞으로 안 걸어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