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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욘킴 Sep 22. 2024

취향탐구: 커피

졸음 쫓기용 특대 사이즈 아메리카노 정중히 사절.


자신의 취향을 세밀하게 묘사할 수 있으려면 시작부터 아주 적은 것들만 지속적으로 좋아하거나, 많은 것들을 놓고 상대적으로 별로인 것을 빼버린 경험이 필요하다. 나는 대부분의 경우 후자였지만 "이것보단 저게 더 별로야" 보다는 "이것도 저것도 좋지만 이건 더 좋아" 타입이었다. 무엇이든 좋은 것은 만성적인 결정 장애를 동반하므로, 무언가를 확고히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보다 훨씬 피곤하다.

 졸음 쫓기용 특대 사이즈 아메리카노는 사절합니다.

어느 주말, 우리는 점심을 먹고 나서 복숭아와 단호박 타르트, 체리가 듬뿍 들어간 초콜릿 무스 케이크를 곁들여 커피를 마셨다. 핸드드립에 상당히 진지한 사람이 전자저울과 아이폰 타이머를 이용하여 정성스레 내려준 커피였다.


수동 그라인더로 성글성글하게 갈아낸 원두에선 바싹 볶은 견과류와 호박엿의 고소한 향미가 풍겼고, 주기적으로 삐빅 하는 알람음이 날 때마다 코가 길쭉한 주전자를 기울여 허공에 소용돌이 모양을 그리면서 지긋하게 물을 붓다가 다시 삐빅 소리가 나면 멈추고 기다렸다. 그 과정이 어찌나 경건한 의식 같던지, 모두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몇 번인가의 삐빅 소리가 지나가고, 마침내 각자의 유리잔이 얼음과 커피로 채워졌다. 짙은 듯 투명한 밤색 빛 커피 한 모금. 고온 고압으로 신속하게 뽑아낸 강렬한 에스프레소와는 확연히 대조되는 둥글고 하늘하늘한 느낌이 나는 커피였다. 과일과 크림을 듬뿍 얹은 타르트, 머리가 아플 정도로 달콤한 초콜릿 케이크와 그야말로 절묘한 궁합을 이루는 산뜻한 맛이었다.


커피를 말하자면, 사실 나는 핸드드립 커피보다는 에스프레소를 좋아한다. 만성적 결정 장애에 시달리는 나지만, 커피에 대해서 만큼은 상당히 확고한 취향이 있는데, 나의 커피 취향은 단순히 음료를 넘어서 "커피를 마시는 시간"의 복합적인 감각으로 만들어졌다. 이야기를 더 깊게 들어가기 전에, 이 글은 커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보다는 평범한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맛있게 마셨던 기억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 중이라 생각해 주면 좋겠다. 


일단 추출의 형태는 더블샷 에스프레소로 한정한다. 농도는 약간 묵직한 정도가 좋지만, 끈적거리진 말아야 한다. 온도는 너무 뜨겁지 않게, 차게 마신다면 얼음을 사용하되 너무 빨리 녹아 희석되지 않도록 큼직한 덩어리만 사용한다.


다음으로, 어떤 형태로든 우유를 첨가하지 말아야 하고 산미가 아주 조금 있어야 한다. 산미는 내가 좋아하는 '약간의 신선한 쌉싸름함'이라는 디테일을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리고 향미, 향미는 여러 뉴런에 동시 다발적인 전기 신호를 보내 기억과 감각을 무작위로 핑퐁 하는 요소다. 지금 막 불을 댕긴 성냥의 냄새가 어느 생일 케이크의 기억으로 연결되며 확장된 동공 너머로 시럽이 코팅된 빨간 딸기 장식이 아른거리고, 버터크림을 손가락 끝으로 훔쳐 핥아먹는 맛과 선물 포장지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귀가 간질거리는 느낌에 이르는 일련의 작용이 순식간에 일어난다. 나는 신참 모스 부호 신호수가 되어 이 다채로운 신호들을 바쁘게 채집하고, '좋아'와 '싫어'만 빠르게 구분하여 취향을 담당하는 머릿속 어딘가로 신속히 전달한다. 그래서 향미는 커피의 취향을 결정하는 데 아주 빠르고도, 지배적인 역할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커피의 향미는 바닐라 라던지 캐러멜, 견과류 같은 따스하고 무거운 것의 비중이 높은 쪽이다. 머스크, 플로럴, 시트러스와 같이 규격화된 명칭을 빌리자면 '앰버'의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것들이므로 그슬린 나무 톱밥 이라던지 시나몬, 호박과 버터 같은 것들도 일부 포함될 수 있다.


마지막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항인데, 커피를 맛보는 모든 과정에서 특정한 장면을 연상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싶겠지만 나는 에스프레소를 즐기기 시작한 뒤로 커피의 특정한 향미가 시각적 상상을 이끄는 신비한 현상을 몸소 체험 중이다. 이렇게 말하면 수상한 종교를 믿는 사람이 간증을 하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이 들기 때문에 커피에 꽤 진심인 사람들과 함께할 때조차 선뜻 말하기 망설여진다. 참고로,ㅡ이렇게 말을 하려니 정말 사이비 같지만ㅡ믿지 않는 사람은 이런 감각을 이해할 수 없다. 여기서 믿지 않는 사람이란 으레 주변에 하나쯤 있는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아"라고 말하는 둔감한 미각의 소유자들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러한 현상을 가장 잘 표현한 애니메이션이 있는데, 바로 라따뚜이다. 라따뚜이의 주인공인 레미가 치즈와 딸기를 같이 먹었을 때 느낀 새롭고도 조화로운 맛을 폭죽이 파바박 터지는 그래픽으로 표현한 장면이 있다. 레미가 폭죽이 터지는 상상을 하듯, 나는 특정한 향미의 커피를 마실 때 오래된 통나무 집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이브라던지 뜨거운 모래로 뒤덮인 황금빛 사막이 떠오르곤 한다.


연상되는 이미지를 지배하는 요소는 보통 향미이며, 무겁고 부드러운 풍미가 지배적이면 크리스마스이브, 맵쌀 한 스파이스의 존재감이 두드러지면 사막 쪽이다. 장면이 지닌 특별한 의미는 없고, 내가 꿈꾸는 몇 가지 낭만적인 바캉스 배경이기 때문에 이것들을 떠올리는 어떤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커피가 지닌 고급스러운 휴식 효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튼 이렇게 연상되는 장면은 생각보다 다양한 부수적 사항을 결정한다. 무엇을 곁들일지, 하루 중 어느 시간대에 마실지, 어떤 장르의 책을 읽을지와 같은 것들이다. 예컨대 크리스마스이브의 커피라면 아침이나 한낮보다는 어스름 저녁에 생강쿠키나 과일 타르트를 곁들이면 좋다. 어스름 저녁에 에스프레소를 뽑으면, 창 밖으로는 알록달록 크리스마스 전구가 반짝이고, 벽난로 앞에 무거운 커피 머그를 놓고 낭만적인 소설책을 읽는 따스한 휴식의 무드가 만들어진다.


사막의 커피라면 이른 아침이나 정오에 소금기 있는 비스킷을 함께 곁들여 마시면 잘 어울린다. 나는 주로 오전 시간에 신문을 읽으며 차가운 커피를 즐기는데, 짭짤한 비스킷을 깨물어 먹다가 차갑고 약간 맵쌀한 커피를 한 모금 머금으면 황금빛 모래 언덕과 푸른 하늘이 만나는 선명한 풍광이 펼쳐지며 탁 트인 기분이 든다.


온도, 향미, 연상되는 장면 그리고 곁들이는 다과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사항을 신중히 고려하다 보면 "가장 좋아하는 커피의 취향"이 완성된다. 이 과정은 아메리카노냐 라떼냐라던지 케냐와 브라질의 국경에서 갈팡질팡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진지한 태도가 요구되지만 고급스러운 휴식 효과와 정신적 만족감을 선사한다.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종종 취향을 자극하는 감각의 미세한 뉘앙스들을 잊어버리기 쉽다. 취향은 단순한 선호가 아니라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 졸음을 쫓기 위해 손에 잡히는 대로 마시던 한 잔의 기능성 음료를 넘어, 커피를 마시는 사소한 순간조차도 자신만의 감각적 세계를 탐색하고 취향을 채집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도 저것도 다 좋아" 타입으로 살아오며 오랜 기간 무뎌진 감각에 생기를 불어넣고, 몰랐거나 잊고 지내던 취향을 새롭게 조명하는 시간, 나의 소중한 커피타임. 졸음 쫓기용 특대 사이즈 아메리카노는 정중히 사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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