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공간과 분위기를 나만의 방식으로 연출하는 것은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방법 중 하나이다. 영화의 일상을 나의 일상으로 끌어들일 때면 주인공들의 취미를 훔치는 기분이 든다. 무료하고 반복적인 일상을 보내는 나에겐 새로운 취향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나를 발전시킬 기회이기도 하다. 나는 그들의 ‘정원’을 모방하며 나의 ‘정원’을 만들어 안식을 취한다.
영화를 보면 가고 싶은 곳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셀 수 없이 많다. <카모메 식당>도 마찬가지다. 헬싱키 길모퉁이에 자리 잡은 정갈한 가게들을 둘러보고, 서툰 핀란드어로 장을 보는 상상을 한다. 그러나 계약직 월급으로 매달 무섭게 찾아오는 월세까지 내야 하던 나에겐 동네에서 2천 원짜리 시나몬 롤을 사 먹으며 햇반, 참치 통조림과 김으로 나만의 ‘카모메 식당’을 만드는 게 최선의 행복이었다.
소심했던 월급은 정규직으로 이직을 하게 되면서 남들에게 한턱낼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워졌다. 월세와 관리비,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외한 나머지 돈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하면서 잊고 있던 나의 정원 만들기가 생각났다. 방구석에서만 정원을 만들지 말고 진짜 정원을 찾아 떠나자.
일본 오사카에서 교토로 가는 기찻길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샬롯’이 함께 했다. 그녀는 모든 세상의 소리를 차단할 법한 크기의 헤드폰을 끼고 차창을 바라보는데, 이때 흘러나온 곡이 Air의 ‘Alone in Kyoto’이다. 음악을 들으며 나도 영화 속 그녀처럼 창문 너머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가만히 응시했다. 잡다한 생각들이 차창 밖 풍경처럼 흩어졌다.
삭막했던 영화 속 분위기와 달리 호수와 푸른 나무, 어디서나 앉아서 쉴 수 있는 갈색 벤치가 있던 영국 블레츨리 파크는 <이미테이션 게임>의 촬영지이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암호 해독 팀이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던 곳이다. 전쟁 당시를 읽어주는 소리를 뒤로 한 채 군 막사를 나오면, 과거가 아닌 현재의 영국이 들려주는 평화로운 소리를 듣게 된다. 잔디밭 위에 삼삼오오 모여 앉은 학생들의 재잘거리는 소리, 시원하게 물을 쏘아 올리는 분수 소리, 잔잔한 바람에 나뭇잎이 살랑이는 소리…
그동안 회사에서 듣던 소리라고는 하염없이 울리는 전화벨, 거친 키보드 소리, 옆 사람이 다리를 떨 때마다 흔들리던 의자 소리, 반갑지 않은 업무들을 떠넘기려 나를 부르는 소리 같은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이곳의 소리는 진정으로 내 마음을 치유해주었다.
지금 이 글을 타이핑하고 있는 노트북 옆에는 ‘나의 정원 리스트’가 적힌 빨간 몰스킨이 놓여있다. 요즘은 이 리스트를 만들어가는 재미로 직장 생활을 버티고 있다. 회사 밖에서의 시간도 의욕적으로 보내는 중이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영화가 자리 잡고 있다. 영화는 웅크린 내 손을 잡아끌고 용기가 필요한 세상으로 인도해 주는 <메리 포핀스> 같다.
<경주>의 ‘현’처럼 찻집에서 차를 마시고도 싶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촬영지인 이탈리아 크레마로 여름휴가도 떠나고 싶지만, 일단 내일은 <헬프>의 ‘셀리아 풋’이 가정부 ‘미니’가 만들어준 프라이드치킨을 맛있게 먹던 것처럼, 나 역시 치킨으로 월요일을 바삭하게 마무리하려 한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고 위로해주고 앞으로 남은 4일도 잘 버텨보자고 응원할 예정이다. - 2019. 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