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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인 May 15. 2023

Paul에 대한 착각

2023.04.13

Paul의 집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지금 호스트 할아버지 이름도 Paul이어서 너무 당연하게 중년 아저씨~할아버지로 생각하고 간 것이 큰 착각이었다. 문이 열리고 거대한 젊은 남성이 반겨줘서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래도 쉐어하는 사람 몇은 있겠지라는 믿음으로 "내 이름은 000에요."라고 자신 있게 약수 했지만, 부엌으로 향하는 순간 '아 이 집에 이 사람과 나랑 단둘뿐이구나.'라는 걸 알아채고 아차 싶었다. 


부엌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또 의례적으로 집을 칭찬하기에 바빴다. 마침 한국 집에 있었던 유리 테이블과 거의 똑같은 테이블을 가지고 있어 대충 비빌 언덕이 있겠다 싶어 말을 걸었다. "우리 집에도 똑같은 게 있어. 익숙한 느낌이 드네." 그런데 그는 집 소개 관심은커녕, 집 칭찬하는 나를 응시하기만 했다. 1층 부엌과 거실을 대충 보여주더니 외투를 벗지 않겠냐고 한다. 어제의 뷰잉과는 전혀 다른 그의 웰컴 인사 덕에 당황했다. 괜찮다고 하면서 가방만 내려놓자 그가 차 한잔할 것을 권유했다. 자동 대화 완성처럼 "YES."가 나왔고 이내 또 아차 싶었다. 


물을 끓이는 동안 내내 ‘왜 2층으로 안 올라가지? 왜 방을 소개 안 시켜주지? 왜 부엌문을 닫지? 주전자는 여기나 저기나 똑같이 더럽군! 여기도 수돗물을 마시겠지? 근데 차에 수면제 타면 어떡하지?’ 점점 위험한 생각들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잠시 그가 자리 비운 사이에 나는 얼른 친구들이 있는 단체방에 ‘연락이 없으면 신고해!’라며 주소가 적혀진 문자 캡처를 보냈다. 물을 끓이는 걸 직접 보고, 차 티백도 내가 골랐지만 분명 주전자 물에 미리 수면제를 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위험한 시나리오는 내 머릿속에서 전염병처럼 급작스럽게 퍼지기 시작했다. 내 고질병 중의 하나이기도 했지만, 타지에서 모든 걸 처음 경험하는 나로선 잔뜩 경계에 몰두하는 미어캣처럼 만들게 한다. 


녹차가 담긴 찻잔이 내 턱밑까지 와버렸고 이걸 어떻게 천천히 피할 수 있을지 머릿속이 바빴다. 그가 계속 영어로 질문을 하면 나는 대답도 해야 하는 동시에, 번져나가는 위험한 생각들과 예측 못한 상황 사이에서 뇌가 꽤나 허둥대는 느낌이었다. 대화는 집 소개보다는, 나의 아일랜드 여행과, 일, 문화 차이 등 내 이야기 위주로 돌아갔다. 나는 그의 질문에 어물쩍 대답을 하면서 빤히 쳐다보는 눈빛과 할 말 없는 침묵에 연신 뒷 정원을 바라보며 도대체 그는 언제 차를 마실지가 최대 관심사였다. 



지금 기억나는 대화는 만 나이 덕에 내 인생에서 2년을 구한 이야기다.   


- 네가 알려준 덕분에 나는 내 나이에서 2년이나 어려졌네. (사실 나도 아는 거지만 그냥 할 얘기 없을 땐 모르는 척 감탄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 (Paul) 내 말이 그 말이야. 너 36이었다가 방금 34 됐어.

- 하하. 그러네. 너네 집에 들어왔을 때는 36이고, 이제 34살이 문밖을 나서겠네.



온통 그 공간을 벗어날 생각에 유리 테이블 아래로 보이는 내 회색 운동화는 불안과 초조로 연신 허공을 휘젓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우회적으로 이제 대화를 종료하고 너 할 일을 해라라는 의미를 연신 대화에 내비쳤던 거 같다. 지나고 보니 너무 한국적인 접근법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 너 바쁘다 하지 않았어?

- 너 오늘 일은 언제 나가?

- 날씨도 좋은데 스케줄 없어?   


이 대화와 그가 물어보는 나의 스케줄에 대화가 서로 뒤엉켜 


 - (Paul) 넌 오늘 뭐 해?

- 난 그냥 갤러리와 아트 서점을 갈 거 같아. 그리고 한식당 가서 저녁 먹지 않을까 싶어. 벌써 12시네(1시간이 지났다.) 내가 너 시간을 많이 뺏은거 같다. 그래서 넌 오늘 뭐 한다고?

- (Paul) 아냐. 시간 뺏기는 뭘. 그럼 오늘 저녁에 네가 가려는 식당에서 같이 밥 먹을래?



이제껏 어영부영 영어로 대화가 통했다가 나도 분명히 알아들은 그 말을 내가 부디 잘못 이해하길 그 순간 엄청 바랬다. 너무나 많이 접한 패턴의 의문문이며 충분히 알아들었지만, 그 순간에 난 외계어를 들은 것처럼 그의 말을 천천히 웅얼 거리며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표정을 취했지만 결국 같이 밥 먹자는 소리구나. 이게 맞나. 나는 아직 집 결정도 안 했는데? 만약 밥 먹고 집을 결정 안 해버리는 그 상황을 나는 견딜 수 있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한식당 장소를 알려주고, 시간을 정하는 나의 목소리 톤은 처음의 ‘칭찬에만 열중하자’와는 사뭇 달랐다. 이젠 지쳤다. 밥 약속을 얼른 정하고 이 대화를 마무리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집을 나설 때 그가 내 어깨를 터치했는데 아직도 이게 문화 차이인건지, 그가 일종의 플러팅을 한 건지 나오는 순간까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혼미했다. 하지만 혼미한 나를 들키지 않기 위해 문밖을 나서 버스 정류장까지 일부러 급하게 핸드폰을 보지 않았다. 그리고 버스 정거장에 다다라서야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약한 인터넷 신호를 붙잡아가며 1시간의 혼란을 쏟아냈다. 


나도 쎄한 기분이 들고, 사촌 언니도 피하라 하고, 친구들도 가지 말라고 해서 가장 마지막엔 더블린 단체방에 그 집 뷰잉한 사람을 찾아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녀도 똑같이 저녁을 먹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과 그 집에 살고 있는 한국인 여성이 이 집이 꽤 괜찮은 조건이라고 어필했던 점 때문에 잠깐 그와의 식사를 고민하기도 했다. 이건 단순히 식사 약속이 아닌 집이 걸려 있는 문제기도 했다. 혹은 내가 그를 착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수선한 정신으로 혼자 점심을 먹는데 이건 내가 원했던 오늘의 일상이 아니었다. 내가 기대했던 오늘은, 집을 빨리 보고 시내에 나가 여행자처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생필품이 아닌 나를 위해 예쁘고 향내 나는 무언가를 쇼핑하는 것이었다. 근데 파스타를 먹는 내내 내 정신은 약속 잡은 오후 5시에 매여있었다. 이 불편함이 지속되는 것을 원치 않아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바로 오지 않았지만 문자를 보냈다는 행위 자체가 이렇게 마음이 편안해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 파스타는 식어버리고, 유독 토마토소스가 터진 입술을 쓰라리게 해 그렇게 점심 식사는 끝이 났다. 


얼마 있다가 그에게 답장이 왔다. 


  - (나는 그에게 급한 업무가 생겨 집으로 가서 작업해야 할 거 같다고 하였다.) 스케줄은 다시 잡으면 되지. 어쩔 수 없는 프리랜서의 삶이구나. 그렇다고 일하는 데 밤 새가며 하지 마.


사촌 언니와 친구들에게 그 답장을 보여주며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이게 전부였다. 


  - 난 뭐 남친인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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