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기인 Aug 27. 2020

프롤로그

연봉 2천만 원도 안되는 계약직으로 2년간 일하다 그마저 계약 기간이 만료되었다. 4개월을 아등바등 퇴직금으로 버티다가 동네 음식점 아르바이트를 해야겠다 싶었을 찰나, 지원했던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임원면접 때 사장이 물었다. “연봉 얼마 받고 싶어요?” 그때 사장은 까만 가죽 등받이 의자에 기대어 앉아있었고, 펜을 쥔 손을 쉼 없이 놀렸다. 마치 거래처와 재료 단가를 두고 딜을 하는 현장 같았다. 

“저는 그냥 한 달에 200만 원 넘게만 받아보고 싶어요.” 딜에서 참으로 약해 빠져 보이는, 완벽한 하수의 말투였다. 1,800만 원의 연봉을 받았던 나로서는 이미 마음 자체가 하수였는지도 모른다. 200만 원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계산을 통해 나온 금액이 아닌 월세, 관리비, 생활비를 충당하고도 남은 금액으로 조금씩 저축할 수 있는 꿈의 숫자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200은 넘게 줘야지.” 사장은 생각보다 딜을 원만히 끝낼 수 있겠구나라는 안도의 말투로 호방하게 내 연봉을 올려주었다. 연봉에 신분제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 순간, 커피 한 잔 사 먹을 때도 속으로 잔액을 계산하던 계급에서, 남에게 커피 한 잔 사줄 수 있는 여유의 계급으로 신분 상승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 그렇게 가까스로 안정된 직장에서 3년을 일하다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물론 회사를 그만두는 데에는 모두가 알법한 뻔한 이유들이 늘 도사리고 있었다. 때로는 말로, 무의식의 눈빛으로, 다른 사람들을 통해 전해 들은 누군가의 마음과 같은 것들이다. 그것은 예상 못한 순간, 나를 향해 날아오다 가슴에 명중하는 작은 칼날과 같다. 그럴 때마다 내 안의 ‘나’는 여러 명으로 분신술을 하게 된다. 언젠가는 저 자객들을 베어버리고 말겠다는 심산으로, 서슬 퍼런 칼을 품은 채 기회를 노리는 무사가 된다. 그동안 내 마음속 얼마나 많은 무사들이 있었던가.


그러나, 워킹홀리데이는 무사의 복수심과는 다른 것이다. 내 머릿속 어딘가 떠도는 유령과 같다. ‘미련’이라는 하얀 천을 뒤집어쓴 유령. 그럼 나는 만반의 무장을 하고 ‘미련’이란 천을 걷어내어 유령을 물리치면 되는데, 내 ‘용기’나 ‘의지’라는 무기는 유령을 물리치기에 너무 물렀었다. 대학생 때는 돈이 없어서-> 회사 다닐 때는 생각할 겨를이 없어서-> 퇴사하고 다시 돈이 없어서. 핑계의 루프에 갇힌 유령은 더욱더 막강해졌다. 그리고 유령이 딱 1년 전에 다시 찾아왔다. "나를 더 큰 ‘미련’으로 키울거야?"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중년에도, 노년에도 나는 미련에 잠겨 후회의 한마디를 입버릇처럼 되뇔 것이다. 나의 연대에 후회를 더 이상 추가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렇게 나는 가까스로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무작위 추첨이었지만, 지원 나이 중 가장 늦은 나이에 떠날 용기를 낸 것이 외교부 컴퓨터에게는 가상했나보다. 1차 서류선발에서 최종 비자발급까지의 과정들이 순탄히 진행되었다. 



‘내년 7월에는 이탈리아 크레마로 떠나자. 큰 주택 에어비앤비를 빌려서 정원에서 책을 읽어야지.’

‘12월에는 독일에 갈까? 크리스마스 마켓은 어떤 모습일까.’

‘지금껏 해온 일들 말고, 내가 한 번도 안 해본 일들로 돈을 벌어보자.’



초등학교 때 과학의 날마다 그린 상상화처럼 몇십 년 후의 자동차가 날아다니는 미래를 기대한 것도 아니다. 고작 몇 달 후의 미래를 손꼽아 기다렸을 뿐이다. 그 미래에 전염병이 돌고, 마스크 때문에 사람들이 싸우는 세상이 올지 누가 알았을까. 그래도 치료제가 나올 거라는 희망을 품고 올해 3월이 되자마자 퇴사하겠다고 말했다. 내가 떠날 6월 즈음엔 괜찮아 질거야라는 주문으로 무장했다. 그러나 무장도, 나의 계획도 무너졌다. 영화 <인셉션> 후반 장면에서 주인공인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그의 아내 맬(마리옹 꼬띠아르)이 꿈속에서 세운 세계가 무너지는 모습이 나온다. 한참 전에 본 영화였지만 희한하게도 이 시기에 그 장면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모래처럼 허물어 무너져내리는 건물들이 내가 지난 1년 동안 메모장에 열심히 세운 계획들 같고, 또 ‘나’같기도 했다. 비현실적인 세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가끔 내가, 지금 꿈을 오래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꿈에서 상사한테 메신저로 욕을 보내고서 후회하고 초조해하던 마음이, 수면이 옅어지며 잠에서 완전히 깰 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라는 그 안도감을, 나는 지금 무척이나 바라고 있다. 


이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그나마 아직 계약 해지를 하지 않은 월세 40만 원짜리 방 한 칸, 비자 발급받고서부터 1년동안 꾸준히 모아둔 1,500만 원, 그리고 주말마다 애정을 가지고 고민하며 적어두었던, 계획이 지워진 메모장뿐이다. 하염없이 떠돌아다니는 시간 속에서 나는 나에게 남은 것들로, 얼마나 오래, 무엇을 하며, 생존할 수 있을까 싶어 기록을 시작하게 되었다. 








2020.8.14 

막바지 장맛비가 내린다고 뉴스가 떴지만, 비가 내리지 않았던 날에 내 방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