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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 Nov 08. 2024

철새

겨울의 초입에서


철새


계절이 열린 듯 닫힌 듯합니다.

찬 바람이 따스한 빛의 장막을 관통하여

겨울이란 별스런 손님을 불러들입니다. 

    

한 해가 조용히 지나갑니다. 

귀뚜라미 울음이 끊어짐과 함께 푸른 하늘이 높아지고,

빨간 노란 단풍이 가지마다 물들었다가 낙엽으로 폭삭 무너져내립니다.

그 위에 서릿발이 낯선 발자국을 남기고

숲 곳곳이 까맣게 물들어 차가워지면

떠나지 못하던 우리 철새들도 걸음을 재촉해

긴긴 활공을 준비합니다.     


하늘에선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갑니다.

봄소식을 제일 먼저 알린다는 제비부터 꽃처럼 곱게 운다는 꾀꼬리, 곡식을 퍼뜨린다는 뻐꾸기, 해사한 자태의 해오라기까지 으뜸이 되어 목소리를 내고, 이 외에도 개개비, 물총새, 호반새 등등 수많은 새가 제 얘기를 꺼내기 바쁩니다.

사막을 건널 때 내린 한줄기 비가 참 달콤했더라는 소소한 담화부터

어렵게 도착했다던 별천지 소문까지 한순간에 무성해지곤 하는

철새들의 세계에서 ‘비행’이란 도피라기보다 새날을 향한 도약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철새만큼 사리에 밝은 동물도 다시 없을 듯합니다만

또 그렇기에 철새로 산다는 건 녹록치 않은 일입니다.

세상의 변화무쌍한 흐름을 일찍이 깨치지 못하면 어물쩍거리다가

다른 잘난 새들의 틈바구니에 치여 뒤처지거나 길을 잃기 일쑤이니

결국 저 하나 지키기도 벅찬 게 우리의 신세입니다.     


앞서간 이들이 개척한 경로를 따르는 것 역시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바람을 타고 날다가 궂은비에 꺾이고, 풍랑을 만나 휘청이고,

떠나간 고향 생각에 틈틈이 울다가도

날개 뼈마디 부딪는 아픔에 모든 걸 잊게 됩니다. 

여기에 낮이면 뒤이어 오는 새들의 독촉에 시달리고,

밤이면 보이지 않는 앞날 걱정에 시름시름 앓으니

어디로 간들 불안하지 않겠으며, 

어디로 간들 생활의 불편이 없겠습니까.     


그럼에도 내딛어야 할 곳에 꼭 발을 디뎌야 하기에

해마다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 강남에서부터 제주 등지를 오가며

부지런히 이역(異域)의 소식을 전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얘기가 겨울을 힘조차 없는 새들의

가소로운 불평으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매서운 추위에 쫓기고, 세파에 찌들고, 꺼져가는 불빛에 좌절하면서도

기어이 살아냈단 말을 하는 겁니다.


삶에 순응한다는 건 그런 겁니다.

더없이 추운 곳에서 따뜻한 곳으로 목숨 걸고 이동하는 철새처럼

시대의 끝자락에서도 기필코 살아남아 "내가 살아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태어난 자의 숙명이요, 마땅한 권리이자 도리이기도 하거나와

더욱이 내 세상을 넓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곧 다시 떠나야 합니다.

허전한 나그네의 가슴을 부여잡고 타향살이에 반년을 보내야 합니다.

하나 버틸 것입니다. 잘 살아낼 것입니다. 


겨울이 다가오면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십시오.

나의 이런 간절한 마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 해의 끝에선 많은 이야기와 많은 일이 이루어집니다.








사실 여름철새의 이동 시기는 가을이지만, 한 해의 끝자락에서 다음 해로 무사히 넘어가고자 하는 우리의 모습이 월동 준비하는 철새들과 닮았다고 여겨져 쓰게 된 글이라 겨울(11월)에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짧은 산문이지만 철새들의 삶에 대한 의지가 독자 여러분께 충분히 가닿았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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