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4.30. 이스탄불 한달살이를 마치고 부다페스트로 왔다. 공항이 제주공항 정도로 자그마하고 입국심사대가 10개쯤 있다. 6곳은 외국인 심사대이고 4곳은 자국민과 EU국가 그리고 영국인 전용이다. 자국민 심사대는 대기 없이 금방 처리하고 외국인 심사대는 깐깐하게 심사하여 길게 줄이 늘어져 있다. 어느 나라나 자국민과 외국인의 입국심사대가 다르니까 그러려니 하면서 줄을 서 있는데 맨 끝 심사대 위에 태극기 스티커가 보인다. 직원에게 저곳에 한국국기가 있는데 한국인은 저쪽으로 가도 되냐고 물었더니 가능하단다.
태극기가 붙어 있는 맨 끝의 심사대를 통해 간단히 통과할 수 있었다. 헝가리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이 이렇게나 높다니 마음이 뿌듯하다. EU국가와 영국이 자국민 대우받는 것은 당연한데 EU를 제외한 170개 국가 중 왜 대한민국만 자국민 같은 대우를 해주는 건지 궁금하다. EU와 영국인은 별도통로로 가라는 표시가 있지만 한국인에게는 별도 표시가 없는 것을 보면 최근에 이런 혜택이 주어진 듯하다.
최근 몇 년간 헝가리에 투자한 한국기업이 많다고 한다. 헝가리가 유럽 진출을 원하는 한국 기업들의 거점으로 부상하여 200개 이상의 한국 기업이 헝가리에 진출했다고 한다. 한국의 화끈한 투자로 인해 입국심사를 면제해 주는 특혜를 베풀었지 않나 생각한다.
입국심사 후 가방을 찾은 다음 버스 티켓 구입을 위해 여행안내소로 갔다. 내 여권을 본 직원이 65세 이상은 대중교통이 무료이니 표를 살 필요가 없다고 한다. 버스, 트램, 지하철 등 대중교통은 물론이고 고속열차를 제외한 2, 3등급 기차는 무료라고 한다.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무료라는 것이 매우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좋은 것은 대중교통 승차 전후에 표를 집표기에 확인하는 절차를 안 해도 되기 때문이다. 탑승할 때마다 표에 펀칭을 해야 하는데 이것 역시 귀찮은 일이다. 깜박 잊고 펀칭 하지 않으면 무임승차로 간주되어 벌금폭탄을 맞기도 한다.
기차는 온라인으로 티켓을 구매해야 하는데 인터넷이 느리고 끊기기도 하며 신청에 필요한 입력절차가 까다롭다. 그런데 예약도 필요 없고 시간에 무관하게 역에 가서 아무 기차나 타고 어디던지 갈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한가? 주말만 아니면 빈자리가 많다고 하니 주중에 여행하면 되고 표검사를 대비해서 여권만 가지고 다니면 된다. 무료 기차를 이용하여 부다페스트 외곽에 있는 여러 역사유적과 풍광 좋은 자연을 가볼 계획이다.
작년 프라하에서도 65세 이상은 대중교통이 무료였다. 과거 공산국가들이 65세 이상에 대한 복지가 좋은 듯하다. 서유럽 국가는 65세 이상 교통무료가 없으며 기껏해야 자국민에 한해 30% 정도 할인만 해준다. 인터넷과 유튜브 어느 곳에서도 시니어 관련한 내용을 보지 못했다. 유투버나 블로그에 글 올린 사람들이 대부분 64세 이하라서 65세 이상 시니어 들에 대한 혜택에 대해 접해보지 못해서 일 것이다.
관광지 입장권도 마찬가지이다. 헝가리는 65세 이상은 30~50% 정도 할인해 준다. 지난달 이스탄불에서는 교통권은 물론 관광지 입장권도 65세 이상 할인이 전혀 없었다. 한달살이 하고 싶은 한국의 지공거사들은 헝가리나 체코등 과거 공산국가였던 동구권 국가에서 한달살이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할인을 해줘서 돈이 절약되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 큰 것은 사회분위기가 65세 이상 시니어들에 대해 배려를 한다는 것이다. 특히나 부다페스트는 프라하에 비해 숙소비도 저렴한 편이고 한국식당과 식료품점도 많아서 한달살이에 최적이다.
입국심사대에서 특별대우를 받고 무료교통을 이용하여 숙소에 도착하니 집주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에어비엔비로 예약한 아파트인데 바로 앞집에 집주인이 살고 있다. 맘 좋아 보이는 중년부인이 숙소 설명을 해주면서 가끔 하이킹 함께 하자고 한다. 2년 전 삿포로에서 한달살이 하면서 집주인과 함께 온천 다니고 맛집 찾아다녀서 좋았는데 부다페스트에서도 현지인과 함께 걷고 와인마실 수 있게 되었다. 숙소 역시 위치가 좋고 잘 관리되어 있으며 주방, 욕실물품 등 필요한 물건이 완비되어 있다. 주변에는 마트, 식당, 카페가 많아서 선택범위도 넓다. 부다페스트 도착하자마자 흐뭇한 일의 연속이다. 그동안 살았던 어떤 곳에서의 한달살이 보다 첫출발이 상큼하다.
부다페스트는 서울보다 약간 작은 정도이지만 인구는 170만 명에 불과하여 도시 전체가 여유롭다. 그중 여의도 크기의 면적에 관광의 핵심인 성이슈트반 성당, 부다성, 어부의 요새, 세체니 다리, 국회의사당이 올망졸망 모여 있다. 도시 중심을 벗어나면 한국의 전원주택단지처럼 이쁘게 단장한 단독주택들이 여유 있게 늘어서 있다. 도시 중심부는 중세풍의 고풍스러운 모습으로 기품 있고 도시 외곽은 전원주택 단지처럼 아름답다. 도나우 강이 도시 중앙을 흐르고 있고 강의 서쪽은 300~400미터 높이의 산악지역이 도시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고 동쪽은 평원이다. 부다성과 어부요새는 적의 침략을 대비해서 방어에 유리한 서쪽 산지에 건설되어 있고, 국회의사당과 성이스트반 성당은 동쪽 평지에 위치한다.
역사유적과 볼거리가 여의도 면적만 한 곳에 몰려있어서 여타 다른 도시처럼 이삼일만 돌아보면 더 이상 특별한 구경거리는 없다. 이후는 관광이 아닌 현지인처럼 생활을 해야 한다. 내가 가봤던 유럽의 역사도시 모두 여의도 만한 크기에 주요 유적지와 볼거리가 몰려있었다. 서울 역시 경복궁, 창경궁, 덕수궁, 남대문, 동대문, 인사동, 북촌, 서촌등 대부분이 여의도 크기 면적에 몰려있다. 역사 도시는 왕궁을 중심으로 주변에 방어, 종교, 통치와 관련된 모든 건축물이 위치해서 일 것이다.
부다페스트 구도심은 품위가 넘친다. 모든 건물은 중세풍의 석조건물이며 5층으로 높이를 맞춰 가지런히 서있다. 인구대비 땅이 넓어서인지 대로뿐만 아니라 뒷골목도 널직 널찍하다. 골목 곳곳에 공원이 있고 도로 자체가 공원처럼 꾸며진 곳도 많다. 나무가 우거진 골목 사이를 걷다 보면 공원 산책로를 걷는 것처럼 상큼하다. 도로와 뒷골목 곳곳에 카페와 레스토랑이 있으며 매장마다 야외식탁이 배치되어 있어서 낭만이 가득이다.
걷기에도 아주 좋은 환경이다. 다뉴브강이 한강처럼 남북으로 도시를 가르고 있어서 강변으로 산책로가 잘 되어 있다. 도시 내부에도 건물사이의 도로들이 아기자기하게 조성되어 있어서 도시 내를 걷는 것도 즐겁고 볼거리도 많다. 5월이라 행인들의 옷차림도 밝고 환하다. 사람들의 옷차림은 도시 분위기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칙칙한 옷차림이 많으면 도시 자체가 칙칙해 보이고 환한 옷차림이 많으면 도시가 환해진다. 부다페스트는 현지인과 관광객들의 밝고 깔끔한 옷차림으로 인해 거리가 환하고 시원시원하다.
강변과 시내를 걷는 것도 좋지만 버스나 트램을 타고 20분 정도만 나가면 외곽 산악지역이다. 삼사 백 미터 높이의 산이 도시 서쪽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야트막한 산에 나무가 울창하고 하이킹하기 좋은 길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다. 한국의 산에 비해 지세가 유순하고 신록이 우거져서 걷는 발걸음이 상쾌하다. 나무종류는 한국과 다르지만 한국과 같은 모습의 애기똥풀이 이곳저곳에 피어있는 것이 신기하다. 프라하와 이스탄불에서처럼 역사지역과 자연 속을 번갈아 걷고 있다.
부다페스트는 야경이 멋있기로 유명하다. 파리, 프라하와 함께 유럽 3대 야경 도시라고도 한다. 해가지면 야경을 보기 위해 도나우 강가는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며 야간 유람선을 타기 위해 긴 줄이 늘어서 있다. 2019년 안타까운 유람선 사고도 이곳의 야경을 보기 위해 유람선을 탔다가 발생한 사고였다. 한강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야경도 아름답다. 한강다리마다 색색깔의 조명이 현란하고 강변 고층아파트의 스카이라인도 멋스럽다. 하지만 은근한 조명으로 비춰주는 고풍스러운 역사유적들은 기품이 있다.
부다페스트 중간을 흐르는 도나우 강변에는 부다성, 어부의 요새, 국회의사당 등 역사유적들이 있으며 강변을 따라 줄지어있는 중세풍 건물들과 어우러져 멋스러움을 더해준다. 야경의 핵심은 국회의사당이다. 인구 천만명의 국회의사당이 5천만 한국의 국회 건물보다 훨씬 커 보인다. 강변에 위치해서 바닥부터 탑 끝까지 건물전체가 보이고 붉은 조명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1904년에 완공되었다고 하니 역사는 보잘것없지만 120년 전 공들여 지은 덕분에 관광객을 불러 모우는 세계적인 야경명소가 되었다.
밤이 되면 도나우강변은 매일 축제 분위기이다. 강변에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에는 젊은이들로 북적이며 맥주와 와인을 마시면서 시끄러운 음악에 몸을 흔들고 있다. 강가의 공터와 공원에는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커플들이 와인과 음식을 가져와 먹으면서 야경을 즐긴다. 한 곳에서 보는 야경에 만족 못하는 사람들은 강변을 따라 걸으면서 변하는 야경을 감상한다. 유람선 선착장 앞에는 배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인파사이를 헤치며 강변을 걸어갈 때면 나도 덩달아 축제를 즐기는 듯 감정이 고조된다. 야경 관람 포인트인 세체니 다리 옆을 지날 때는 진한 애정행각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쳐다보면서 마음이 젊어진다.
아무리 볼거리가 많아도 매일 긴 시간 돌아다니기 어렵다. 한도시에서 한 달을 살다 보면 밖에 나가 관광하고 걷고 운동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앉아서 지내게 된다. 아지트가 필요하다. 노트북 작업이 가능한 카페를 찾았더니 숙소 주변에 좋은 곳이 있다. 매장 내 테이블마다 전원단자가 있고 탁자 위에도 노트북 가능 표시가 적혀 있다. 카페 손님은 대부분 20대로 보인다. 20대들 사이에서 노트북 하려니 좀 어색하다. 종업원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쳐다보는 것도 조금 신경 쓰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곳을 한달간의 아지트로 정했다.
좋은 숙소, 주변환경, 무료 교통, 걷기 좋은 여러 장소, 노트북 하기 좋은 카페... 부다페스트 한달살이 출발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