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 딸내미 재회
헝가리는 노인 교통복지가 세계 최고이다. 65세 이상 시니어는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도 시내버스, 트램, 지하철이 무료이며 고속철도를 제외한 2, 3급 철도가 무료이다. 한국은 65세 이상 내국인에 한해 지하철 무료만 가지고도 아우성인 것과 비교된다. 작년에 한달살이 했던 프라하도 외국인 포함 65세 이상 대중교통은 무료였으나 철도는 아니었다. 통 큰 헝가리 정부에 경의를 표한다.
무료 교통을 타기 위해서는 65세 이상임을 보여주는 증명서를 지참해야 한다. 외국인은 여권 또는 면허증(국제면허증 포함)을 보여주면 된다. 프라하에서는 승객들이 중간문으로 승차하면서 집표기에 표를 인식하고 검표원이 요구하면 표를 보여주면 된다. 표검사는 자주 하지 않지만 무임승차로 발각되면 50배의 벌금 폭탄을 맞게 된다.
헝가리 대중교통은 프라하와 다르다. 버스는 앞문으로 승차한다. 승객은 운전사가 보는데서 집표기에 체크하며 시니어 들은 운전사에게 목례를 하고 그냥 탄다. 운전사가 현지인의 얼굴을 보고 시니어인 줄 알기 때문에 증명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나도 현지인 시니어처럼 목례를 하면서 지나갔더니 나를 잡는다. 여권을 꺼내어 보여주면서 I am 68 years old 했더니 여권의 생년월일을 확인하고 내 얼굴을 보면서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서양인, 동남아인들은 한국사람을 젊게 본다. 기본 열 살 아래로 보며 외모 관리를 좀 한 사람은 스무 살 아래로도 본다. 해외여행 다녀봤던 사람들은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지난달 이스탄불에서 자주갔던 통닭집 사장이 나에게 몇 살이냐고 묻는다. 몇 살로 보이느냐고 했더니 본인이 45세인데 자기보다 어려 보인다고 한다. 함께 있던 사람들도 내가 사장보다 어려 보인다고 한다.
부다페스트에서 버스 타면서 운전사에게 I am 68 years old 하니 운전사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여권을 요구한다. 여권을 보고 나서도 미심쩍하는 표정이다. 젊어 보여서 피곤한 상황이 되었다. 이후 버스 탈 때마다 운전사에게 죄송한 표정을 지으면서 I am 68 years old를 외치며 여권을 보여준다. 지하철도 마찬가지이다. 지하철은 입구에서 검표원이 표검사를 한다. 지하철 검표원에게도 I am 68 years old를 외치며 여권을 보여준다. 하루 서너 번 I am 68 years old 하다 보니 내가 할아버지가 된 기분이다. 나이 생각 안 하고 살다가 매일 몇 번씩 벌 받듯이 “저는 68세입니다”를 외쳐야 하니 불편하다.
다행히 트램은 여러 개의 문으로 자유롭게 타고 내릴 수 있어서 나이를 말할 필요가 없다. 가급적 트램을 이용하려 하지만 안 가는 노선이 많아서 버스와 지하철을 타곤 한다. 한 달권 사면 한번 탑승에 천원도 안 하는데 지금이라도 사버릴까 생각이 들지만 아는 사람 없는데서 모양 좀 빠지면 어때하면서 줄기차게 “저는 68세입니다”를 외치고 있다.
작년 초 베트남 나트랑에서 만났던 2000년생 조지아 딸내미 "안나"를 이곳에서 만났다. 안나와는 베트남에서 만난 후 SNS로 가끔 안부를 주고받고 있었다. 내가 부다페스트에서 한달살이 한다고 했더니 부다페스트에 파견근무 중인 애인도 볼 겸 휴가를 내고 이곳에 왔다. 안나는 애인과 함께 지낸다. 아침에 애인 출근하고 나면 오후 6시 퇴근까지 할 일이 없어서 시내를 무작정 걸어 다닌단다. 나를 보더니 낮에 함께 다닐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고 반가워한다.
안나와 구시가지 이곳저곳과 주변 공원을 걸어 다녔다. 함께 버스를 타면서 운전사에게 I am 68 years old 하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다. 자초지종을 설명해 줬다. 안나가 뜨악한 표정을 짓더니 나보고 68세냐고 묻는다. 작년 베트남에서 만났을 때 안나가 내 나이가 50쯤 보인다고 해서 맞다고 했었다. 이후 내가 50인 줄로 알고 있었는데 68세라고 하니 놀란 모양이다. 할아버지네요? 하면서 폰에 저장된 내 이름을 한국 아저씨에서 한국 할아버지라고 바꿔 입력한다. 조지아에서는 68세면 외모와 행동이 완연한 노인이라고 한다. 내 나이를 들으니 저절로 내가 노인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이후 할아버지와 다니듯이 나를 챙긴다. 전에는 내가 구글지도를 보면서 앞에서 길 찾고 안나가 뒤따라 왔는데 이제는 안나가 앞장서서 길 찾고 내가 뒤에 따라간다. 젊어서 인지 길 찾는 게 나보다 빠르고 정확하다. 졸지에 안나에게 한국 아저씨에서 보호해야 할 한국 할아버지가 되어버렸다.
안나는 애인이 출근하고 나면 혼자 있기 심심한지 매일 함께 걷자고 한다. 애인에게 영상통화로 나를 소개하면서 낮에는 할아버지랑 있으니까 걱정(?) 말라고 한다. 애인이 퇴근하는 6시에 집으로 가면서 내일은 몇 시에 만나요? 하고 묻는다. 젊은애가 뭐가 좋다고 할아버지와 다니려고 하겠는가?. 본인이 혼자 돌아다니기 심심하기도 하겠지만 나와 함께 점심을 먹을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 레스토랑 식사비는 무척 비싸다. 가장 저렴한 베트남 쌀국수가 15000원 정도이고 레스토랑에서 피자나 파스타에 음료수 하나 시키면 세금, 서비스료등 15% 정도가 추가되어 3만 원이 넘어간다. 조금 고급스러운 음식 시키면 일인당 5만 원이 훌쩍 넘어간다. 안나와 있을때는 내가 식사비를 낸다. 이점도 안나가 나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 이유일 것이다.
아침은 애인과 집에서 먹지만 점심은 맛있는 게 먹고 싶을 것이다. 나 역시 점심은 혼자보다는 귀여운 안나와 함께하는 것이 좋은것이니 서로 윈윈이다. 이러한 만남이 즐겁긴 하지만 매일 지속되니 나의 루틴이 깨지는 것이 불편해 진다. 바쁘다는 핑계로 가끔 날씨 좋은 날 함께 하이킹하기로 했다.
만나면 소풍 가듯이 배낭에 간식을 준비해서 도시 외곽에 있는 산으로 가서 걸었다. 버스 타면서 내가 I am 68 years old라고 하면 안나는 뒤에서 My grandfather 라고 하면서 추임새를 넣는다. 할아버지라고 부른 이후 더 친근하게 행동한다. 부다페스트 주변의 산들은 남산정도로 야트막 하지만 나무가 빽빽하고 트래킹 코스가 잘 되어 있다. 안나는 산세 좋은 조지아에서 살아서인지 4천 미터급의 산을 며칠씩 비박하며 등산하는 강철 체력이다. 내 걸음이 꽤 빠른 편인데 나보다 더 빨리 걷는다. 한국 여행카페에서 5060들과 트래킹 다니면서 걷는 속도가 느려 답답했었는데 함께 빠르게 걸으니 걷는 재미가 좋다. 한번 가면 서너 시간 빽빽한 산길을 이리저리 열심히 걸으며 경치 좋은 곳에 잠깐 쉬면서 배낭에 가져온 과일과 빵을 먹으며 허기를 달랜다. 야생화가 곳곳에 피어있는 아름다운 숲길을 딸내미와 손잡고 걷는 기분이 상큼하다.
이제 안나는 나를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내 친손녀가 있으니 할아버지 맞긴 하다. 산길을 강아지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놀이터에서 그네와 시소를 함께 타자며 조르는 모습이 손녀처럼 귀엽다. 여행 중 생긴 즐거운 인연이다. 금년 9월 조지아에서 한달살이가 계획되어 있다. 함께 조지아의 멋진 산들을 트래킹 하기로 했다. 9월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