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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한달살이: 가성비 좋은 군사박물관

by 야간비행

비엔나에는 예술, 역사, 음악, 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박물관이 20여 개나 있다. 대부분 입장료가 성인 기준 10~30유로인데, 군사역사박물관(Heeresgeschichtliches Museum)은 단 3.5유로로 가장 저렴하다. 입장료가 싸다고 해서 결코 소장품이나 전시 품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박물관 건물 자체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군사령부로 지어진 유서 깊은 건축물로, 높은 아치형 천장과 정교한 내부 장식, 붉은 벽돌의 외관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역사 속에 들어온 느낌”을 준다.

KakaoTalk_20250622_172219855_06.jpg 박물관 로비의 아름다운 모습

군사박물관은 오스트리아 국방부에서 운영하기 때문에 입장료를 낮게 책정하고 있다.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듯이 오스트리아 역시 국민들에게 안보의식과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군사박물관을 거의 무료 또는 저가로 운영한다. 한국의 전쟁기념관이나 육·해·공군 박물관이 무료인 것과 비슷한 취지다.


이 박물관의 특별함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500년 유럽 역사와 군사적 흥망성쇠를 한눈에 담고 있다는 데 있다. 오스만 제국과의 격돌, 30년 전쟁, 나폴레옹 전쟁,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까지—오스트리아의 군사적 정체성과 유럽사의 변화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곳이다. 박물관 내부를 돌아다니며 오스만의 비엔나 포위, 나폴레옹의 비엔나 점령, 1차 대전의 발발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붕괴, 2차 대전의 패배와 현대 오스트리아로 축소되는 과정을 파노라마처럼 감상할 수 있다.

KakaoTalk_20250622_172219855_03.jpg 시기별 무기와 군복전시

전시품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1차 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저격 당시 타고 있던 자동차였다. 유리관 안에 보존된 대공의 옷까지 눈에 담으면, 단 한 발의 총성이 수많은 유럽 청년들을 참호 속에 몰아넣고 수많은 국경을 바꿨다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마음을 무겁게 한다. 박물관 한쪽에는 1·2차 대전의 철도포, 대포, 초기 전차, 비행기의 실물 전시가 있다. 영화에서나 보던 포탄 직경 30.5cm의 철도포를 실제로 보니, 당시 병기의 위력을 체감하게 된다.

KakaoTalk_20250622_172219855_10.jpg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저격 당한 당시의 차량

군사 박물관 안에는 수많은 전쟁화(戰爭畫)들도 걸려 있다. 16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유럽의 유명 화가들이 남긴 작품 속에서 말발굽 소리, 포연과 함성, 승리의 환희와 패배의 절망이 묻어난다. 그림 속 처연한 얼굴들을 보다 보면 현재 우크라이나나 중동의 전쟁 소식이 오버랩되며, 평화로운 일상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된다.

KakaoTalk_20250622_172219855_02.jpg 나폴레옹 전쟁 시 전쟁화

군사박물관 건물 자체를 천천히 감상하는 것도 즐거움이다. 1층 아케이드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전설적 장군들 동상이 늘어서 있어 건물의 웅장함을 한층 강조한다. 관람을 마치고 박물관 정원이나 옆 벨베데레 궁전 정원에서 잠깐 쉬며 사색하기에도 좋다. 박물관을 나서 10분만 걸으면 벨베데레 상궁(Obere Belvedere)에 도착하는데, 그 유명한 클림트의 ‘키스’를 볼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전쟁의 비극을 돌아본 후 한 폭의 사랑스러운 그림을 감상하는 여정은, 인류의 파괴와 창조를 한 번에 체험하는 특별한 여정이다.

KakaoTalk_20250622_172732393.jpg 1층로비 기둥마다 합스부르크 제국시대의 유명한 장군들의 입상에 전시되어 있다.

군사박물관에서 조금 더 걷다 보면 아르제날(Arsenal) 지구의 옛 붉은 벽돌 건물군을 따라 산책할 수 있다. 관광객이 붐비지 않아 조용히 사색하기 좋고, 오스트리아 군사적 유산을 품은 이 고즈넉한 공간은 화려한 도심 박물관과 다른 매력을 지녔다. 걷다 보면 1,2차 대전 때의 탱크들이 전시되어 있다. 당시 세계 최강의 탱크들이지만 현재 한국에서 만들어 유럽에 수출하는 K-2 전차나 K-9 자주포에 비교하면 조악하기 짝이 없다. 영화에서나 보던 구닥다리 탱크들을 돌아보고 탱크에 세워진 사다리 위에 올라가서 내부를 구경해도 재미있다.

KakaoTalk_20250622_172219855_01.jpg 1,2차 세계대전 때의 여러 탱크들

비엔나에는 유명 미술관, 화려한 오페라하우스, 웅장한 궁전들이 수두룩하지만, 오스트리아의 오랜 역사와 정체성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군사박물관만큼 충실한 여행지는 드물다. 입장료 3.5유로, 도심에서 멀지 않고 벨베데레 궁전과 함께 도보 여행을 이어가기에도 좋아 더욱 부담이 없다. 유럽의 전쟁과 평화, 그리고 현재를 돌아보며 삶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해주는 값진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 비엔나 군사박물관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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