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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고도 여행 2: 천장남로 길(더거에서 다시 청두로)

by 야간비행

9일간의 여정 끝에 험난한 천장북로를 지나 드디어 천장남로 길에 접어들었다. 만년설산과 깊은 협곡을 뚫고 지나온 길은 티베트의 경이로운 자연과 깊은 신앙심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이제 천장남로를 따라 다시 청두로 향한다.


9일 차: 더거에서 간쯔로 이동

더거는 '티베트 불교문화의 살아있는 박물관'이라 불릴 만큼 유서 깊은 도시다. 특히 서쪽 7km 지점의 진샤강을 건너면 바로 티베트 자치구로 연결되는, 역사적인 교역과 문화 교류의 통로였다. 더거의 핵심은 바로 인경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된 이곳은 1730년에 건립되어 티베트 경전을 목판으로 인쇄하는 전통 방식을 수백 년간 이어오고 있다.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처럼 수만 개의 목판이 보관되어 있고, 스님들과 신도들이 경전을 한 장 한 장 인쇄하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20250708_091130.jpg 인경원에서 수작업으로 불경을 인쇄하는 스님과 신도들

인경원을 뒤로하고 다시 간쯔로 향했다. 돌아가는 길은 올 때와 다른 코스로, 최근 국립공원이 된 홍산공원에 들렀다. 산 전체가 붉은빛 암석으로 이루어져 특이했지만, 관광객이 올 만한 곳이 아닌데도 케이블카와 커다란 관광안내소를 지어 놓은 걸 보니 중국의 '무대포'식 개발에 쓴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2일을 묵었던 간쯔 호텔로 돌아와 쉬었다.

20250708_164304.jpg 홍상의 황량한 모습

10일 차: 간쯔에서 신롱을 지나 리탕으로 이동

오늘은 간쯔를 떠나 천장남로의 거점 도시인 리탕으로 향했다. 동서 방향이 아닌 남쪽으로 이동하는 길, 옆으로 펼쳐지는 광활한 초원이 푸른 청보리로 뒤덮여 있다. 지금까지는 목초지였는데 이곳만 특별히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다. 이 청보리는 척박한 고산 환경에 잘 적응해 티베트인들의 주식인 '짬빠'를 만드는 원료라고 한다.


리탕으로 가는 길에 깊은 계곡 사이 좁은 길을 따라 길게 늘어진 신롱이라는 도시를 지났다. 마얼캉이나 관음교진도 계곡 도시지만, 신롱은 유독 폭이 좁아 더 특이한 모양이다. 리탕은 해발 4,200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시다. 간쯔(3,400m)에서 리탕으로 가면서 해발 4,800m의 카쯔란산 같은 고개를 넘는데, 드넓은 초원과 야크 떼, 멀리 보이는 만년설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다. 작년 카자흐스탄 대평원에서 봤던 노란 꽃이 여기에도 드넓게 피어 있어 잠시 쉬어가며 환상적인 평원을 감상했다.

20250709_141920.jpg 노란색의 야생화가 깔려있는 평원

11일 차: 리탕 시내 관광

리탕은 과거 차마고도의 중요한 교역 중심지이자, 7대와 10대 달라이 라마의 고향으로 티베트 불교의 중요한 성지이기도 하다. 시내에 있는 리탕사원은 이번 여행 중 방문했던 사원 중 가장 웅장하고 예술적인 가치가 높아 보였다.

20250710_103246.jpg 리탕사원: 사원의 내부는 예술적인 불상, 불화가 가득하다.

사원에서는 100명이 넘는 스님들이 붉은 가사를 입고 대중 예불을 드리는 장엄한 광경이 펼쳐졌다. 오페라를 보는 듯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오체투지 스타일의 108배와 기도를 올리는 스님들을 보며 감탄했는데, 기도 시간에 늦은 몇몇 스님들이 허겁지겁 뛰어 들어오는 모습이 영락없는 학생들 같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마니차만 보면 '옴마니 반메흠'을 암송하며 돌리는 티베트인들의 신앙심에 동화되어 가는 것 같았다. 숙소는 한국의 70년대 시골 여관 같았는데, 마당에 불판을 펴고 삼겹살 파티를 했다. 느끼한 중국 음식만 먹다가 삼겹살에 고추장, 마늘을 먹으니 4,000m가 넘는 고산병의 무기력증이 싹 사라지는 듯하다.


12일 차: 리탕에서 야딩으로 이동

아침 일찍 출발해 야딩으로 이동했다. 야딩은 아름다운 자연보호구역이 있는 곳으로, 초입에는 소설 속 무릉도원인 '샹그릴라'의 이름을 딴 샹그릴라진 마을이 있다. 이 구간은 차마고도의 주 경로는 아니지만, 티베트 고원의 광활한 초원과 설산, 그리고 협곡이 어우러진 다채로운 풍경을 볼 수 있는 특별한 여정이었다.

20250711_180908.jpg 샹그릴라진의 모습: 여기는 무릉도원처럼 보이지 않고 여기서 30분 정도 거리의 자연보호구역이 무릉도원급이다.

특히 지형이 특이했다. 4,000m가 넘는 고지대인데도 푸른 초원에 집채만 한 바위들이 수없이 흩뿌려져 있다. 빙하기 빙하가 흘러 형성된 지형이라고 한다. 바위 사이로 난 풀을 뜯는 야크 떼가 도로를 점령하기도 해 차가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리탕에서 4,200m 고도의 쌀쌀한 날씨를 경험했는데, 샹그릴라진(2,800m)으로 내려오니 기온이 올라 반소매와 반바지를 다시 꺼내 입었다.

20250711_112747.jpg 온통 바위투성이 산과 평원이 이채롭다.
20250711_110336.jpg 도로로 이동중인 야크때: 중앙아시사 국가는 양때가 길을 막지만 티베트는 야크때가 길을 막는다.

13일 차: 야딩 풍경구 트레킹

아침 일찍 야딩 풍경구로 가서 제대로 된 트레킹을 했다. 해발 4,000~6,000m에 이르는 봉우리들과 호수들이 있는 곳이다. 특히 세 개의 신성한 설산은 야딩의 상징으로, 각각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금강수보살을 상징한다고 한다. 울창한 원시림과 맑은 강물, 빙하가 녹아 형성된 고산 호수, 그리고 장엄한 설산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히말라야, 알프스에 비해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20250712_122334.jpg 우유해의 모습: 위쪽에서 내려온 암석가루가 물에 섞여 우윳빛이다.

4,500m가 넘는 고도라 작은 언덕에도 숨이 턱턱 막혔지만, 6,000m 높이의 만년설에서 흘러내린 우유해오색해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힘든 것을 잊게 해 준다. '마지막 샹그릴라'라는 별칭에 걸맞게 자연의 경이로움과 영적인 평화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왕복 20km, 3만 보를 걸은 것이 뿌듯하다. 셔틀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 차창 밖으로 보이는 깎아지른 절벽에 몇 년 전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 때의 아찔했던 기억이 떠올라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14일 차: 야딩에서 리탕으로 이동

오늘은 샹그릴라진에서 리탕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정이다. 이틀 전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는 길이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어 올 때는 그냥 지나쳤던 모아고산대초원에 내려 야생화가 가득한 평원에서 한가로운 휴식을 취했다.

20250712_141846.jpg 아름다운 대 초원의 모습

리탕으로 돌아온 후 시내 재래시장을 둘러봤다. 시장에는 약초상이 유독 많았는데, 주변 산들이 5,000m급이라 동충하초설련화의 주산지라고 한다. 진시황이 찾던 불로초에 가장 가깝다는 말에 혹해 몇 개 구입했다. 감기몸살로 비실거리던 룸메이트가 동충하초를 먹고 회복되는 것을 보니 약효가 있나 싶다. 저녁에는 다시 삼겹살 파티를 열었는데, 나는 기술이 필요 없는 마늘 까기를 담당했다.


15일 차: 거니에 설산

오늘은 티베트 불교의 중요한 성지인 거니에 설산을 가는 날이다. 거니에는 '깨달음의 장소'이자 '문수보살의 거처'로 알려져 있다. 우리 일행은 등산 전문가가 아니어서 설산 아래에 위치한 '신의 눈'이라 불리는 거니에 눈 주변을 걷고, 사찰 뒤편으로 웅장한 설산이 병풍처럼 펼쳐진 렁구사원까지만 트레킹 했다.

20250714_141959.jpg 멀리 보이는 산이 거니에 설산이며 앞에 보이는 웅덩이가 거니에 눈이다.

트레킹을 마치고 설산 아래의 작은 마을 쩌바촌에서 숙박했다. 이곳은 넓은 초원과 주변이 산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이 마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속 오스트리아 알프스 같았다. 마을을 둘러싼 산자락 아래 색색의 야생화가 피어있는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 여기가 바로 진정한 샹그릴라처럼 느껴졌다. 워낙 오지라서 숙소는 방에 욕실도 없고 화장실도 푸세식인 시골 여인숙이었지만, 이 정도라도 잘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하룻밤을 보냈다.


16일 차: 쩌바촌에서 바탕으로 이동

설산 아래 쩌바촌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바탕으로 향했다. 바탕은 티베트 자치구와 마주한 국경 도시이자 천장남로의 중요한 관문이었다. 험한 비포장도로를 달리다 차가 너무 흔들려 길이 나쁜 구간은 아예 내려서 걸어갔다. 한참을 가다 고갯길을 오르는데, 고도가 올라갈수록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환상적이다. 키르기스스탄 알타아라산에서 봤던 놀라운 풍경보다 더 광활한 아름다움이었다. 우리는 한동안 야생화가 만발한 고원에 앉아 그 환상적인 풍경을 눈과 몸으로 느꼈다.

20250715_113423.jpg 이번 여행 중 가장 아름다운 풍경: 산, 계곡, 평원이 장관이다.

또 다른 고개가 나타났는데 해발 5,000m로, 이번 여행 중 가장 높이 올라간 곳이었다. 1시간 정도 걸으며 5,000m에서의 트래킹을 경험 했는데, 역시 고도가 높으니 숨이 턱턱 막혔다. 이런 길을 걷다 보니 평지를 걷는 것이 얼마나 쉽고 호사스러운 일인지 실감하게 된다. 바탕에 도착하니 고도가 2,500m로 낮아져 한여름처럼 더워진다. 이번 여행 중 수시로 몇천 미터를 오르내리며 날씨가 가을, 여름으로 변하는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저녁에는 시내 광장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며 티베트인들이 전통 댄스로 정체성과 민족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20250715_210937.jpg 바탕시 광장에서 매일밤 이런 민속춤판이 벌어진다.

17일 차: 바탕에서 리탕으로 이동

바탕에서 다시 리탕으로 가는 길은 티베트 고원의 장엄한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구간이다. 특히 마치 자매처럼 나란히 위치한 두 개의 아름다운 고산 호수인 자매호수가 인상적이다. 만년설을 이고 있는 웅장한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더욱 신비롭고 아름답다. 호수 주변으로 조성된 둘레길을 걸으면서 여러 방향에서 달리 보이는 고산 호수를 감상했다..

KakaoTalk_20250811_231622966.jpg 자매호수중 윗쪽호수: 설산에서 내려온 맑은 물

가는 도중 휴게소 화장실에서 말로만 듣던 중국 재래식 화장실을 경험했다. 칸막이 없이 바닥에 노트북 크기만 한 구멍이 몇 개 뚫려 있는 곳이었다. 다행히 아무도 없어 쭈그리고 앉았는데, 누군가 들어온다.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니 그는 아무 표정 없이 엉덩이를 까고 옆에 쭈그려 앉는 촌극을 벌였다. 여자가 아닌 것에 감사하며 일을 마쳤다. 리탕에 도착해서는 또다시 삼겹살 파티를 열었는데, 배추를 사서 만든 즉석 김치와 함께 먹는 삼겹살은 하루의 피로를 잊게 해주는 즐거운 식사였다.


18일 차: 리탕-캉딩을 지나 루딩으로 이동

이제부터는 리탕에서 청두로 돌아가는 천장남로의 핵심 구간이다. 이 길은 중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긴 318번 국도인데, 천장북로보다 완만하고 편한 길이다. 4,200m의 리탕에서 출발해 2,500m의 캉딩으로 내려간 후, 1,300m의 루딩까지 고도가 계속 낮아진다. 이 구간에는 '회전이 많은 산'이라는 뜻의 쭤어라산(4,300m) 고개가 있었는데, 수십 번의 S자 회전을 하면서 단숨에 2천 미터를 내려온다. 이 고개를 넘으니 고도변화에 따른 기온변화와 풍경이 확연히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20250717_130628.jpg 쮜어라산 고갯길의 모택동 홍군의 만리장정 기념조형물: 홍군이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함.

캉딩은 차마고도의 '동문'이라 불릴 만큼 교역의 핵심 요충지였다. 과거 쓰촨에서 생산된 차가 티베트로 운반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집결하던 곳이었다. 루딩은 중국 공산당 혁명사의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루딩교로 유명하다. 13개의 쇠사슬로 만들어진 다리를 건너며 아찔함과 역사의 흔적을 동시에 느꼈다.

20250718_091035.jpg 루딩시를 흐르는 다두허와 루딩교

19일 차: 루딩-야안을 지나 청두로 이동

루딩에서 야안을 지나 청두로 가는 길은 차마고도 여정의 마지막 구간이다. 고산의 험준함은 점차 사라지고 고도가 차츰 낮아지면서, 녹음이 우거진 습하고 비옥한 농경지 풍경으로 바뀐다. 야안은 과거 '변차'라 불리는 차가 티베트로 운반되던 출발점이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차창 밖으로 보이는 현대 도시 야안의 모습에 과거의 흔적은 볼 수 없었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도로 주변의 차밭을 보면서 과거 마방들이 차를 싣고 험준한 길을 걸었을 모습을 상상해 본다. 오후에 드디어 청두로 돌아와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이번 여행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무역로를 둘러보며 과거 사람들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게 살아왔는지를 실감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 지금은 도로가 뚫려 18일 만에 천장북로와 남로를 모두 돌아봤지만, 불과 50년 전만 해도 목숨을 걸고 몇 년씩 걸리던 길이었다. 티베트 지역의 현대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차마고도의 흔적은 빠르게 사라질 것 같아 아쉽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윈난성에서 출발하는 차마고도를 돌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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