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유목하는 카공족
나는 유목민 카공족이다. 퇴직 후 여행작가로 변신해 전 세계를 떠돌며 글을 쓴다. 글쓰기 아지트는 바로 지구촌 곳곳의 카페다. 여행과 한 달 살이를 병행하며 보고 느낀 것들을 브런치에 기록한다. 이동 중에는 사진과 영상을 남겨두고, 한 달 살기 도중 천천히 음미하며 글을 완성한다.
어릴 적부터 도서관이나 독서실에서 공부하던 습관 때문인지 집에서는 글에 집중이 안 된다. 집에서 노트북을 켜면 나도 모르게 유튜브 쇼츠를 따라다니기 일쑤다. 퇴직 후 집 근처 도서관을 찾았지만, 키보드 소리에 흘끗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했다.
그러다 동네 스타벅스에 가봤다. 젊은이들이 가득한 그 활기찬 분위기가 좋았다. 나도 카공족이 되기로 했다. 진한 커피를 마시며 눈치 보지 않고 노트북 작업을 하는 것이 무척 편했다. 가끔 머리 희끗한 5060 동료들도 보여 안심이 됐다. 적당히 시끄러운 장소가 오히려 나에게는 더 잘 맞았다. 이 경험은 내가 전 세계의 카페를 누비는 '유목민 카공족'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첫 한 달 살이 도시인 제주도 서귀포는 앞으로의 여행을 위한 사전 훈련이었다. 숙소 근처에 카공 가능한 카페가 있었지만, 나는 도서관을 선택했다. 서귀포 시립도서관은 최신 시설과 풍부한 책, 그리고 카페와 식당까지 갖추고 있어 완벽한 글쓰기 아지트가 되었다. 매일 아침 도서관으로 '출근'해 글을 쓰고 책을 읽었고, 오후에는 '퇴근'해 올레길을 걸으며 힐링했다. 하루 7~8시간씩 노트북과 함께하며 해외에서도 충분히 잘 지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첫 해외 한 달 살이 장소는 일본 삿포로였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글 쓸 공간을 찾기 어려웠다. 도서관 이용 절차는 복잡했고, 노트북 작업이 가능한 카페도 드물었다. 어쩔 수 없이 숙소에서 작업을 해야 했는데, 혼자 있는 공간이라 쉽게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이 경험을 통해 이후 숙소를 고를 때는 주변의 카공 가능한 장소를 먼저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나에게 태국 치앙마이는 완벽한 글쓰기 천국이었다. 숙소 바로 앞의 카페는 아름다운 정원을 갖춘 식물원 같았고, 커다란 테이블과 콘센트가 있어 카공하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이곳은 이미 전 세계 디지털 노매드들의 아지트였다. 5060 은퇴자들도 많아 서로 인사하고 대화하는 사랑방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매일 아침 카페로 출근해 점심까지 해결하며 7~8시간씩 노트북과 시간을 보냈다. 음료를 자주 주문하고 팁까지 챙겨주었더니 직원들은 나를 VIP처럼 대접했다. 심지어 내 자리에는 '예약석' 표시까지 놓아 다른 사람이 앉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치앙마이에서의 성공적인 경험은 나에게 자신감을 주었고, 이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와 베트남 나트랑으로 한 달 살기를 이어갔다. 쿠알라룸푸르에서는 레지던스 호텔의 야외 수영장 카페에서 글을 썼다. 수영하는 사람들을 보며 비치파라솔 아래에서 글을 쓰다가, 때로는 물속에 뛰어들어 수영하는 이색적인 경험을 했다. 나트랑에서는 해변이 보이는 카페에서 푸른 바다를 보며 글을 썼고, 발리에서는 2층 베란다에 비치된 탁자에서, 쏟아지는 스콜을 보며 노트북 작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도시가 완벽한 환경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유럽은 동남아시아와 달리 '카공 문화'가 발달하지 않아 글 쓸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프라하와 부다페스트에서는 간신히 노트북 작업이 가능한 카페를 찾았지만, 직원들의 눈치가 불편하고 음료값이 비싸 부담스러웠다.
이스탄불과 비엔나에서는 카공 가능한 카페를 찾을 수 없었다. 아예 카페를 포기하고 숙소에서 글을 썼다. 4층 탑방이었던 이스탄불 숙소는 전망이 좋아 경치를 감상하며 작업할 수 있었고, 베란다까지 날아온 갈매기들에게 과자를 던져주며 노는 즐거움도 있었다. 비엔나에서는 숙소 여주인이 작가여서 집안에서 함께 글 작업을 하며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받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지금은 몽골 울란바토르의 한 카페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곳의 카공 분위기는 동남아와 비슷하다. 여러 명의 젊은이와 외국인 카공족들이 노트북 작업을 하고 있고, 콘센트와 카공 전용 부스까지 잘 갖춰져 있다. 나는 매일 아침 식사 후 이곳으로 출근해 부스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한다. 매일 서너 잔의 음료를 주문하니 직원들은 이제 시간에 따라 내가 뭘 주문할지 안다.
지금까지 14개 도시에서 한 달 살기를 하며 수많은 카페에서 카공족으로 지냈다. 완벽한 곳도, 불편한 곳도 있었지만, 어떤 곳이든 나만의 글쓰기 아지트로 만들어왔다. 앞으로 36개 도시를 더 여행하며 총 50개 도시의 카페에서 노트북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 도시의 문화를 경험해 볼 예정이다.
해외 도시에서 카페에 앉아 있는 것은 단순히 글을 쓰는 행위를 넘어, 그 자체로 현지 문화를 체험하는 좋은 장소이다. 그 공간을 채우는 사람들의 행동과 분위기, 그리고 제공되는 메뉴를 통해 그 나라의 역사, 가치관, 그리고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나는 어디를 가든 두 시간마다 음료를 추가로 주문하며 최소한의 예의를 지킨다. 동남아 국가에서는 팁까지 챙겨주다 보니 직원들에게 환대를 받기도 한다. 해외 카공족은 그 나라의 문화와 규칙을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늘 기억한다.
글쓰기, AI와의 대화, 검색, 유튜브 시청 등 노트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활동을 해외의 카페에서 즐긴다. 이 모든 경험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했다. 나는 오늘도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