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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달걀 Oct 28. 2024

북한에서도 냉면에 식초와 겨자를 넣어먹나요?

고려 식당에서 생긴 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친구가 가장 가보고 싶어 했던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에서 운영하는 '고려식당'이었다.


그것은 북한, 탈북자 알고리즘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도 정말 눈이 번뜩 뜨일 만한 제안이었다.

어찌 이런 기특한 생각을 했을꼬?

예전부터 누군가가 세상에서 여행 가보고 싶은 나라(?)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단연 '북한'이라고 말하리!! 라던 나의 지난날들을 마치 옆에서 지켜보기라도 한 듯

친구는 내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식당 앞에 도착하니 국경선을 넘기라도 하는 사람들처럼 떨리기 시작한다.

진지 모드의 궁서체와 붉은색 인테리어가 이곳에서는 조그마한 농담과 웃음도 허용되지 않을 것 같은 암묵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조심스럽게 입장하는 손님의 긴장감과는 다르게

익숙한 듯 테이블로 안내하는 북한 종업원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북한사람들이다.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이 80년대 후반 혹은 90년대 초사람처럼 느껴져서

내가 시간을 타임루프하여 어렸을 적 과거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어렸을 적 보았던 이모 같은 느낌도 들고, 외국인 같기도 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내가 번역 어플 없이도 그냥 알아들을 수 있다니 신기하다.


모두들 똑같은 검은색 민소매 원피스에 통굽 힐을 신은 채 서빙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대학생 때 알바 꽤나 해본 여자 사람으로서 보기만 해도 통증과 존경심이 밀려왔다.

손님은 역시나 전부 한국 사람들 밖에 없었다.





메뉴는 대부분 한국에서 먹어봤던 메뉴랑 비슷하였으나

뭐를 선택해야 될지 몰라...는 핑계고

북한 종업원분과 대화를 하고 싶어 메뉴를 추천해 달라고 하기로 했다.


나: 어떤 메뉴가 맛있는지 추천해 주실 수 있나요?

북한 종업원: 다 맛있습니다. oo도 맛있고 oo도 맛있습니다.

나: 그럼 평양옥류관 냉면 하나랑 만두, 연근요리, 대동강 맥주 하나 주세요.


말 끝의 길이가 짧고 끝이 올라가는 평안도식 억양을 직접 들으니 상당히 나긋나긋하게 들렸다.

지방에서 막 상경하여 들었던 서울 사람들의 충격적인 상냥한 억양을 떠올리게 했다.


우리는 TV에서 많이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의 평양옥류관 냉면을 시켰다.

가수들이 평양공연을 갔을 때 만찬을 하러 간다는 그 옥류관 말이다.

냉면 하나로도 사이즈가 세숫대야만 한데 언제 또 먹어보겠냐 싶어 음식을 3개나 시켜버렸다.


북한 종업원: 근데 김치도 진짜 맛있습니다.

나: 그럼 김치도 주세요.


귀로 하늘을 날 수 있는 팔랑귀를 가진 나는 종업원의 추천에 1도 망설이지 않고 긍정의 답을 보낸다.


나: 저희가 너무 많이 시켰나요?

북한 종업원: ....아니, 괜찮습니다.


남한에서 온 돼지라고 생각할까 봐 약간 머쓱했지만

이 정도는 남쪽에서는 평균 사이즈의 위장이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이윽고 옥류관 냉면이 나왔다.

북한은 식량도 부족하다는데 그릇 사이즈가 왜 이렇게 큰지 모르겠다.

우리 냉면 그릇 크기와 비교하면 1.5~2배 정도 되는 것 같다.

어쩌면 남한 사람들을 위한 전용 사이즈인가...


냉면을 서빙하며 익숙한 소스통을 내려놓는다.

북한 종업원: 식초랑 겨자 넣어드릴까요?

나: (북한 사람들도 식초랑 겨자를 넣어먹네??? 슴슴한 맛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조금 먹다가 저희가 넣어서 먹을게요.

북한 종업원: 먹을 줄 아십니다.


우리네랑 똑같은 식성을 가졌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냉면의 본고장 사람에게 먹을 줄 안다고 칭찬도 받아서 기분이 좋기도 하다.

(물론 영업적인 멘트였겠지만)


신기한 것은 냉면에 기름이 둥둥 떠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맛도 살짝 기름지고 오래 먹으니 느끼함이 올라왔다.

왜 김치를 시키라고 추천한 건지 알 것 같았다.







만두도 맛있었지만 저 연근 요리가 제일 맛있었다.

아니다. 김치가 제일 맛있었다.

한 병에 한국 돈으로 1만 7천500원이나 하는 대동강 맥주도 해치웠다.

그리고 음식 값은 총 1,590,000동.

한화 약 8만 원 정도 나왔다.


한국에서도 2명에 8만 원이면 거하게 먹는 건데

베트남에서 이 가격이라니.

게다가 북한에서 8만 원은 더 어마어마한 돈일 텐데.

대체 얼마를 남겨먹는 것인지...

이게 다 정은이 주머니로 들어가겠지?

라고 생각하니 반국가적 행위를 저지르는 것 같아 조금 양심에 거슬렸지만 

잡혀가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고 먹기로 했다.






조금 먹다가 친구가 다른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나는 잘 몰랐는데 구독자가 몇십만이나 되는 유명한 유튜버라고 했다.

종업원은 그들과 구면인지 그쪽 테이블 앞에 서서 웃으면서 그들과 계속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그들은 영상을 찍고 있는 게 걸려서 제지를 당했다.

나는 혹시 그 유튜버가 몰래 촬영이나 녹음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계산할 때 종업원에게 조용히 말했다.

나: 저 테이블에 앉으신 손님, 굉장히 유명한 유튜버래요.(영상 찍힐지도 모르니까 제발 말조심해요!!)

북한 종업원: .....? 

역시나 종업원들은 그들의 정체를 모르는 것 같았다.

혹시나 말실수한 게 영상으로 찍혀 그들의 신변에 문제가 될까 봐 살짝 귀띔해주었는데

말조심하라는 나의 의중을 눈치채었을는지, 괜한 오지랖을 부린 건지 모르겠다.














에필로그: 이후 여행 내내 그들이 걱정되었던 나는 

그 유튜버의 영상이 올라오는지 계속 지켜보았고

한 달 정도 뒤에 베트남 여행기가 모두 끝나고 나서도 

고려식당 방문 영상은 올라오지 않은걸 보아 통편집된 걸로 판단.

드디어 두 발 뻗고 잤다는 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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