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에서 라오까이까지 인생 첫 야간침대열차 탑승기
인천에서 베트남 하노이에 도착한 첫날.
우리는 숙소를 예약하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잠시 하노이 구경을 하고 수상인형극도 보고 저녁에 고려식당에서 밥을 먹고 바로 사파행 야간침대열차에 탑승해서 이동하려 했기 때문이다.
나야 뭐 퇴사를 한 입장이니까 시간이 많지만
여름휴가가 주말 포함 4박5일 밖에 안 되는 친구의 입장에서는
하노이에서 사파까지 거리가 버스로 6시간 또는 기차로 8시간이나 걸리는 대장정이라 시간이 여유롭지 않았다. 그래서 시간도 아낄 겸, 숙소비도 아낄 겸, 기차의 낭만도 즐길 겸
여차저차하여 야간침대기차를 타기로 했다.
이름하야 '오리엔탈익스프레스'.
기차를 타고 하노이역에서 라오까이역까지 가서 라오까이에서 사파까지 버스를 또 타고 1시간 정도 더 가야 되는 여정이었다.
버스를 타면 시간도 더 적게 걸리고 사파까지 바로 직행할 수 있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시베리아횡단열차에 대한 로망을 품고 있던 기차러버는
첫 침대열차 탑승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기차는 한국에서 미리 공식홈페이지를 통해 밤 10시 기차를 예매했다.
약간의 사이트 수수료를 포함하여 4인실 침대칸 1층 2인 805,000동.
한화로 1인당 22,500원 정도.
예매 시 여권번호를 기입하면 티켓에 기재되어 나오는데
손가락에 오류가 있는 것인지 눈이 이상한 건지 몇 번이나 확인하고 입력했는데 친구 여권번호를 그만 잘못 입력하고 말았다.
"있잖아~ 내가 네 여권번호를 잘못 입력했는데 말이야.(파워당당)
혹시 승무원에게 걸려서 탑승 거부되면 알아서 버스 타고 와~"
예매자 정보가 수정이 안되고 티켓을 취소한 후 다시 예매해야 했기 때문에 귀찮았다.
장난기 있고 즉흥을 좋아하는 나는 1박2일의 낙오를 꿈꾸며 친구를 괴롭혔다.(나만 아니면 돼!!)
프로계획러이자 예약러버인 전형적인 ISTJ인 친구는 덕분에 열차 출발 전까지 걱정인형이 되어있어야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안내하는 승무원은 있었지만 기차표 검사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우리가 예약한 자리는 니스 칠한 어두운 나무로 된 엔틱한 침대칸이었고
4인실 침대 칸의 문을 열자마자 그 분위기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우와~~ 낭만 쩐다"
주황빛의 은은한 조명에 비친 테이블과 창가, 안락한 침대와 베개까지.
대학생 시절부터 꿈꿔오던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모습과 비슷했다.
서로 목적지가 다른 사람들과 잠시 동행을 하며 먹고, 자고, 얘기하고, 또 헤어지고...
그러한 인간 냄새나는 갬성에 환상을 품고 있어서일까.
이 낡은 열차에서 낭만이 느껴졌다.
자리에 짐정리를 하고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간식을 파시는 승무원이 다가왔다.
그녀에게 맥주 2캔과 물을 구입했다.
'그래. 맥주는 역시 이동수단에서 먹어야 제맛이지'
비행기에 이어서 기차에서도 맥주는 필수.
나란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KTX에서도 맥주를 마시는 닝겐이지.
독일맥주, 영국맥주 난 모르겠고,
이어폰을 꽂고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감상하며 마시는 맥주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맥주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위에 2층 침대 칸으로 들어올지 기대를 하며
맥주 캔을 딱 따는 순간.
북방계 몽골인 얼굴의 남자 1명이 들어왔다.
손에 고프로를 든 채.
우리는 말 한마디 한번 하지 않았지만 단번에 서로가 한국인임을 알아챘다.
왠지 모르게 손에 든 고프로가 100% 한국인일 거라는 확신을 들게 했다.(빠니보틀의 영향 때문인가)
그리고 그 어색한 공기의 흐름을 타고
그는 조용히 2층으로 올라간 뒤 다음 날 아침까지 내려오지 않았다....
낯선이와 수다를 기대했던 나도 맥주를 급하게 들이붓고 빨리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여기까지 와서 한국인이라니.
역시... 열차의 낭만은 아무에게나 오는 게 아니야.'
열차 탑승기 유튜브 각을 기대했던 그분도 나를 보고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하노이에서 사파 가는 사람 중 기차를 선택하고
그 많은 기차 중 나와 같은 10시 기차를 타는데
또 그 무수한 기차칸 중에서 같은 칸을 예약한 사람이 한국인일 확률.
얼마나 될까?
이건 인연이다!!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극 I인 나는 말 붙일 용기 따윈 없었기 때문에 빨리 씻고 그냥 자기로 한다.
간단히 세수, 양치만 하러 복도에 있는 세면대로 나왔다가
옆칸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하고 싶어졌다.
신기하게도 열차가 칸마다 운영하는 회사가 다르다고 들었기 때문에
뭐가 다른지 보려고 옆칸으로 넘어간 순간.
하얀 철제 벽면으로 된 복도와 깔끔한 세면대, 화장실을 보고야 말았다.
우리 칸은 청소도 잘 안 해놨는지 세면대조차 지저분했는데
같은 가격에 이런 청결함이라니.
조금 전의 낭만은 어디로 가고 복불복의 당첨에서 패배한 나 자신의 운빨에
납득이라도 한 듯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역시나 내가....
원효대사 해골물이라고 좀 전까지 엔틱하다고 느꼈던 우리 칸 침실이 그저 노후되어 보였다.
그리곤 몰래 들어온 도둑고양이처럼 나는
우리 칸의 세면대를 이용하지 않고 다음 날 아침 세면까지도 옆칸 세면대를 이용했다.
덜커덩 거리는 기차 안에서 생각보다 꿀잠을 잤다.
새벽이 되어 해가 서늘하게 밝아오자 자연스럽게 잠에서 깨었다.
고지대로 유명한 사파가 가까워진 건지 침대에 누워있는 몸이 벽면으로 쏠리는 게
오르막 길을 오르는 기차의 경사가 느껴졌다.
오르막 길이 힘겨운지 기차는 자전거가 달리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긴 몸을 끌고 올라가고 있었고
나는 창문을 열어 시원한 공기를 마셨다.
이 열차의 낭만은 동이 트고 나서부터 진정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