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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굴레 05화

겨울바다

by 슬기

나는 이따금 또 아파서 무너졌다. 무너지는 날이 많아 질 수록, 나는 동제에게 건네는 말이 적어졌다. 동제는 여전히 나를 데리고 바다로, 숲으로, 안락한 집으로 떠나갔다. 책을 가져오기도, 꽃다발을 안겨주기도 했다. 나는 출근을 하지 않는 주말에도 노트북을 켜서 업무에 필요한 자료를 만들었고 K의 요구 사항에 응답하느라 핸드폰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동제가 만들어준 바다, 숲, 그 어느 여행지의 커피숍에서도 나는 일을 했다.


한동제는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와 변함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의 낯빛엔 어둠만이 가득했다. 어두컴컴하게 깊어지는 나의 병은 그의 사랑을 읽지 못하게 만들었다. 처음 그의 손을 잡고, 이대로 행복해도 괜찮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던 속마음이 점차 발과 손을 묶어왔다. 내가 만든 결박은 동제가 주는 안락과 어울리지 않았고,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대하는 내 모습이 싫어졌다. 그리고 끝없이 미안했다. 말없이 굵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한동제를 쳐다보기 어려운 날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을 한동제가 대신 해결해줄 수도 없었다. 숨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그의 품은 여전히 내 눈 앞에 있는데, 옷깃에 깃든 감정의 정체는 미소가 아닌 슬픔이었다.


동제는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말 없이 나를 보았다. 네 눈엔 이런 나도 여전히 예뻐보이니, 묻고 싶었지만 아마 너는, 우는 나를 보는게 행복하진 않을거라며 결론지었다. 봄에 만나, 여름을 지나, 가을이 드리워지고 눈이 내리던 겨울이 왔다. 싱그러웠던 튤립 향기가 생각난다. 싱그러웠던 동제의 입꼬리가 생각난다. 동제는 행복해야 하는데 나의 굴레로 생긴 어려움에 같이 힘겨워하고 있었다. 내가 한동제를 지켜야 한다면, 그 방법은 무엇일까.


“나 이번주에 혼자 바다를 보고 올게.”

“응. 조심히 잘 다녀와. 무슨일 있으면 꼭 얘기해.”


혼자 다녀오겠다는 마음에 토를 달지 않고, 잘 다녀오라고 대답하는 동제를 뒤로 하고 기차에 올랐다. 창가로 지나가는 광경에 동공을 두며, 철커덕 소리를 내며 제 길을 가는 기차에서 바다의 쓸모를 생각했다. 왜 나는 혼자 바다를 보고 오겠다고 말했을까. 바다를 보고, 해변을 하릴없이 걷고, 왔던 길을 여러번 오고 가면 나는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역에 내려 바다로 향할 때마다 도시를 뒤덮은 짠내가 코를 찔렀다. 얼마가지 않은 곳에, 동제와 함께 왔던 바다가 보였다. 신발을 벗고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모래 위에 오르락 내리락, 파도는 하얀 거품을 만들며 내 발을 적셨다. 차갑고 아프다. 파도의 차가운 물성, 내 살갗에 닿이는 부피가 너무나 아프게 느껴진다. 혹시, 동제도 이렇게 아픈 것일까. 그에게 내가, 올라오는 파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파도가 피부에 닿을 때마다 아프지만서도, 그저 파도를 좋아하기 때문에 맞이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왜 나의 결심이, 나의 운명이, 나의 끝없는 삶이, 내 스스로의 눈을 멀게 하여 사랑을 만지지 못하게 하고 있을까. 지나온 궤적을 받아들이고 더 나은 삶을 향해 일과 삶을 멈추지 않으리라 다짐한 그때의 나는, 이런 장면을 보기 위해 온 것은 결코 아니었는데….한동제가 채워주지 못하는 나의 심연을 그에게 이해해달라 요구할 수 없고, 내 안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나의 동제는 아파선 안돼. 나로 인해 동제가 불행해선 안돼. 나의 끝없는 어둠을 동제에게 보여서는 안돼. 이 어둠은 오로지 나의 책임. 내 몫에서 끝내야, 동제의 행복을 지킬 수 있어.

달, 그러니까 나는 밤에 떠있 것이고.

동제, 태양은 낮에 있는거지. 동제 곁에는 그에게 어울리는 밝고 강한 빛이 어울릴지도 몰라.’



얼어버린 발 위로 우두커니 서서 눈이 내릴 것 같은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지평선 아래, 깊은 수심으로 들어가 쉬고 싶었다. 쉬이 떠오르지 않을 아주 깊은 곳으로. 해저 깊은 곳,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심해까지. 지금 나는 이렇게, 발버둥을 쳐도 올라가지 못하고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만 가는 길에 서 있다. 나는 한기에 저항없이 굳어갔다. 깊은 수심 아래에 뛰는 심장을 묻어야 했다.


떠나가기로 했다.


못나디 못난, 사랑에 아둔하여 용기가 없는,

힘없는 나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떠나는 것이다.

그 날, 겨울 바다에 내려두고 온 것은 한동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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