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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주려는 마음과 지배하려는 마음

20251004

by 빨간우산

이 두 가지는 비슷한 말과 행동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대부분은 전자보다 후자인 경우가 허다하다. 더 정확히는 말과 행동을 하는 주체는 도와주려는 마음이라고 생각하지만, 받는 입장에서는 그것이 도움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경우다.


이런 사례는 우리가 살면서 아주 많이 경험하곤 한다. 특히나 자의식 과잉과 나르시시즘이 횡횡하는 요즘의 시대에는 더 빈번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 타인을 도와주려는 말과 행동이 밖으로 나오려 할 때, 한번 더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정말로 타인을 도와주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상대를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 둘은 비슷한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며, 심지어 그 행위의 주체도 헷갈려하지만, 엄연히 아주 다른, 정 반대에 가까운 마음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그런 행위를 당하는 당사자들은 그 두 가지 마음의 차이를 생각보다 잘 느낀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풀었는데 그것이 호의로 되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면, 상처받으며 타인을 원망하기보다는 잘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혹시 내가 호의를 빌미로 타인을 지배하거나 통제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을 구별하는 기준은 아주 간단하다. 도움을 받는 당사자가 도움을 요청했는가 그렇지 않은가이다. 도움이나 조언을 구하지도 않았는데, 누군가 '이렇게 해야 한다', '왜 저렇게 하지 않느냐' 혹은 '내가 도와주겠다', '내가 말하는 방법대로 해봐라'라고 한다면 이건 그야말로 지배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말이다. 물론, 말하는 주체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너는 분명 내 도움이 필요해', '내 도움을 받는 것이 너에게도 좋은 일이야'라고 말이다.


인간은 본래 자신의 말과 행동을 '선의'로 포장하는데 아주 탁월한 본능과 재능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그것을 '포장'이 아닌 '사실'로 착각하는 경우도 허다하다(대부분일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세상에는 그토록 악행이 넘쳐나고 모든 이가 그것을 비난하는데, 정작 아무도 '내가 그 악행을 한다'라고 얘기하지 않는 아이러니 속에 감춰진 비밀일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은 항상 선한 의도로 행동을 하는데, 다른 사람들만 악한 행동을 일삼는다며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이모냥 이 꼴일 수밖에 없다고 한탄한다. 그리고 세상이 이토록 악한 이유에 본인은 전혀 포함시키지 않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한다. 아마도 그것은 정말로 내가 항상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말과 행동은 항상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다고 포장하는 생각의 습관 때문일 것이다. 때론 악행을 일삼는 범죄자조차도 자신의 행동이 악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자인하는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데, 어쩌면 그 범죄자의 말 또한 그러한 생각의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기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본다면, 어쩌면 어떤 행위의 동기란 선과 악이라는 단순하고 분명한 개념으로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심에까지 이르러볼 수 있다. 남을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마음을 '악'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구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런 마음은 아주 사소한 데서도 드러나곤 한다. 이를테면 남의 바둑에 훈수를 두는 말은 도와주려는 마음보다는 그를 통제하여 이기려는 나의 승부욕을 해소하고자 하는 욕심의 발로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악한 것'이라고 하기엔 뭔가 너무 억울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선과 악에 대한 논쟁은 좀 더 심도 깊은 사유를 요하므로 일단은 여기서 생략...)


어쨌든, 상대가 요청하지도 않은 도움을 굳이 주겠다고 나서서 소위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명백히 도움이 아닌 지배의 마음이다. 좋게 말하자면, 상대를 통제해서 좀 더 나은 결과를 이끌어내려 하는 (나의) 욕심이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상대를 통제함으로써 내가 상대보다 우위에 있음을 증명하고 확인하려는 지배의 욕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속내는 상대의 어떤 행위를 통해서 여실히 밖으로 드러나곤 하는데, 그러니까 도움을 받아야 하는 당사자가 도움을 주려는(지배를 하려는) 주체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거나, 거절하거나, 무시할 경우이다. 만약 그 주체가 도움을 주려는 마음이 본질적이었다면, 상대가 도움을 받지 않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도움을 준다는 것은 상대가 더 나은 상태가 되길 바라는 마음일 텐데, 그런 상태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그것은 안타까운 일인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그 주체는 화를 내거나 빈정 상해하거나 삐지거나 하는 행태를 보인다. 그러니까 상대의 상태가 나아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말을 듣지 않았다'는 그 사실이 더 중요한 것이다. 즉 '왜 내 말을 듣지 않지?', '내 말은 옳은데', 혹은 '내가 도와주려는 마음은 선한 것인데'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여기서도 자신의 선한 의도에 대한 포장은 계속된다). 이런 생각들에서 중요한 것은 '나'이지, 상대의 마음이나 상태가 아니라는 점에서, 주체의 행위는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상대의 입장이나 마음은 중요하지 않고, 상대 또한 한 사람의 주체라는 존중은 당연히 결여되어 있다. 결국 내가 너를 통제하고 지배하려 했는데 그것이 실패로 돌아간 것에 대한 낭패감과 좌절감이 자극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도움이 못 된 것이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지배하지 못한 데 대한 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지배하려는 마음과 도움을 주려는 마음의 차이는 다른 데서도 드러난다. 전자는 '내가' 지배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처한 상황이나 상대의 필요에 대해서 세심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령 누군가 버스를 기다리는데 차를 태워주겠다고 성급하게 나서서 그를 태우려 드는 행위는 상대방이 정말로 버스를 기다리는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것인지, 혹은 그냥 버스 정류장에서 생각을 좀 하고 싶은 것인지 등의 상황을 세심하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지 않는다. 그저 '내가 너를 이만큼 도와주려 한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 혹은 '내가 도와줌으로써 나의 도움에 상대를 종속시키려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에 그런 세심한 생각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반대로 도와주려는 마음이 앞서는 경우에는, 상대가 도움이 필요한지,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혹은 나를 도와주는 이로 승인할 지에 대한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 즉 상대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 묻는 절차를 거칠 것이다. 왜냐하면 도와주려는 마음은 상대의 입장을 살피는 마음이며, 상대의 입장을 살핀다는 것은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상대의 필요와 상황을 헤아리지 않고, 즉 존중하지 않고 나의 도움만을 강조하고 강요하는 마음과는 매우 다른 마음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례를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빈번하게 접하곤 한다.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지배하려는 마음인지 도와주려는 마음인지 헷갈릴 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소한 말 한마디, 별 것 아닌 행동이라면,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두 가지 마음은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즉 도와주려는 마음은 상대를 따뜻하게 하지만, 지배하려는 마음은 상대를 기분 상하게 하고 때론 상처를 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두 가지 마음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두 가지를 구분하다 보면, 우리는 그것이 일상생활에서 아주아주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그리고 도움을 주려는 행위가 알고 보면 지배하고 통제하고 간섭하려는 마음의 발로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건 아주 슬픈 일이지만, 또 한편으론 이 험한 세상에서 한 사람의 주체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익혀야 하는 감각이기도 할 것이다. 특히나 요즘처럼, 자의식 과잉과 자기 중심주의가 만연한 시대라면 더더욱 말이다.


최근에는 지배하려는 마음을 아주 전략적으로 교묘하게 사용하여 그야말로 상대의 마음과 행동을 지배하여 본인이 원하는 방향대로 상대를 통제하는 심리적 방법에 대한 용어가 유행하기도 한다. 바로 '가스라이팅'이다. 가스라이팅은 전형적으로 상대를 지배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행위이며, 그것이 매우 적극적이고 전략적으로 사용된다는 측면에서 매우 위험하다. 게다가 가스라이터들은 심리적으로 약한 상태에 처한 상대만을 골라서 손쉽게 자신의 통제권을 실현한다는 데서 매우 위험하다(이건 거의 범죄 수준에 가까운 행위라 할 수 있다). 이런 무방비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란, 대개 미성년자라던가, 어떤 집단 내에서 권력을 전혀 가지지 못한 자라던가, 절실히 무언가가 필요한 상태에 놓인 약자들이고, 그런 약자들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 있어서 가스라이터들은 악랄하고 위험하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자의식 과잉과 자기 중심주의가 범람하는 요즘의 시대엔 소시오패스와 더불어 가스라이터 유형의 사람들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우려가 크다. 그리고 굳이 소시오패스나 가스라이팅과 같은 용어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그리고 그런 유형의 정신병리학적 문제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가스라이팅에 준하는, 사소하더라도 상대를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말과 행동이 매우 증가하고 있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쉽게 체감할 수 있다.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예전의 한국사회는 이러한 자기중심적 심리에서 비롯되는,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마음이 일상적으로 문제가 될 만큼 크지 않았었다(물론, 그런 사람들은 항상 있어왔겠지만). 공동체와 집단, 예의와 규범을 중시하는 한국사회의 집단 문화가 그러한 마음과 행위를 분출하지 못하도록 제어하는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집단 문화에 따른 폐해도 당연히 있었겠지만). 하지만 요즘은 모든 개인이 자기중심적 심리를 갖도록 조장하는 문화에 노출되어 있다. 습관적으로 보는 SNS와 유튜브를 통해서도 이러한 심리는 가속화되고 가중된다.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타인의 비매너와 비존중, 이를 넘어 타인의 통제와 간섭, 침범과 비난에 노출되기가 쉽다. 때문에 우리는 내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누군가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나서서 이런저런 말을 쏟아낼 때는, 잘 살펴보고 경계할 필요가 있다. 우선 그의 눈빛을 보고 그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되, 그의 도움을 우선 거절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고 나서 그의 반응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그의 도움이 진정한 도움인지, 혹은 지배의 제스처인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가 나의 거절에 대해 분개하고 화를 내고 있다면 말이다.


나에게 친절과 도움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경계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냥 말과 행동을 그대로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한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관계, 따뜻한 마음의 나눔이 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사람은 그렇지만은 않다. 산다는 건, 타인과 관계한다는 건,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며, 사람은 우주와 같아서 아주아주 복잡한 동물이므로(스스로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를 정도로), 조심힐 필요가 있는 것이다.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 나의 안위와 주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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