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원, 그 시작과 끝
대학 졸업을 앞둔 20대 중반. 대단한 서비스 정신을 갖고 지원한 것도 아니었고, 하늘 위의 수호자가 되리라는 사명감을 갖고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대학시절을 이렇다 할 만한 경험 없이 헐렁하게 보냈으니 이력서가 빵빵할리 만무했다. 동기들은 모두 대기업에 취직할 텐데 자존심만 세서 노력하지도 않아놓고 뒤쳐지고 싶지도 않았다.
자연스레 구직공고에서 ‘전공무관’만 찾았다. 엄친딸이 승무원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온 것도 나의 결심에 불을 지폈다. 내가 가진건 딱 두 가지, 나쁘지 않은 말발과 나쁘지 않았던 어학실력. 승무원이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승무원만이 답이었다. 승무원이 아니면 이 세상에서 내가 밥벌이 해 먹고 살 일이 없을 수도 있겠다는 어린 시절 엄습한 불안감은 나를 승무원으로 빠르게 이끌었다.
막상 승무원이 되야겠다 생각하니 그 직업이 더없이 빛나 보였다. 멋있는 유니폼, 깔끔한 외모, 환한 미소, 이번 주는 뉴욕에서, 다음 주는 파리에서 아침을 맞는 생활. 입시를 준비하는 고3 마냥 치열하게 승무원을 준비했고 결국 승무원이 되었다.
그러나 직업에 대한 깊은 고찰이 부재했던 탓일까. 나는 결국 사표를 냈다.
멋있는 유니폼은 비행이 끝나면 반지가 벗겨지지 않을 정도로 온 몸을 붓게 만들었고 깔끔한 어피어런스를 위한 두꺼운 메이크업은 건조한 기내 환경 탓에 매일같이 피부과를 드나들게 했다. 이비인후과, 정형외과 단골손님이 되었다. 해외 체류를 할 때면 투어는커녕 호텔에서 피로를 풀기도 부족했다. 살기 위해 호텔 피트니스를 찾을 정도였으니 승무원으로 근무하며 골병이 났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믈론 모든 승무원이 그렇진 않다. 비행이 끝나고도 부지런히 투어를 다닐 만큼 체력이 남는 동료들도 많았다. 반면 나는 어릴 적부터 체력이 약했고 더군다나 대학시절 3학기를 휴학할 정도로 크게 교통사고가 난 탓에 일반 사람들보다 면역력도 약했다. 승무원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자질 하나만 뽑는다면 많은 승무원들이 1순위로 체력을 꼽을 거다. 나는 알맹이도 없이 번지르르한 껍질만 입곤 그 힘든 일을 하려고 했다.
승무원 시절이 고되었던 것은 맞지만 그만큼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이기도 했다. 승무원으로 일하면서 천차만별의 사람들을 만났는데, 폭넓은 스펙트럼의 사람들은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나에게 인간관계를 보는 시야를 대폭 넓혀줬다. 눈치도 빨라졌고 겸손함도 생겼다. 체력적으로 너무나 힘들었지만 사람과 어우러지며 느낀 너무나 많은 감정들은 아직도 그립다. 여전히 잊지 못할 손님들이 많다. 동료애도 그립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동료들과 이토록 끈끈해질 수 있는 직업이 몇이나 될까. 승무원이 위계질서가 강하다곤 하지만 대한민국 그 어떤 회사를 가도 그 정도 위계질서는 있다. 승무원도 비슷하다. 좋은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오히려 함께 먹고 자고 일하면서 동료 그 이상이 된다.
마지막 비행은 휴스턴이었다. 휴스턴은 뉴욕, 파리 같은 인기 노선이 아니라 데일리로 운항되지 않는다. 휴스턴에서 체류하는 시간이 길다는 뜻. 4박 5일 휴스턴 스케줄 동안 나는 호텔방에서 잠도 자지
않고 참 많이도 울었다. 남보다 못한 체력을 원망했고, 그렇다면 왜 남보다 더 많이 노력하지 못하나 스스로를 탓했다. 승무원을 준비하던 시절만큼 더 큰 열정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까 막막도 했다. 마지막 비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피부 건조증 탓에 피부과를 찾았다. 그날 밤새도록 멈추지 않는 눈물 때문에 피부는 타들어가듯 더 간지러웠지만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승무원을 그만두고 지금은 승무원이 되려는 친구들을 돕는 일을 한다. 승무원은 꿈같은 직업이 아니니 오래, 행복하게 일하고 싶다면 각오를 단단히 가져야 한다는 말로 늘 코칭을 시작한다.
나는 왜 승무원이 되었을까. 승무원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나는 20대 청춘, 아무 생각 없이 시작했지만 가슴 미어지는 이별로 끝난 연애가 떠오른다. 뜨거웠던 승무원 시절은 나를 참 많이도 바꿔놓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