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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요하게 사랑하기

제가 왜 시를 쓰냐면요, 그게 그러니까, 제 말 좀 들어주실래요?

by 은목


"한 가지만 말해줄게요. 상대방은 내가 한 말을 잊을 수 있어요. 10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말을 해야 해요"

월요일 합평에서 선생님은 내가 쓴 시를 읽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개인 과제도 내주셨다. 그건 내가 봐도 생각은 없고 감정만 흐트러놓은 글이었고, 그러니까 충분히 고민하지 않고 내놓은 문장의 모음이었고, 선생님은 정확히 그 지점을 꼬집은 것이다. 꼬집히면 아프고 정신이 든다. 정신이 좀 차려지는 것 같다. 얼얼한 자국을 문지르며 뭘 잘못했는지 천천히 복기하게 된다. 내가. 뭘. 어떻게. 잘못했는지. 굳이 따지면 '잘못'한 게 아니라 '잘 못'한 것에 가까울 것이다.


왜 시에 그런 말을 썼냐면 그땐 그런 말을 하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고, 그 말을 왜 꼭 '시'로 해야 했냐고 물으면 그것은 대답할 수 없다. 남들에게 설명할 만한 이유가 진짜로 없기 때문이다. 시를 제출해야 했고 마침 그 당시에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이게 패착이다. 나는 시가 뭔지 모르고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른다. 언젠간 알게 될 줄 알고 그냥 계속 했다. 어쩌다 한 번씩 내가 나여서 쓸 수 있는 문장을 발견하는 게 재밌었다. 근데 그런 건 일기나 편지를 적을 때, 하다 못해 기사를 작성할 때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시냐면...... 좋아하는 시인들을 따라해보고 싶었다. 그 사람들처럼 말하고 싶었다. 세상엔 맛있는 음식을 발견하면 레시피를 추리해보며 직접 요리를 시도하는 장금이 같은 사람이 있고 "음~ 맛있다~ 마트 다녀오셨어요?" 하는 '하이킥' 박해미 같은 사람이 있다. 시에 있어서 나는 전자였다.


그러나 나는 시를 너무나 게으르게 사랑했다. 게으르고 느슨하게 사랑해서 엉망인 상태로 오래 지속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시뿐만 아니라 뭐든 대충 때우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친구들이 나한테 갓생 산다는 말을 많이 해주는데, 내가 갓생러처럼 보이는 이유는 다 깔짝거리기 때문이다. 뭐 하나를 집요하게 하지 못하고. 이만하면 됐다, 하고 쉽게 늘어지고. 이게 난데 뭐 어떡하라고, 하면 그것마저 게으른 마음가짐이다. 이걸 탈피하기 위해서는 내면에 집중해야 하고 집요하게 사랑해야 한다. '잘' 읽고 '잘' 써야 한다. 그냥 하지 말고.


이승우 작가는 '고요한 읽기'에서 "고백은 벌거벗는 것이 아니라 벌거벗겨지는 것임을 우리는 안다. 능동의 형태를 띤 이 동사 '고백하다'에 자발적인 성격은 거의 없다. 고백하는 사람은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사람이다. 우리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기까지 고백하지 않는다. 고백은 어렵고, 거의 불가능하고, 그러므로 일단 행해진 고백은 천하만한 무게를 지닌다.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지 않은 사람이 하는 고백, 이른바 자발적인 고백에는 자랑의 성격이 섞여있을 것이다.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 자랑이다. 자랑하기 위해 고백할 수 없다. 어떤 고백도 자랑이 될 수 없다"고 썼다. 이 꼭지 읽고 이 글을 썼다. 고백해야 해서. 그렇게 해야만 했기 때문에. 이건 자아비판문이자 일기이자 시에 대한 고백이며 시를 써야만 이유를 항변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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