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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시간 Aug 13. 2024

파이돈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그가 벗들과 나눈 마지막 철학적 대화

‘유럽 철학의 전통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라는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플라톤의 사상과 철학은 서양사상의 뿌리이자 서양 문화의 지적 성취들의 모태가 되었다. 특히 풍성하고 심오한 철학적 문제의식이 담겨있고 생동감 넘치는 대화형식으로 쓰여 있는 플라톤의 작품들은 철학의 고전이자 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작으로 손꼽힌다.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한 인간의 죽음의 방식과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는 그의 영예를 불멸의 것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로 간주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아름다운 죽음으로 성취하는『파이돈』은 플라톤의 다른 작품들과도 비교할 수 없이 특별하다. 소크라테스는 『파이돈』을 통해서 스토아철학자들에게는 스토아적 현인의 모델이 되었으며 기독교가 지배하던 시대에는 철학적 순교자의 원형이 되었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은 보통 저술 시기에 따라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되는데 『파이돈』은 중기에 속하는 작품으로 간주된다. 그 이유는 그 속에서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넘어서는 플라톤 본인의 독자적 철학이 나타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상기설, 가정의 방법, 그리고 이데아론을 들 수 있다. 『파이돈』은 플라톤의 다른 어떤 대화편보다 종교적 색채가 강한 작품이다. 그 예는 몸이 영혼의 감옥이라는 생각, 육체적인 욕망에 대한 비판과 거부, 영혼의 정화, 상기와 연결된 윤회사상, 사후세계에서 일어나는 죽은 자의 심판과 그에 따르는 보상과 처벌 등등이다. 학자들은 이런 특징을 상당 부분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향으로 돌린다. 소크라테스의 주된 대화 상대자인 케베스와 심미아스, 그리고 파이돈의 대화상대자인 에케크라테스가 피타고라스학파였다는 점, 그리고 플라톤이 작품의 배경을 피타고라스학파가 활발히 활동하던 플레이우스로 설정했다는 점이 그 영향의 증거로 볼 수 있다.


<등장인물>

· 파이돈: 소크라테스가 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벗들과 나눈 철학적 대화를 전하는 인물

· 에케크라테스: 파이돈과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인물

· 심미아스와 케베스: 감옥에서 소크라테스와 철학적  논의를 나누는 인물


* ( )속 번호는 플라톤 저작을 인용하는 표준 판본인 '스테파누스'판본의 단락과 쪽 번호이다.


<작품 내용 구분>


1. 도입부(57a~61c)

『파이돈』은 일종의 액자구조를 가지는 대화편으로, 파이돈이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궁금해하는 에케크라테스에게 소크라테스의 사형집행일까지의 상황을 전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 기간 동안 소크라테스는 매일 방문한 벗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시간을 보낸다. 테세우스를 기념하기 위해 델로스로 보내는 사절단 파견 시기에는 누구도 공적으로 죽이지 않는 법으로 인해 소크라테스의 사형 집행일이 늦어졌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2. 철학자와 죽음(61c~69e)

본격적인 철학적 토론은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죽음을 태연히 맞이해야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의 근거를 설명해 달라는 케베스와 심미아스의 요구에서 시작된다.


1) 자살의 허용 여부에 관한 논의(61c~63e)

신은 우리를 돌보는 자이고 인간은 신의 소유물 중 하나다. 자신의 소유물 중 어떤 것이 신의 허락 없이 자기 자신을 죽이면 신이 화를 내고 벌을 내릴 것이므로 자기 자신을 죽여서는 안 된다.


2) 철학자가 죽음을 기꺼이 맞이한다는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변론(63e~69e)

참된 철학자는 몸보다 영혼을 중요하게 여긴다. 몸을 통해서는 모든 것들의 존재에 대한 최상의 진실이 관찰되지 않으므로 참된 철학자라면 몸을 통한 즐거움을 하찮게 여기고 영혼이 진리를 포착하기 위해서 가능한 몸과 영혼을 최대한 분리해야 한다. 가변적인 몸으로부터 영혼이 해방되는 죽음을 열망하는 건 올바르게 철학하는 사람들뿐이다. 정화는 최대한 몸으로부터 영혼이 분리되어 모든 면에서 가능한 오직 그 자체로만 살아가도록 길들이는 것으로 철학자들이 수행하는 것이다. 참된 존재들에 대한 앎을 추구하는 철학자들은 이러한 죽음의 상태를 추구하고 열망하기에 죽음을 기꺼이 맞이한다. 철학자들이 죽음을 태연하게 맞이하는 이유는 그러한 영혼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게 될 것에 대한 기대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3. 영혼 불멸에 대한 논증들(69e~107b)

철학자가 죽음을 태연히 맞이할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에는 죽은 다음에도 영혼이 소멸하지 않고 계속 존재함을 전제한다. 이러한 전제에 대한 반론과 해명에 대한 논증으로 이야기가 구성된다.


(1) 순환논증((69e~72e)

영혼불멸에 관한 첫 번째 논변은 변화에 관한 일반법칙을 근거로 하고 있다. x가 F라는 속성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리고 F에 반대되는 속성 –F가 존재한다면, F를 가지게 됨이라는 변화는 –F로부터의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는 양방향으로 균형 있게 일어나야만 한다. 즉 F로부터 –F로의 변화는 반드시 –F로부터 F로의 변화와 균형을 이루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두 반대한 중 한쪽의 성질을 지니게 되어 더 이상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하데스에 있다가 다시 태어난다는 이야기가 있다. 반대되는 것들은 그것들에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필연적이다. 예를 들어 반대되는 쌍 사이에는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의 생겨남과 다시 역으로 후자에서 전자로의 생겨남이 있다. 살아있는 것으로부터 죽은 것이 생겨나고 죽은 것들로부터 살아 있는 자들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산자들이 죽은 자들로부터 생겨나기 위해서는 죽은 자들의 영혼이 몸과 결합하기 전에 이미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영혼은 하데스에 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2) 상기논증(72e~77a)

상기논증은 『파이돈』의 영혼 불멸 논증들 중에서 특히 유명하고 논란이 많은 논증이다. 만일 누군가가 어떤 것을 보고 듣거나 다른 감각지각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것 자체만을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지식이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것을 떠올린다면, 그는 그 관념의 대상을 상기한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알고 있던 것을 태어나면서 잊어버렸지만, 나중에 감각들을 사용해 그 이전에 언젠가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지식들을 다시 얻게 된다면, 우리가 알게 됨이라 부르는 것은 제 것이었던 지식을 다시 얻는 것이고 이것이 상기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파이돈』에서의 상기는 감각적인 같은 것들에 대한 개별적 지각과 구분되는 같음이라는 일반개념의 형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정상적인 이성능력을 지닌 사람은 감각적인 대상들을 지각할 때, 단순히 개별적인 지각의 단계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 생각할 수 있게 해 주는 개념들을 형성하고 이것들을 개별 사례에 적용해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같음이라는 일반개념을 형성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들에 대한 앎은 감각적 대상들에 대한 지각으로 환원되어 설명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파이돈』에서의 상기는 감각적 개별자들에 대한 지각으로부터 보편적 개념으로 도약해 가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상기를 통해 얻어진 같음에 대한 앎은, 말하자면 ‘같음’의 의미에 대한 이해로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상기를 통해 얻어지는 앎은 이러한 일반개념의 의미에 관한 일상적인 앎이다.


하지만 전통적 해석에 도전하는 다른 해석이 등장한다. 『파이돈』에서의 상기는 일상적인 경험판단에 적용되는 일반개념에 대한 이해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새로운 해석은 그다음 단계 즉 같음의 이데아에 대한 철학적인 앎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파이돈』에서의 상기는 보통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게 되는 앎이 아니라, 소수의 철학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고도의 전문적인 앎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이 된다. 이 새로운 해석의 논거 중 하나는 『파이돈』에서의 상기가 결국 이데아를 상기하는 것이고, 이데아는 보통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지식을 얻게 되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해석은 상기 논증이 인간 일반의 영혼이 아닌, 소수의 철학자의 영혼에만 적용되는 논증으로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만일 상기가 인간 전체가 아닌 소수의 철학자들에게만 가능한 사건이라면, 상기논증은 그 소수의 철학자들의 영혼이 태어나기 전에 존재함만을 증명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런 결론은 『파이돈』 전체에 걸친 플라톤의 관심사와는 부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3) 심미아스와 케베스의 반론(77a~78b)

심미아스와 케베스는 상기논증이 영혼이 태어나기 전에 존재함만을 증명했을 뿐 죽고 난 다음에도 존재함은 증명하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4) 유사성 논증(78b~84b)

유사성 논증은 심미아스와 케베스의 반론에 담긴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논증이다. 본성상 결합체인 것은 그것이 결합된 바로 그 방식으로 해체되어 흩어지고 비결합적이라면 해체되지 않는다. 항상 같은 식이며 그대로 있는 것들은 비결합적이고, 그때그때 다르고 결코 같은 식으로 있지 않는 것들은 결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존재자체는 항상 그대로 같은 식으로 있으며 늘 같은 식으로 있는 것들은 사고를 통한 추론 외의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 파악할 수 없고 비가시적이다. 비가시적인 것은 항상 같은 식으로 있는 것이고 보이는 것은 결코 같은 식으로 있지 않는 것이다. 몸은 보이는 것과 유사하고 영혼은 비가시적인 것과 유사하다. 영혼이 어떤 것을 탐구하면서 몸을 이용할 때에는 같은 식으로 있지 않은 것들에 이끌려가고 그런 것들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혼란스러워하고 어지러워한다. 반면 영혼이 그것 자체로 탐구할 때에는 순수하고 항상 같은 식이고, 불사적이며 그대로 있는 것들에게로 떠나가서, 자신이 그것과 한 종류이기 때문에 늘 그것과 함께 있게 된다. 영혼의 이러한 상태가 현명함이다. 신적인 것은 본성상 지배하고 이끄는 반면, 사멸하는 것은 지배받고 종노릇을 한다. 신적이고 불사하며 가지적이고 해체되지 않고 늘 그 자체로 같게 있는 것과 유사한 것은 영혼이고, 인간적이고 사멸하고 비가지적이고 여러 모습으로 해체되고  결코 그 자체로 자신과 같게 있지 못하는 것과 유사한 것은 몸이다. 영혼이 순수한 상태로 몸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사는 동안 자발적으로 절대로 몸과 함께 지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피하며,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로 결집시켜 늘 이것을 수행하는 올바른 철학을 해야 한다. 이것이 태연히 죽기 위해 수행한 것이며 죽음의 수행이다. 이러한 영혼은 자신과 유사한 신적이고 불사이며 현명한 것에게로 가게 되는데 그곳에 이르게 되면 행복이 주어지고 방황, 무지, 공포, 거친 욕망, 그리고 그 밖의 나쁜 인간사들로부터 해방되며 남은 시간을 진정으로 신들과 함께 보내게 된다. 신들의 부류로의 도달은 지혜를 사랑하지 않고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채 떠나는 사람에게는 허용되지 않고, 오직 앎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허용된다.


(5) 심미아스의 반론: 조화로서의 영혼(84c~86e)

우리의 몸이 뜨거움과 차가움, 마름과 축축함 같은 것들이 팽팽한 상태로 결속되어 있듯이 이러한 혼합과 조화가 우리의 영혼이다. 마치 뤼라가 특정한 방식으로 조율되었을 때 조화가 생겨나는 것처럼 몸 또한 특정한 상태에 생겨나는 조화라면 뤼라가 파괴되면 조화가 소멸하는 것과 같이 몸이 소멸한 후에도 영혼이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6) 케베스의 반론(86e~88b)

케베스는 우리의 영혼이 이 모습 안에 들어오기 전에 있었다는 것은 증명되었지만 우리가 죽었을 때도 그것이 여전히 어딘가에 있다는 것은 증명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한다. 케베스는 이것을 옷을 만들며 늙어가는 직공에 비유한다. 직공이 여러 외투를 닳게 하고 닳아 가는 외투를 늘 다시 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공이 죽을 때가 되면 그가 입던 마지막 외투보다는 먼저 소멸해야만 한다. 영혼과 몸의 관계에도 동일한 관계가 성립한다. 일반적으로 영혼이 몸보다 오래 지속하지만 영혼이 여러 몸을 거치는 동안 조금씩 닳아갈 수 있고 결국 마지막 몸에 이르면 그것보다 먼저 소멸하게 될 수 있다. 따라서 영혼이 불사이고 불멸임을 증명하지 않는 한 영혼의 소멸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7) 파이돈과 에케크라테스의 막간 대화(88c~89b)

에케크라테스는 조화로서의 영혼이라는 심미아스의 주장이 설득력 있기에 죽은 자의 영혼이 함께 죽지 않는다는 것을 설득시킬 논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에게 그 어느 때보다 감탄했다고 말하며 소크라테스의 논의를 이어나간다.


(8) 논변 혐오의 위험성(89b~91c)

논변혐오와 인간혐오는 같은 방식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사람들이 논변 혐오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인간을 혐오하게 되는 것은 어떤 사람을 전문 지식 없이 굳게 믿고 그 사람을 전적으로 진실하고 온전하며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다가 조금 후에 그가 잘못됐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이런 일을 자주 겪게 되면 결국 잦은 충격으로 인해 모두를 혐오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온전함은 절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참이고 안전한 논변이 정말로 있고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데, 동일한 것이 한때는 참으로 다른 때는 그렇지 않게 생각되는 논변들을 접하는 바람에 자기 자신과 자신의 서투름은 탓하지 않고, 결국 그 탓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 논변들로 떠밀어 버리고서는 논변들을 혐오하고 욕하면서, 있는 것들에 대한 진리와 지식을 상실한 채 남은 생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기 위해 주의할 점은 어떤 논변도 온전하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아니라 아직 온전하지는 않지만 온전해지도록 용기를 내고 열의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나는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 말이 참이라고 믿어지도록, … 애쓰는 게 아니라, 나 자신에게 그것들이 그렇다고 최대한 믿어지도록 애쓸 것이다. 내가 무언가 맞는 말을 하고 있다고 믿어진다면 동의를 하되 그렇지 않다면 모든 논변을 동원해서 저항하라. 내가 열의로 인해 나 자신과 함께 자네들을 기만하지 않도록.”


(9) 심미아스에 대한 답변(91c~95a)

영혼이 조화라는 심미아스의 반론은 영혼이 몸과 결합하기 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구성요소와 특정한 방식으로 결합했을 때 생겨나는 어떤 것이기에 우리 영혼이 몸 안에 갇히기 전에 필연적으로 어딘가에 있었어야 한다는 상기논증과 양립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영혼이 조화라는 주장에 내포된 두 가지 문제점을 제시한다. 첫 번째, 조화는 더나 덜이라는 정도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반면 영혼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혼이 조화라는 규정은 성립될 수 없다. 두 번째는 영혼이 몸에 속한 것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에 속한 모든 것들 중 무언가를 다스릴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대상은 영혼이며 그중에서도 현명한 영혼이다. 이것은 현명한 영혼이 몸으로부터 비롯되는 많은 상태들에 저항하고 다스리기까지 한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영혼은 전 생애를 통해 모든 것들에게 저항하며 모든 방식으로 주인 노릇을 한다. 그러므로 영혼을 몸과의 어떤 조화라고 말하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 영혼은 조화가 아닌 신적인 어떤 것이다.


(10) 케베스에 대한 답변(95b~107b)

1) 케베스의 반론의 요약(95b~95e)

케베스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확신을 갖고 살다 죽는 것과 달리 자신과 같은 사람이 저승의 삶에 대해 어리석은 확신을 하지 않으려면 우리들의 영혼이 불멸하고 불사함을 납득할 수 있는 답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2) 소크라테스의 지적 여정(96a~102a)

2-1) 자연학자들의 원인(96a~97b)

소크라테스는 젊었을 때 왜 각각의 것이 생겨나고 소멸하고 있는지에 대한 지혜를 얻기 위해 자연학자들이 추구하는 원인들을 열망했다. 이러한 것들을 탐구하다 마침내 자신이 이런 종류의 탐구에는 전혀 소질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다. 인간은 무엇 때문에 자라는가와 같은 것에 대해서는 답이 분명하다. 하지만 작은 사람 옆에 서 있는 사람이 커 보이거나 열이 여덟에 둘을 더했기 때문에 더 크다는 것 등에 있어서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원인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그것들 각각이 서로 떨어져 있을 때는 각각이 하나이고 둘이 아닌데, 그것들이 서로 가까이 있게 되니 서로 가까이 놓임이라는 바로 이 모임이 그것들에게 있어서 둘의 생겨남의 원인이 되는 것인지 의아하다. 또한 하나를 나누면 바로 이 나눔이 둘의 생겨남의 원인이 된다는 것도 확신할 수가 없다. 나는 무엇 때문에 하나가 생겨나는지를 안다고도 다른 것에 대해서도 한마디로 그것이 무엇 때문에 생기고 소멸되고 존재하는가를 안다고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이 탐구 방식을 따라서는 더 이상 자신을 납득시킬 수가 없다.


2-2) 아낙사고라스에 대한 기대와 실망(97b~99c)

소크라테스는 모든 것들을 질서 짓고 그것들의 원인이 되는 것은 바로 지성이라는 내용이 담긴 아낙사고라스의 주장을 듣고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원인을 알려 줄 사람을 찾았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하지만 아낙사고라스는 소크라테스를 실망시킨다. 아낙사고라스는 지성이 만물을 질서 짓는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개개의 사태에 대한 원인을 이야기할 때는 다시 자연학자들의 원인들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진정한 원인과 그것 없이는 원인이 원인일 수 없는 것이 다름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지성이 세계를 어떤 통일된 질서 속에서 파악할 수 있게 해 주기를 희망한다. 소크라테스는 아낙사고라스로부터 세계가 그저 독립적으로 일어날 뿐인 낱낱의 사태의 집적체가 아니라 모두가 서로 연관되어 있는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설명을 기대했다. 하지만 자연학자들의 원인들은 통합적 원리를 고려하지 않고 한정된 범위 내에서 물질적 상태들 간에 성립하는 어떤 강제적인 힘들로 주어진 사태를 설명하려 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그것은 진정한 원인이 아니라 그 원인의 실현에 필요한 물질적 조건들을 대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 항해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2-3) 두 번째 항해: 가정의 방법(99e~100a)

‘두 번째 항해’라는 비유는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노를 저어 항해하는 것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최선의 방법에 대비되는 차선책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두 번째 항해는 일차적으로 방법론적 전회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두 번째 항해는 어떤 특정한 목적지를 전제로 한 행해가 아니라 ‘어디로’가 아닌 ‘어떻게’가 된다. 소크라테스의 두 번째 항해는 탐구의 방법의 문제에 맞추어지는데 결국 가정의 방법을 통한 탐구이다. 가정의 방법은 가장 강하다고 판단하는 말을 가정한 다음, 이것에 부합한다고 생각되는 것은 원인들에 대해서건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건 참인 것으로 놓고 그렇지 않은 것은 참이 아닌 것으로 놓는 것이다.


2-4) 원인으로서의 이데아: 단순하지만 안전한 원인(100b~101e)

소크라테스는 이데아들이 존재한다는 명제를 최초의 가정으로 세우고 F의 이데아를 제외한 모든 F인 것은 F의 이데아를 나누어 가짐으로써 F라는 성질을 가지게 된다는 가정을 추가로 내세운다. 예를 들어 만일 아름다움 자체 외에 다른 어떤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이 아름다운 것은 저 아름다움을 나눠 갖는다는 것 외의 다른 어떤 원인 때문이 아니다. 각각의 것이 생겨날 때, 그것이 나눠 갖게 될 각각의 고유한 존재를 나눠 갖는 것 외의 다른 어떤 방식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만일 누군가 그 가정 자체를 붙들고 늘어진다면 충분한 어떤 것에 도달할 때까지 다시 위에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좋아 보이는 어떤 가정을 다시 가정하고 같은 식으로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다.


3) 파이돈과 에케크라테스의 두 번째 막간 대화(102a)

에케크라테스는 파이돈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의 논변에 강하게 수긍한다.


4) 영혼 불멸에 관한 마지막 증명(102a~107b)

 4-1) 세련되고 안전한 원인(102a~105e)

소크라테스는 질문한다. 심미아스가 소크라테스보다는 크지만 파이돈보다는 작다고 말할 때 큼과 작음이 둘 다 심미아스 안에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심미아스는 양쪽의 가운데에 있어서 한쪽의 큼에는 작음을 초과하도록 굴복시키고 다른 쪽에는 그 작음을 초과하는 큼을 제시함으로써 작음과 큼이라는 이름을 가지는 것이다. 반대되는 것이 자신에 반대되는 것이 되는 일은 결코 없기 때문에 앞의 것들 자체가 결코 서로로부터의 생겨남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눈은 결코 우리가 앞서 말한 것처럼, 뜨거움을 받아들이고도 여전히 바로 그것이었던 것일 수 없으므로 뜨거움이 접근해 오면 피하거나 소멸할 것이다. 자기들 안에 있는 것과 반대되는 이데아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이 공격해 오면 소멸하거나 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셋은 그것이 셋으로 남아있으면서 짝이 되기 전에 소멸하거나 뭐든 다른 일을 겪을 것이다. 둘은 셋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반대되는 형상들만이 서로 공격할 때 버텨 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들 역시 반대되는 것들이 공격할 때 버텨내지 못한다. 이데아는 그것들이 차지한 것이 무엇이건 그것으로 하여금 자신의 형상뿐만 아니라 어떤 반대되는 것의 형상도 늘 갖게 만드는 그런 것들이다.


4-2) 마지막 증명(105e~107b)

영혼은 그것이 차지하는 것이 무엇이건 항상 그것에 삶을 가져온다. 삶에 반대되는 것은 죽음이다. 영혼은 자신이 항상 가져오는 것에 반대되는 것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의로움과 교양 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비정의와 교양 없음인 것처럼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불사이다. 영혼은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불사이다. 불사적인 것이 불멸하기까지 한다고 동의된다면 영혼은 불사인 것에 더해서 불멸하기도 하다. 케베스는 만일 불사적인 것이 영원한 것이라면 불사인 것은 불멸하기도 하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최소한 신과 삶의 형상 자체, 그리고 다른 불사라는 것은 무엇이건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에게 동의될 것이고 불사적인 것이 불멸하는 것이기도 하니 영혼이 불사한다면 불멸하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확실하게 영혼은 불사하고 불멸하며 우리의 영혼들은 하데스에 있게 된다. 각 사람이 죽으면 그가 살아 있을 때 뽑힌 그의 다이몬이 그를 어떤 장소로 인도하는 일을 맡게 되고 그곳에서 모인 사람들은 심판을 받고 안내자에 의해 하데스로 가야만 한다. 이것은 여러 주기의 긴 시간을 거친 다음에 이루어진다. 방정하고 현명한 영혼은 안내자를 따르고 자신의 상황을 아는 반면, 몸을 욕망하는 상태인 영혼은 앞서 말했던 대로 몸과 보이는 영역 주변에서 오랜 시간 동안 퍼덕거리다가 여러 번 저항하고 많은 일을 겪은 다음에 강제로 다이몬들에 의해 이끌려 떠나가게 된다. 이러한 시간이 지나고 난 후에 각자 알맞은 거처로 인도된다.


4. 신화: 참된 지구와 사후 세계의 모습(107e~115a)

지구자체는 순수한 상태로 천구 안에 위치하는데, 우리는 그것의 우묵한 곳에 거주하면서도 이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지구 위쪽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그것의 끝에 이르게 되거나 날개가 달려 날아오른다면 그는 그것이 참된 천구이고 참된 빛이며 참된 하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이 지구와 돌들과 이 세상의 모든 지역은 마치 바닷속에 있는 것들이 소금물에 의해서 그렇게 되듯, 부패되고 부식되어 있다. 참된 하늘은 이곳의 것들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그 원인은 저곳의 돌들은 순수해서 이곳의 돌들처럼 부식되거나 파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곳의 기후는 우리들보다 뛰어나도록 혼합되어 있고 신들의 숲과 성소들이 있는데, 이 안에서 신들은 실제 거주한다. 그들에게는 태양과 달과 별들이 실제 그대로 보이고, 그들의 다른 행복도 그것들에 따른다. 죽은 자들이 각각의 다이몬이 인도하는 장소에 이르게 되면 그들은 심판을 받는데, 경건하게 산 사람도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각각의 잘못에 따라 벌과 이르게 되는 곳이 다르다. 경건함에 있어서 남다르게 살았다고 생각되는 자들은 자유롭게 해방되어 위쪽의 순수한 곳에 이르러 거처하게 된다. 이들 중에서도 철학에 의해서 충분히 정화된 사람들은 앞으로 올 모든 시간 동안 몸 없이 살게 되며 훨씬 더 아름다운 거처에 도달하게 된다. 보상이 고귀하고 희망이 크니 우리는 삶 속에서 덕과 현명함을 나눠 갖도록 모든 일을 해야만 한다. 몸과 관련된 다른 즐거움들이나 장식들은 해롭게 하는 것들이라는 생각으로 작별하고 배움과 관련된 즐거움들에는 열성을 다하면서 영혼의 장식 즉 절제와 정의와 용기와 자유와 진리로 장식하고 언제든 운명이 부르면 떠날 생각을 해야 한다.


5. 소크라테스의 죽음(115a~118b)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마지막 장면은 『파이돈』서 가장 유명한 부분으로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일러줄 것이 있는지 묻는 크리톤에게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더 새로운 뭔가가 아니고 자네들이 자네들 스스로를 돌본다면 설사 지금 내게 약속을 하지 않더라고 무엇을 하건 나와 나의 가족과 자네들 자신들을 위해서 기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매장에 대해서 묻는 크리톤에게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이보게들 내가 크리톤을 설득시키지 못하고 있군.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고, 이야기된 것들 각각을 정리하고 있는 이 소크라테스가 나라는 점을 말일세.….”

죽음을 앞두고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죽은 뒤 자신의 몸을 씻기는 수고를 끼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말하며 목욕을 한다. 이후 11인회의 관리가 들어와 소크라테스에게 말한다.

“… 당신은 여기에 왔던 사람들 중 가장 고결하고 가장 온화하며 가장 훌륭한 분이라는 것을 제가 이 기간 동안 다른 식으로도 알고 있었다. ….” 소크라테스는 이승에서 저승으로의 이주에 행운이 따르도록 신들에게 기원하고 침착하고 편안하게 잔을 비웠다. 그리고 이리저리 거닐다 다리가 무겁다고 말하고 누군가의 지시대로 등을 대고 누웠다.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말은 “크리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지고 있네, 부디 갚아주게. 잊지 말고.”였다. 파이돈은 말한다. “이것이 우리 벗의 최후였습니다. 에케크라테스. 우리는 말할 겁니다. 그는 당시 우리가 겪었던 사람들 중 가장 훌륭하고 무엇보다도 가장 현명하며 가장 정의로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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