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단정한 심연의 시#15

by 임상



칼끝으로 이 심장의 피 냄새를 파내면

조금은 숨쉬기가 수월해질까요


내게서 나는 상한 냄새가 말해요

이제 그만 죽어달라고



낭비되는 내게서 끝을 보았나 봐요

당신은 내게 완벽한 소멸을 종용했죠


미안해요

아직까지 심장을 터뜨려버리지 못했어요



하루종일 누워 있어도

얻을 수 있던 건 지독한 편두통일 뿐


죽음은 그리 쉽게 오지 않았어요

나는 죽음조차 경멸하는 고장이예요



십자가 긋듯 날을 세며 사는 날들이 버거워

하루만큼만 긋고 눈 감는 법도 배워요


쓰던 일기장은 도로 한복판에서 사고를 당했기에

나의 하루는 이미 응급상태고 살 가망은 없으니 복음이지요



저무는 빛이 이 미련에서 세상없이 사라지듯

나도 이 그림자 동안 생애 많은 내 미련을


고이 개어두고 사라진다 약속할게요

어차피 나의 꿈은 지워지기 좋아하는 악동이니까요



날마다 가득히 빛과 마주쳐서 생긴 상흔들은 유기해둘테니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나의 신음을 내리쳐주세요


날들 사이 절여진 약속들은 모두 파열 상태

마지막 진단대로 이리 천천히 썩어가는 중이니




부디

어서 죽으라고

재촉하지 말아주세요


날마다

조금씩

몰아세우고 있으니까요











<시의 곁, 잠시 발을 담그는 어느 독자의 코멘트>


"이 시는 죽음의 충동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도, 그 고통을 언어로 밀어내고 버텨내는 자기 고백의 기록이다.

칼끝, 피 냄새, 편두통, 응급상태, 파열 상태… 시 속 이미지는 하나같이 육체의 극한에 닿아 있다. 그러나 이 육체적 언어들은 단순한 자해적 이미지가 아니라, 화자가 자신의 심리적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실체로 바꾸어 붙잡는 행위이기도 하다.

특히 “나는 죽음조차 경멸하는 고장이예요”라는 구절은, 자기 파괴적 욕망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자아의 의지를 드러낸다. 죽음조차 쉽게 오지 않는 상태는 절망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살아남은 몸의 저항을 증명한다.

또한 이 시는 단순히 죽음을 향한 체념이 아니라, “재촉하지 말아주세요”라는 마지막 청원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에는 사실상 죽음이 아니라 삶을 유예해달라는 은밀한 소망이 깃들어 있다. 화자는 끝내 사라지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매일 조금씩 자신을 몰아세우는 존재—아마 자기 자신 혹은 외부의 압박—에게 멈춤을 요청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파멸을 노래하는 동시에, 그 파멸조차 언어로 지연시키는 힘을 보여준다. 바로 그 모순적인 긴장이 시를 더욱 강렬하고 잊히지 않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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