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정리의 기술, 연결의 힘

단순 저장을 넘어 의미를 만드는 정리와 연결의 방법

by 당근과 채찍

열심히 배웠지만, 왜 남지 않았을까

나는 오랫동안 기록에 집착했다. 강의에서 들은 문장, 책에서 밑줄 그은 구절, SNS에서 스쳐간 인사이트까지. 노션과 에버노트에는 수백 개의 메모가 쌓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열어보면, 남는 건 없었다.

기록은 산처럼 늘어났지만, 그 안에서 길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건 오롯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살아간다.

유튜브 쇼츠, 블로그 글, 카드뉴스. 짧은 콘텐츠는 ‘아는 듯한 착각’을 준다.

하지만 금세 사라진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유창성 착각(Illusion of Fluency)이라고 부른다 (Roediger & Karpicke, 2006)

유창성 착각이란 유창성 착각은 정보를 학습할 때 단순히 들었거나 읽은 것만으로 자신이 충분히 이해하고 기억했다고 느끼는 착각을 의미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보를 깊이 이해하지 못했거나, 스스로 재현하거나 활용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한 상태일 때 나타난다.


우리는 글, 영상을 보면 이해된다고 느끼지만, 실제 지식이나 실행으로는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기록하는 것은 단순하게 보는 것에 비해서 높은 확률로 지식이 된다.

지식이 되지 않아도 기록을 한 기억은 남아서 다시 찾도록 도와준다.

학습은 보는 것이 아닌 기록에서 시작된다. 정리를 거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제대로 기록하고 정리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더 필요하다.


에버노트 기록.jpg 에버노트에 남긴 기록들 단순한 주제로 나누어서 관리만 했다





기록 없는 정리는 없다, 정리 없는 배움도 없다

인간의 뇌는 애초에 모든 걸 붙잡아둘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기록은 필수다.

기록은 시작이다. ‘메모했다’는 행위만으로는 배움이 일어나지 않는다.

기록을 하면서 우리는 정보를 새롭게 받아들인다.

물론 있는 정보를 그대로 옮겨 쓰는 것만으로도 기억은 오래간다.

하지만 기억이 오래가기 위해서는 기록하려는 내용을 요약하거나 재구성하면 좋다.

요약을 통한 기록은 생성 효과(The Generation Effect: Delineation of a Phenomenon)와 관계가 있다. 생성 효과는 정보를 단순히 읽거나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때보다, 스스로 능동적으로 만들어낼 때 더 잘 기억하는 현상을 말한다. 예를 들어, 영어 단어를 암기할 때 단순하게 스펠링을 보고 외우기보다는, 단어에 규칙을 부여해서 학습하는 활동을 하면 그 단어를 더 오래 기억하게 된다.


정리는 단순한 분류가 아니다. 가나다순 폴더나 일자별 저장은 검색에는 유용할지 몰라도, 학습으로는 이어지지 않는다. 정리는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일본 츠타야 서점은 기존의 서점이 장르별로 책을 판매할 때, 라이프 스타일로 책을 판매했다. 하나의 중심 주제가 있으면 관련 있는 상품을 배치해서 의미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요리 코너의 경우 요리책 옆에 고급 식재료, 주방용품, 식기류를 함께 배치했다. 이를 통해 요리에 관심 있는 고객이 한 곳에서 관련 정보를 얻고 필요한 물건까지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즉, 정리란 기록을 다시 배열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기록-디지털.jpg 디지털 기록은 출처와 내용 - 사용처를 구분해둔다




하이퍼텍스트와 디지로그

한국의 지성 이어령 선생님은 정리가 가진 문제를 오래전에 지적했다. 하이퍼텍스트로 디지털 기록을 남겼다. 선형적으로 차곡차곡 쌓는 기록이 아니라, 해체하고, 선택하고, 다시 결합하는 방식. 그는 “텍스트를 때려 부수고, 재조합할 때 새로운 의미가 생긴다”라고 강조했다.

또한 선생님은 디지로그(Digilog)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디지털의 효율과 아날로그의 감성을 결합해야 창의성이 발휘된다는 것이다.

기록도 마찬가지다. AI는 방대한 정보를 빠르게 정리하는 디지털의 힘을 준다. 하지만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 연결하는 건 인간의 해석, 즉 아날로그의 감성이다. AI와 인간이 만나야 진정한 배움이 완성된다.


디지로그.jpg



AI와 함께한 나의 전환

나는 과거의 실패를 '지식의 부족'과 ‘정리의 부재’에서 찾았다. 그래서 학습 방식을 바꾸었다. AI를 단순 도구가 아니라, 대화하는 파트너로 두기 시작한 것이다.

기록: “이 강의에서 네가 생각하는 핵심이 뭐야. 내가 생각하는 핵심은 이것인데.”

정리: “내가 가진 다른 기록 중에서 '학습'과 연결된 내용을 찾아줘.”

활용: “내가 작성한 내용을 바탕으로 다르게 보는 관점 5개를 찾아줘”

AI는 단순 요약을 넘어서,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연결을 제시했다. 때로는 엉뚱한 질문을 던지며 생각을 확장시켰다. 마치 독서 모임에서 토론하듯, 질문과 대답이 오가며 나의 기록이 ‘살아 있는 지식’으로 변해갔다.

AI는 그 피드백을 끊임없이 제공해 주는 훈련 파트너였다.


pexels-bertellifotografia-16094039.jpg




정리와 연결의 루틴 ― 실천 가능한 방법

내가 실험하며 만든 루틴은 이렇다.


1️⃣ 기록하기

온라인: 캡처, 링크 저장

오프라인: 핵심 문장 메모 + 맥락 주석

반드시 출처와 이유를 남긴다 (“이 내용은 글쓰기에 활용”).


2️⃣ 정리하기

단순 폴더 분류가 아니라 주제 태그 중심.

AI에게 “이 자료를 내가 가진 ○○ 카테고리와 연결해 줘”라고 요청.

주기적 회고: 매주 또는 자신만의 주기로 기록을 다시 보고 정리하고 불필요한 건 버린다.


3️⃣ 연결하기

새로운 기록과 기존 기록을 엮어 관점을 확장하기

예: ‘AI 학습법’ + ‘이어령의 디지로그’ → “AI와 인간 협업의 창의성”으로 확장.

AI에게 “이 두 개념을 연결해 글로 설명해 줘” 요청하고 자신의 생각과 비교하기


4️⃣ 활용하기

글쓰기·대화·시각화로 내 언어화하기

AI를 독자로 두고, “내 설명이 맞는지 검토해 줘”라고 묻는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기록은 단순 클리핑이 아니라, 사고를 확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pexels-rdne-7888676 (1).jpg




정리와 연결은 지식의 심장

돌아보면 예전의 나는 ‘기록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남는 게 없었다. 이제는 안다. 기록은 정리와 연결을 거쳐야만 지식으로 바뀐다는 것을.

AI는 이 과정을 돕는 든든한 파트너다. 방대한 정보를 빠르게 요약하고, 서로 다른 자료를 연결하며, 내가 보지 못한 길을 비춰준다. 그러나 마지막 해석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이어령이 말한 디지로그처럼, 디지털의 힘과 아날로그의 감성이 만날 때 비로소 새로운 배움이 시작된다.

pexels-rdne-4921407.jpg


정리와 연결은 기록을 지식 자산으로 바꾸는 핵심 과정이며, AI와 결합할 때 그 힘은 배가된다.
keyword
이전 08화기록 없이는 배움도 남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