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그렇게 됐습니다
잘 굴러가고 있던 일차진료를 모종의 사건들로 인해 그만두고, 이력서를 난사하다가 붙은 대형 미용 의원에서 봉직 중이다.
브런치북에서 자세하게 더 적어보려 하겠지만(요즘 긴 글을 쓸 체력이 없다) 미용 의원과 일반 의원은 정말 다른 생태를 갖고 있다. 이르면 8시부터 진료를 보고 늦어도 7시에는 마치는 일반 의원과 달리, 미용 의원은 일러도 10시부터 늦으면 10시까지도 진료를 본다.
사실 진료를 보는게 맞나라는 생각도 든다. 소위 말하는 실장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앞에서 고객을 상대하고, 실장이 고객에게 판매한 제품(술기)을 나는 그저 고객에게 수행하는 것 뿐이다.
일반 의원에서 의사는 진료도 잘보고, 환자 응대도 잘하고, 시설 관리나 인력 관리, 세무나 매출 관리에도 신경써야 하지만, 이런 대형 미용 의원의 의사는 그냥 묵묵히 시술만 하면 된다.
사실 퍽 만족스럽다. 진료를 보던 작년 1년간의 시간은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고, 진단이나 경과가 애매한 환자를 만난 경우, 퇴근하고 집에 와서까지도 그 사람 지금은 어떻게 되었으려나 하고 고민하다가 잠들기가 일쑤였다. 특히 중증도가 높았던 365의원을 그만둔 뒤에는 엄청난 해방감마저 느껴졌었다. 지금은 전혀 그런게 없다. 오직 집중해야하는건 눈 앞의 사람에게 실수 없이 시술을 하는 것이고, 아직 내가 하는 술기는 난도가 그렇게 높지 않아서 웬만하면 실수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환자를 보고 있는 것인가 고객을 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자주 든다. 보통은 인사하고 묵묵히 술기만 하면 되지만, 시술을 하다보면 상대를 지칭해야할 경우가 어쩔 수 없이 생긴다. 그때 자연스럽게 환자분~이라고 말하려다 한번 삼키고 고객님~ 이라고 말하는 스스로를 볼때 실소를 머금을 수 밖에 없다. 내가 지난 7년동안 배운건 환자를 보는 법인데.
퍽 만족스럽기 때문에, 어쩌면 이 일을 꽤나 오래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것도 어쨌든 과학적인 원리들이 담겨있는 술기고, 시술이 잘 되면 고객도 나도 만족도도 높고 좋다. 페이도 전공의보다 당연히 높고, 근무 강도도 나쁘지 않다. 거의 매일 봉직의 단톡에 올라오는 의료소송 얘기를 읽다보면 내가 심장내과를 가고 싶어했다는 사실이 다른 세계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보건복지부에서 갑자기 무슨 특례라고 수련 복귀 공문을 보냈다. 찬찬히 읽어봤지만 돌아갈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 작년 2월하고 대체 뭐가 바뀐건지. 그래서 당분간 계속 미용의원에 있기로 했다.
신기한게 언론과 일부 대중은 이걸 특혜라고 부르더라. 근데 정말 궁금한건데 누구에 대한 특혜인가? 혹시 이 타이밍에 수련이 열려서 지금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누군가가 있는지 궁금하다.
지난 글의 댓글에서의 누군가도 그렇고, 이런 생각하는 나를 무책임하고 환자에게서 도망간 사람이라고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는것 같다.
그냥 그렇게 생각해라. 어쩌면 그들을 설득하지 않는게 가장 좋은 설득의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나는 고객을 만나러 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