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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성진 작가 개인전 <<무관심영역>> 작품론

2025년 12월 12일 송성진 개인전 일민미술관

by 엘로디 옹그

송성진 작가님의 작품에 대해 대화를 시작한 것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작년 요한한 작가님 금천예술공장 오픈스튜디오 초대로 갔다가 만나고 다음날 두렁 전시를 함께 보며 걷고, 가파도에 현장리뷰 초대로 갔다가 제주 곶자왈 공원을 또 걷고, 김해 초대로 갔다가 부산 다대포 해변을 송성진 작가님과 또 걷고, 작품 얘기하기로 작정하고는 종로에 만나 걸었다. 장시간 산책을 같이 한다는 것은 발걸음과 호흡의 선을 얽히는 행위라서 몸의 흔들림에 따라 얘기가 덜커덕 떨궈져 나올 수밖에 없다. 집 작업을 왜 계속하는지 궁금했고 지난 여름 다대포 바다에 발이 잠기면서 좀 풀리기 시작했다.

아래 글을 개인전 서문으로 쓰셔야 하는 것 같던데 그러기엔 마냥 길어 전시장에서는 편집된 글을 만나실게다.(아래 글은 작품론 전문, 각주는 괄호처리) 송성진 작가님 작품에 대해 풀어내고 싶은 방향으로, 작가님의 다음 여정에 보탬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쓰다보니 길어졌다. 이번 글은 거의 다 쓰고 전시 제목을 들은 경우이다. 그리고 다행한 마음을 쓸어내렸다.

송성진 작가님 개인전<<무관심영역>>은 2025년 12월 12일 일민미술관 1층에서 오픈한다.

#송성진 #일민미술관 #무관심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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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잔여를 어루만지는 현장 정치학 “강렬한 거주”

글. 홍희진(독립큐레이터)

작가 송성진의 작업에서 유독 눈에 남는 것은 ‘불을 켠다’라는 행위의 이미지이다. 모래톱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작은 집에, 파도가 삼켜버릴 듯 장소에 놓인 모형 도시에, 혹은 사람이 떠난 뒤에도 미약하게 작가가 ‘밝힌 불빛’이 그러하다. 이 불빛은 단지 상징적 장치가 아니라, 아직 그곳에 누군가가 살고 있다는 존재의 징후, 혹은 그 자리를 떠난 존재의 잔여가 남긴 미약한 신호이기도 하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비거주가 아닌, 아직 끝나지 않은 강렬한 거주의 흔적을 드러내기 위해 불을 켠다”고 밝힌 바 있다. (온라인 (2025.10.20) 및 대면 인터뷰(2025.11.25.)에 기초한 작가 인터뷰 메모) 이 불은 지속적인 현재(a present continuous)의 형식으로, 멸실의 시간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생의 잔여를 감각화한다. 바슐라르가 말한 오두막(hut)의 시학은 “가장 단순한 형태의 집이 인간적 상상력을 보호하는 장소가 된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Gaston Bachelard, The Poetics of Space, trans. Maria Jolas (Boston: Beacon Press, 1994), pp. 31–36.) 그러나 송성진이 다루는 모래톱 위의 집은 보호의 은유가 아니라, 보호가 실패한 이후에도 살아남은 존재의 미약한 증언처럼 보인다. 물리적 균열과 침식이 끊임없이 침투하는 구조물은 바슐라르가 말한 ‘은신의 시학’과는 정반대의 장소성을 드러내며,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작업은 은신처가 아닌 노출된 거주의 형태, 즉 강렬한 거주의 미학을 보여준다. 송성진의 공간 연구는 단순한 건축적 실험이나 환경적 리서치를 넘어선다. 그의 리서치는 현장 방문, 인터뷰, 채집, 재현, 의례(儀禮)적인 구성이 계속 이어지며 결합된 체계적 과정이며, 이는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의 ‘집’을 둘러싼 공상적 공간 개념, 르페브르(Henri Lefebvre)의 ‘공간의 사회적 생산’ 이론과는 또 다른 변주를 이룬다. 작가가 호출하는 공간은 물리적 환경이면서 동시에 기억, 권력, 상처, 그리고 잔존하는 생명의 감각이 뒤섞인 ‘현장으로서의 공간’인 ‘강렬한 거주’(intense dwelling)이다. 이 지점에서 송성진의 작업은 예술적 상상력과 정치적 감수성이 교차하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르페브르(Henri Lefebvre)는 공간을 ‘공간적 실천(spatial practice), 표상된 공간(representations of space), 표상공간(representational spaces)’의 삼원 구조로 파악했는데, 송성진의 작업을 이 구조 맥락에서 얘기할 수 있다. 이 삼원구조에 따르면 도시는 단순히 물리적 형태가 아니라, 일상의 리듬·신체적 동선·권력 관계가 상호적으로 생산하는 장(場)으로 존재하는데, 송성진의 작업은 이 구조의 맥락에서 장소를 추상화된 ‘설계된 공간’으로 환원하지 않고, 거기서 발생하는 몸의 리듬, 미시적 실천, 소거된 역사를 다시 장면화한다. 그의 ‘강렬한 거주’는 르페브르가 말한 ‘삶의 위상적 공간’을 복원하는 행위이자, 도시 공간이 권력에 의해 균질화되는 과정에 맞서 리듬과 흔적으로 공간을 다시 생산하는 실천으로 읽을 수 있다. (Henri Lefebvre, The Production of Space, trans. Donald Nicholson-Smith (Oxford: Blackwell, 1991), pp. 33–46; Rhythmanalysis, trans. Stuart Elden and Gerald Moore (London: Continuum, 2004), pp. 15–25.)
특히 2017년, 작가는 <Postures project>를 전환점으로 강렬한 거주를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하는데, 이전에는 주로 개별적인 거주지와 그 잔여를 탐구하였다면 이 시기부터 ‘사람’, 즉 동아시아와 한국, 유럽의 도시 거주자인 이민자와 원주민을 주요 대상으로 삼기 시작한다. 베를린을 중심으로, 각자의 역사와 삶의 행태의 차이와 공통성을 포착하고, 현대 도시가 만들어내는 젠트리피케이션과 신자유주의적 배제 속에서 어떻게 삶이 재구성되는지를 관찰한다. 작가는 이들을 단일한 장면 안으로 불러들여, 철봉이나 균형대 같은 단순한 신체 운동 장치 위에서 나타나는 자세와 표정을 기록하고, 동시에 각자의 역사와 맥락을 영상으로 수집한다. 이를 통해 단일한 장소가 아닌, 다양한 삶이 얽힌 가상의 ‘거대도시’를 형상화하며, 각자의 몸과 움직임이 새로운 잔여로서 존재하게 한다. 르페브르가 『리듬분석: 공간, 시간 및 일상생활』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도시는 신체와 사회, 그리고 일상의 리듬이 충돌하고 교차하는 장소이며, 몸은 공간을 인지하고 구성하는 일차적 매개이다. 작가가 각기 다른 도시 거주자들을 단일 장면으로 호출해 자세, 균형, 중력에 반응하는 운동을 수행하도록 한 방식은, 도시 리듬이 각 주체의 신체를 통해 어떻게 표면화되는지를 보여준다. 즉, <Postures project>는 도시가 생산하는 추상적 규율의 리듬과 개인 삶의 고유한 리듬이 한 화면에서 충돌하며 동시에 조율되는 장면이며, 이는 르페브르가 말한 ‘리듬적 사유(rhythmic thinking)’의 시각적 구현으로 해석된다. (Henri Lefebvre, Rhythmanalysis: Space, Time and Everyday Life, trans. Stuart Elden and Gerald Moore (London: Continuum, 2004), pp. 10–18, pp. 27–32.)
이렇게 수집된 사진과 영상은 개별적 삶을 보여주지만, 모이면 하나의 거대도시를 이루며,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개인의 삶과 사회적 조건, 그리고 미래의 거주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이 변화는 그의 예술 실천에 관한 문제의식의 중심이 ‘정적 장소의 증언’에서 ‘동적 삶의 움직임’으로 확장된 것을 보여준다. 이전까지 집과 모형 도시는 잔여를 기록하는 장치였다면, 이제는 신체와 자세, 도시에서의 삶에 대한 감각이 새로운 잔여로 등장한다. 이러한 확장은 작가의 기존 작업, 즉 모래톱 위 흔들리는 집, 파괴된 모형 도시, 잔여적 빛을 통한 강렬한 거주와 긴밀히 연결된다.
동시대 예술은 유토피아 이후 공간에 관한 사유를 지속해오고 있다. 바로 이 문제적 유산 위에서 시대를 달리하며 공간 실험을 조직해왔다. 가령, 신인상주의, 레제의 기계문명 예찬, 소비에트 아방가르드의 집단 주거 실험 역시 모두 ‘이상적 삶의 공간’을 구축하려 한 시도였지만, 이 역시 권력, 기술, 노동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유토피아는 항상 “더 나은 삶”을 말하지만, 그 말은 대개 누군가의 삶을 삭제하는 방식으로 구현되었다. 이러한 유토피아 공간 실험을 배경으로 송성진의 작업이 중요한 지점은, 그가 유토피아의 결과물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유토피아가 남긴 잔해들, 혹은 그 틈새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생의 흔적을 포착한다는 점이다. (이에 관하여 송성진은 1990년대 이후 자본의 논리와 확산된 소비 문화에 의해 획일화된 현대 도시 공간으로 변모, 삶의 터전보다 경제적 자산 축적의 수단이 된 주거의 현실을 지적하며, 개개인의 삶이 반영된 진정한 주거 공간의 의미를 예술 작품(<일상다반사>(2006), <문화주택 프로젝트>(2011, 2013), <도시의 성장>(2011) 등)으로 나타내며 학술적인 연구를 했다. 송성진, "설치와 복합매체를 통한 이상적 도시 이미지 표현 연구" 국내박사학위논문 부산대학교, 2014, 부산)
그의 모형 도시는 모더니즘의 계획도시라기보다, 파도와 모래, 폭력과 풍화에 깎여나간 이후의 도시이자, 다시 누군가가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는 공간으로 열린 장소이다. 즉, 모형은 이상적 미래가 아니라 유토피아의 실패 이후 남은 잔여적 세계를 사유하게 만든다. 바슐라르가 집을 “우주의 이미지가 응축된 장소”로 보았다면, (Gaston Bachelard, The Poetics of Space, trans. Maria Jolas (Boston: Beacon Press, 1994), pp. 38–72.)
송성진의 모형 도시는 완전한 우주가 아니라 파괴된 우주의 잔여를 품은 축소 세계이다. 그의 도시와 집은 조화로운 기하학적 질서를 구현하기보다는, 실패한 유토피아의 잔해 속에서 다시 ‘살기 위한 최소 조건’을 탐색하는 장소가 된다. 이는 도시를 설계의 산물이 아닌 생존의 잔여가 모인 현장으로 전환한다.
바슐라르가 『공간의 시학』에서 말한 집은 “인간의 꿈을 보호하는 최초의 공간”이자, 기억이 수직적으로 쌓여 올라가는 내적 구조이다. (위의 책, pp. 38-73.) 반면, 르페브르는 공간을 물리적·사회적·상상적 층위가 결합한 사회적 생산물로 규정하며, 도시의 공간은 언제나 권력과 물질을 통한 조건에 의해 재구성된다고 보았다. (Henri Lefebvre, The Production of Space, trans. Donald Nicholson-Smith (Oxford: Blackwell, 1991), pp. 26–33.) 송성진의 작업은 이 두 계보를 모두 이어받으면서도,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 작가의 현장은 바슐라르를 따르는 의미의 내면적 집도, 르페브르를 따르는 의미의 체계적 도시공간도 아니다. 바슐라르가 집을 지하실, 1층, 다락으로 이어지는 수직적 상상력의 구조로 이해했다면, (Gaston Bachelard, The Poetics of Space, trans. Maria Jolas (Boston: Beacon Press, 1994), p. 24.) 송성진의 집들은 그러한 안정된 축을 상실한 채 기울어지거나 침식되거나 잠기며 존재한다. 이러한 ‘역전된 수직성’은 보호와 회귀의 가능성을 상실한 집이 아니라, 거주의 조건이 어떻게 파괴되는가를 드러내는 신체적 구조물로 작동한다. 이는 바슐라르 맥락의 집이 지닌 내적 상상력과 상반되며, 거주의 근본적 조건을 다시 묻는 정치적 장치로 기능한다. 오히려 작가가 다루는 장소는 흔적만 남은 집, 붕괴된 사회적 조건, 시간이 퇴적된 땅, 살아있는 잔여들의 상태로 이루어진다. 이곳에서 집은 더 이상 안락한 ‘은신처’가 아니라, 생명과 소멸이 충돌하는 경계선상의 구조로 나타난다. 동시에 이 장소는 표준화된 도시공간의 바깥에서 생성되는 비제도적 정치성을 품는다. 작가가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현장 리서치는 공간을 ‘기억의 방’으로 만들고, 채집된 재료들은 공간을 ‘살았던 시간의 집적물’로 변환한다. 이러한 점에서 송성진의 작업은 바슐라르의 집 개념이 가진 감성적 내면성과 르페브르의 공간 생산론이 가진 구조적 분석 사이의 틈새에서, 현장 그 자체를 정치적 사유의 장으로 만드는 독자적 방법론을 구축하고 있다.

:::이상과 현실의 틈새에서 작동하는 장치로서 주거(住居):::

송성진의 초기 포착은 도시의 ‘틈’에서 시작된다. 용호 농장, 산복도로의 공동주택, 감천마을와 같이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 장소들은 도시계획과 자본 축적의 논리 바깥에 남겨진 결절들이다. 작가가 2000년대 후반 설계한 〈문화주택〉 (작가는 2009년 부산 문현동, 감천동, 부곡동, 남부민동, 송도, 수정동을 배경으로 작품 <문화주택>을 제작했다.)
모듈과 그것을 교육 프로그램으로 확장한 실천(학생들이 꾸미고 공동주거로 재조립하는 과정)은 단순한 건축적 모형 제시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이상적 집’이라는 제도화된 담론을 역으로 읽어내는 실험적 장치다. 즉, 아파트와 자산 그리고 도시성으로 구성되는 근대적 주택 이념에 대항하여, 산의 지형을 살린 테라스형 공동주거, 일조권과 주민 간의 물리적 접촉을 보장하는 형태 등을 통해 공동체적 거주의 가능성을 물리적으로 제안한다. 이러한 모듈 실천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교육적이고 사회적인 개입으로서의 미술의 기능인 제작과 분배, 다시 돌려주는 과정에서 미술은 사회적 기술과 공동체 역량을 촉진한다. 다른 하나는 미학적 은유로서의 주거성이다. 작가는 ‘집’을 통해 도시의 불평등, 재개발의 폭력성, 주거의 자본화를 가시화한다. 이때 그의 비판은 르페브르가 ‘추상공간(abstract space)’이라 부른, 자본과 국가의 논리 속에서 동일시되고 표준화된 공간의 생산 방식과 정확히 맞닿는다. 추상공간은 인간의 삶을 지워낸 채 교통, 효율, 속도, 교환가치에 따라 공간을 조직한다. 송성진이 포착하는 무너진 주택, 비가시적 존재들의 흔적과 균열된 지형은 추상공간이 억압한 ‘차이의 공간(differential space)’을 다시 등장시키는 전략이다. 그의 작업은 추상공간이 만든 결핍을 드러내는 동시에, 삶의 리듬이 회복되는 차이의 공간에 관한 가능성을 실험한다. (Henri Lefebvre, The Production of Space, trans. Donald Nicholson-Smith (Oxford: Blackwell, 1991), pp. 49–52, pp. 350–360.) 특히, LED 전광판에 재현된 ‘낭만주택’은 자본이 만들어내는 주거 이미지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반어적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현대 도시가 신자유주의적 압력 속에서 표준화되고 기능적 효율을 최우선으로 추구할 때, 송성진의 작업은 거주를 다시 상상하는 실험적 모델을 수행한다. 그의 모형 도시와 집들은 과거의 유토피아적 설계처럼 완전성과 조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서지고, 기울고, 흔들리는 형태를 통해 새로운 거주의 가능성을 비선형적 시간 속에서 탐색한다. 이러한 실천은 과거 유토피아의 오류인 획일성, 통제성, 비인간화를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동시에, 여전히 유효한 유토피아적 상상력의 긍정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즉, 그는 “완전한 사회”를 재현하는 대신, “텍스트 밖으로 밀려난 존재들이 어떻게 다시 강렬하게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는 참여와 소통을 기반으로 한 동시대 예술 작품으로 모색하며 상호작용 예술, 지역 기반 실천 등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송성진의 모형은 특정한 공동체와 개인들이 자신의 개성을 투영해 집을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며, 이는 획일적 삶의 조건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안적 주거 상상력을 제안한다.

:::묻힌 흔적의 호명과 전쟁·이주의 물질기억을 일상도구로 전환:::

송성진의 지난 작품에 등장한 ‘돼지’는 단순한 재료가 아니다. 그것은 구제역으로 살처분된 여러 장소의 흙을 퍼 모아 찰흙과 섞어 빚어낸 몸이며, 재개발, 질병, 산업화의 과정에서 배제되고 문자 그대로 ‘묻힌’ 존재들의 물질로 남은 흔적이다. 2020년대의 연작들 〈돼지는 없다〉, 〈다시..살 일요일〉 등의 작업은 구제역으로 인해 매장된 동물들의 물질로 남은 잔여(냄새, 흙, 소금)와 이를 둘러싼 사회적 무관심을 문제화한다. 작가는 갯벌토로 만든 돼지 작품을 여행시키며, 돼지와 함께 장소를 이동하며, 돼지를 통해 ‘밀려나는 존재들’(사람, 고양이, 동물 등)이 어떻게 공간과 정치적으로 제거되는지를 가시화한다. 바슐라르가 코너(corner)를 “기억과 꿈이 농축되는 사유의 자리”라고 말했다면, (Gaston Bachelard, The Poetics of Space, trans. Maria Jolas (Boston: Beacon Press, 1994), pp. 136–145.) 송성진이 추적하는 묻힌 흔적들은 사회가 ‘코너로 밀어 넣은 존재들’의 자리이기도 하다. 그가 파편들을 수집하고 흔적을 재배치하는 행위는 잉여로 취급된 존재들을 다시 중심으로 불러오는 코너에 대항하는 태도이며, 숨겨진 감각을 다시 감각 가능한 층위로 끌어올린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표상 윤리의 전환이다. 흔히 타자의 고통을 ‘대리 표상’하는 미술과 달리, 송성진의 방식은 잔존물의 물질성을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관객을 몸과 직접 만나는 접촉과 불편한 감각으로 끌어들인다. 작가의 당시 작업실이 있던 축사 근처에 돼지의 흔적은 악취로 남겨졌고, 시각을 넘어 후각·촉각을 자극하는 매개로 작가에게 작동한다. 철저하지 못한 발각될 배제의 구조에 직면하게 된 작가는 미술을 통해 ‘보는 윤리’가 아니라 ‘겪는 윤리’를 요구한다.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등에 관한 작가 리서치와 그의 작업은 지역적 주거비평에서 전쟁과 이주를 연결하는 보다 광범위한 문제로 확장시켰다. 특히 이번 전시 《무관심영역》에서 선보이는 라오스에서 수집하고 전환한 폭탄 잔해를 녹여 만든 알루미늄 그릇 작품은 강렬한 개념적 전환을 보여준다. 폭탄인 살상 물질을 생명을 먹기 위한 도구인 식기로 바꾸는 행위는 물질을 통한 윤리적 재기호화다. 전쟁의 잔재를 생활도구로 재구성함으로써 작가는 폭력의 흔적을 ‘소비 가능한’ 기념으로 전유하는 관습을 비판하는 동시에, 그 잔해를 통해 지속적으로 기억하고 의례할 수 있는 새로운 장치를 제안한다. 이렇듯 이 프로젝트의 미학적이고 사회적인 함의는 다층적이다. 우선, 전쟁의 물질성(메탈, 잔해, 자국)을 직접 만지고 녹이는 작업은 역사적 트라우마의 ‘물질로 남은 각인’에 다가가는 실천이다. 그렇게 재형성된 물건을 식탁에 올리는 상상은 일상성과 기념의 접속을 가능케 한다. 기념은 더 이상 막연한 서사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식탁 위의 도구를 통해 생활의 순간으로 침투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과정은 전쟁의 희생자들이 ‘무엇을 잃었는가.’를 물을 뿐만 아니라,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아갔는가.’를 묻는 방식으로 기억을 재구성한다. 바슐라르는 인간이 특정 물질과 접촉할 때 발생하는 “물질을 통해 작동하는 상상력”(material imagination)을 강조했다. (위의 책, pp. 1–10.) 작가가 포착한 금속 잔해를 손에 쥐고 녹여내는 행위는 단순한 조형이 아니라, 물질 자체에 내재된 폭력의 기억과 신체적으로 대면하는 과정이다. 그의 식기 작업은 물질의 기억을 새로운 사용 가치로 재기호화하며, 파괴의 물질이 다시 생명의 도구로 전환될 수 있는 상상력을 펼친다.

:::예술을 통해 현실을 되짚어보게 만드는 실천과 ‘강렬한 거주’:::

송성진의 작업은 현장 리서치(현장 방문, 인터뷰, 사진 및 동영상 수집), 물질을 통한 수집(흙, 소금, 금속, 재활용품 등), 그리고 재현 혹은 의례화(설치, 조형, 사운드, 애니메이션)라는 세 가지 활동이 계속 이어지며 결합한다. 이러한 방법론은 현장성과 재료성을 미학적 원천으로 삼는 동시에, 이 과정 자체가 이미 ‘현장 정치학’을 구성한다. 그의 리서치는 단순한 자료 수집이 아니라, 장소에서 발생하는 불가시적 서사를 재구성하고, 소거된 존재들의 목소리를 다시 호출하는 윤리적 행위다. 예를 들어, 지난 바다미술제에서 파도가 들이치는 다대포 해안에 설치된 도시 모형은 자연의 힘이 도시의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내는 장면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로힝야 난민 관련 리서치에서는 공동체의 역사, 폭력의 시간성, 이주와 추방의 조건이 하나의 예술 실천적 구조 안에 다시 배치되었다. 그리고 돼지 살처분 터, 폭탄의 흔적, 모래톱 위 흔들리는 집 등은 모두 인간이 만든 폭력과 자연의 압력을 동시에 간직한 장소들이다. 다시 말해, 송성진의 작업에서 ‘강렬한 거주’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한 열쇠이다. 이는 무너짐과 위태로움 속에서도 ‘아직 여기에서 누군가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마지막 징후이다. 그의 집들은 사람이 이미 떠나버린 비거주 공간처럼 보이지만, 창문에서 켜지는 불빛은 “이곳에 아직 삶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증언이다. 이 불빛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사라져가는 존재를 위해 켜는 흡사 의례 행위이며, 집단적 기억과 감각을 소환하는 매개이다. 이렇듯 그의 미적 행위는 동시에 윤리적 실천이며 장르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회정치적 서사이다. 바로, 송성진의 작업은 ‘미학’과 ‘정치’의 고전적 대립을 해체하고 있다. 주거의 모듈을 만들고, 돼지의 흔적을 추적하며, 폭탄 잔해를 식기로 재구성하고, 밭에서 깻잎을 키우는 그의 행위들은 배제된 존재들, 잊힌 시간들, 가려진 흔적들을 드러내고 그들과 더불어 생각하는 법을 제안한다.
작가가 전개해오고 있는 그간의 전시장에서 관객은 불편함을 경험해왔을 것이다. 인간이 살처분한 돼지 형상의 설치, 갯벌의 흙더미, 폭탄이 가해져 땅에 새겨진 구덩이들, 폭탄을 활용한 배와 건축, 변형된 식기들 등 이번 전시까지 펼쳐놓는 작가의 재현과 변형의 이미지들은 관람의 쾌감이 아니라 성찰의 내면으로 인도한다. 작가가 작품 안에서 시각적으로 ‘켜는 불빛’은 단지 과거를 비추는 조명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여기(現場)에서 무엇을 지키고 기억할 것인지를,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지 묻는 지속적인 요청이다. 송성진의 작업이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우리가 잊어버린 존재들, 사라진 시간들, 남겨진 흔적들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바슐라르에게 집은 “우주를 품고 있는 최초의 세계”였다. (위의 책, pp. 24–26.) 거주에 관해 이십년 넘게 천착해온 송성진의 집 작업은 완전한 세계를 품지는 못하지만, 파괴된 세계의 잔여를 간직한 채 다시 세계를 시작하기 위한 가장 작은 우주적 단위로 기능한다. 그가 켜는 불빛은 잔해 위에 놓인 작은 우주를 다시 가동시키는 시발점이며, 무너진 세계에서 다시 “함께 살기”를 꿈꾸게 하는 최소한의 신호이다. 그의 세계에서 불을 켠다는 행위는 기억을 켜고, 관계를 켜고, 사유를 켜는 일이다. 송성진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강렬한 거주’는 단지 집의 물리적 상태가 아니라, 존재를 어떻게 존중하고,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 (2018년 이후 송성진은 ‘밭’과 농사라는 장(場)으로 작업을 옮긴다. 깻잎 농사 프로젝트와 700평의 밭 임대는 예술을 실제 생계와 노동의 장인 생산의 장으로 환원시키려는 시도로 읽힌다. 이 공간에서 작가는 이주노동자들과의 대화, 농업 기술의 전수, 생산물의 유통 가능성까지 고민하며, 예술을 단순한 표상이나 전시 대상으로만 보지 않는다. 이는 지속가능성의 실천적 전환으로서 노동과 농업의 구조와 예술의 사회적 구조를 비례하여 재고하는 실천으로 볼 수 있다.) 에 대한 윤리적 태도이다. 따라서 송성진의 작업은 유토피아적 사유의 실패 이후에도 여전히 가능성을 탐색하는, 예술을 통해 현실을 되짚어보게 만드는 실천으로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오늘 어떤 불을 켤 것인가? 그리고 누구를 위해 그 불을 켤 것인가?” 결국 송성진의 ‘강렬한 거주’는 르페브르가 말한 ‘삶의 공간’을 복원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도시계획이나 자본으로 표상된 공간에 의해 삭제된 경험, 감각, 기억의 층위를 다시 활성화하는 과정이며, 흔적과 리듬을 통해 ‘살기 위한 공간’을 재생산하는 예술적 실천이다. 그리고 다음 질문을 낳는다. “이 세계가 무너지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어디에 머무르며, 누구와 함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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