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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민주주의에 감춰진 시한폭탄

by 박카스

『6장 민주주의에 감춰진 시한폭탄』에서는 민주주의가 외부의 공격이 아닌 내부에서 스스로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합법적으로 선출된 지도자들이 법과 제도를 악용해 권력을 강화하고, 민주주의의 핵심 규범인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무시할 때, 민주주의는 점진적으로 붕괴된다. 특히 정당과 정치 엘리트가 반민주적 인물을 견제하지 않고 오히려 협력할 경우, 민주주의는 자멸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고 경고한다.




1936년 11월에 루즈벨트는 61퍼센트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높은 인기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 뉴딜 정책과 관련하여 다양한 법안을 종종 의문스러운 잣대를 적용하여 위헌으로 판결했다. 이로 인해 루즈벨트 행정부의 많은 정책이 위기를 맞았다. (...)


1937년 2월 루즈벨트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된 지 2주가 지났을 때 그는 연방대법원의 규모를 확대하겠다는 의중을 밝혔다. 그의 정적들이 “대법원 재구성 계획”이라고 부른 이 제안은 헌법을 파고든 것이었다. (...)


루즈벨트는 뉴딜 프로그램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법적 기반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법안이 통과된다면 틀림없이 위험한 선례로 남을 것이다. 대법원이 정치의 전쟁터가 될 것이며 그 구성과 규모, 임명이 악용될 위험이 높아질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된다면 미국은 페론의 아르헨티나, 혹은 차베스의 베네수엘라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


다행히 그 규범은 유지되었다. 루즈벨트의 대법원 재구성 계획은 그가 임기에 추진했던 다른 어떤 정책보다 거센 반발을 받았다. 공화당은 물론 언론, 유명한 법률가, 판사, 그리고 놀랍게도 많은 민주당 인사들까지 반대에 나섰다. 결국 루즈벨트의 제안은 몇 달 후 종적을 감췄다. 그는 자신의 당이 장악하고 있던 하원에서도 버림을 받았다. 대공황과 같은 중대한 국가 위기 상황에서도 미국의 견제와 균형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했던 것이다. (P. 153~155)


민주당과 공화당이 서로를 정당한 경쟁자로 받아들이면서 양극화 현상이 서서히 희석되었고, 이러한 흐름은 향후 수십 년 동안 미국 민주주의의 특성으로 자리 잡았다. (...)


상호 관용의 규범은 이어 제도적 자제를 강화했다. 19세기 말 비공식적인 모임과 협상의 문화가 정치의 모든 영역으로 스며들면서 합리적인 견제와 균형 시스템이 기능하기 시작했다. (...) 영국 학자 제임스 브라이스는 <미국 연방>이라는 제목의 두 권짜리 역작에서 미국의 정치 시스템을 돌아가게 만드는 것은 헌법이 아니라, 그것의 “활용”, 즉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이라고 지적했다. (P.161~163)


헌법 체계가 우리의 기대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가 절묘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그 둘은 민주주의의 감시견이다. 다른 한편 입법부와 사법부는 행정부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협조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제의 규범이 등장한다. 대통령제 기반의 민주주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권력기관이 그들에게 주어진 힘을 최대한 발휘해서는 안 된다.


자제의 규범이 무너질 때 권력 균형도 무너진다. 정당 간 혐오가 헌법 정신을 지키려는 정치인들의 의지를 압도할 때 견제와 균형 시스템은 두 가지 형태로 무너지게 된다. 가정 먼저 야당이 입법부와 사법부를 장악하면서 권력이 분열되었을 때 헌법적 강경 태도가 위험 요인이 된다. 이러한 국면에서 야당은 그들의 제도적 특권을 최대한 휘두른다. 그들은 정부의 돈줄을 죄고, 대통령의 사법부 임명을 전면 거부하고, 심지어 대통령 탄핵까지 모의한다. 이럴 때 입법부와 사법부는 대통령을 견제하는 감시견이 아니라 투견이 된다.


다음으로 여당이 입법부와 사법부를 장악함으로써 권력이 집중될 때 강경 태도가 아니라 규범의 포기가 위험 요인이 된다. 정당 간 적개심이 상호 관용의 규범을 압도할 때 의회를 장악한 여당은 헌법적 의무보다 대통령의 권력 강화에 집중한다. 그들은 야당의 승리를 막기 위해 감시견의 역할을 저버리고, 대통령의 탄압적이고 불법적인 전제 행위를 묵인한다. (...)


행정부 힘이 막강할 때 대통령은 입법부와 사법부를 무시하고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 행정부의 정책이 추진되지 못할 때 대통령은 행정명령이나 선포, 지시, 행정협정, 혹은 대통령 각서 등 의회를 우회하여 법안을 실행에 옮길 방법을 모색한다. 헌법은 이를 막고 있지 않다. (...)


워싱턴은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행동이 향후 행정부 권한 범위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 나의 많은 행동이 선례로 남을 것이다.” (...)


워싱턴은 오로지 위헌 여지가 있는 법안에 대해서만 거부권을 행사했다. 8년의 임기 동안 그가 거부권을 행사한 것은 두 차례에 불과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비록 내 생각과 많이 달랐지만, 입법부에 대한 존경의 차원에서 여러 법안에 서명했다.” 또한 자칫 의회 권한에 대한 침해로 보일 수 있는 행정명령을 최대한 자제했다. 워싱턴은 평생에 걸쳐 “권력을 기꺼이 내려놓음으로써 권력을 얻는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P.162~165)


규범의 중요성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제도는 다름 아닌 필리버스터*다. 앞서 언급했듯이 상원 의원은 1917년 이전에도 필리버스터를 통해 의결 과정을 무기한 연장함으로써 모든 입법을 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상원 의원 대부분 언제나 활용할 수 있는 필리버스터를 “마지막 남은 절차적 무기”로 여겼다. (...)


견제와 균형 시스템과 관련하여 입법부의 또 다른 중요한 권한은 연방 대법원 및 주요 부처 인사의 대통령 임명권에 대한 “조언과 동의”다. 이 권한은 헌법에 명시되어 있지만, 실질적인 범위는 다양한 해석과 논의에 열려 있다. 이론적으로 상원은 대통령이 측근 인사를 내각이나 대법원에 임명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다. 헌법은 의회의 이러한 권한을 보장하지만, 현실적으로 행정부 기능을 방해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상원은 이러한 특권을 함부로 쓰지 않았다. 부분적인 이유는 대통령이 행정부를 구성하고 연방대법원 대법관을 임명하도록 허용하는 상원 내 규범 때문이다. (...)


마지막으로 헌법이 입법부에 보장하는 가장 폭발적인 권한은 대통령 탄핵권이다. 이미 100년 전에 영국 학자 제임스 브라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 권한은 “의회 무기고 안에서 가장 파괴적인 무기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너무도 파괴적이기 때문에 일반 상황에는 적합하지 않다.” 헌법학자 키스 휘팅턴은 대통령 탄핵 권한을 섣불리 사용할 때 “선출된 지도자의 힘을 약화하고 선거 결과를 뒤집으려는 당파적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P.172~174)


미국의 민주주의 규범은 수차례 도전과 위기를 맞았다. 세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첫 번째는 이미 다루었던 것으로, 대공항과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루즈벨트 행정부 권력이 전례 없이 비대해졌던 시절을 말한다. 루즈벨트는 대법원 재구성을 넘어서 일방적인 행보를 고집함으로써 전통적인 견제와 균형 시스템에 심각한 위해를 가했다. 그는 임기 동안에 행정 명령을 총 3000번이나 활용했다. 이는 연간 평균 300건 이상으로 당시로서, 혹은 이후로도 비교 대상을 찾을 수 없다. 세 번째(그리고 이후로 네 번째) 임기에 도전하겠다는 그의 야망은 대통령 임기를 두 번으로 제한하는, 150년 된 역사 규범을 파괴해 버렸다.


그럼에도 루즈벨트는 독재로까지 넘어가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로 양당이 협력해서 대통령의 월권에 저항했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다. (...)


다음으로 미국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두 번째 심각한 위협은 매카시즘*의 등장이었다. 1950년대 초 매카시즘은 상호 관용 규범을 위협했다. 공산주의 세력이 성장하면서, 특히 1940년대 말 소련이 핵을 보유한 초강대국으로 떠오르면서 미국 사회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인들은 당파적 목적을 위해 반공주의를 감정적인 측면에서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치 경쟁자를 공산주의자로 몰거나 이에 동조하는 인물로 낙인을 찍는 방식으로 유권자의 표를 빼앗았다. (...)


상호 관용에 대한 매카시즘의 파괴 활동은 1952년에 절정을 이루었다. (...)


최고의 전환점은 1954년 생방송으로 중계된 육군-매카시 청문회였다. 여기서 매카시는 육군참모총장의 수석 고문인 조지프 웰치에게 일격을 당했다. 웰치는 매카시의 근거 없는 비난에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품위라는 걸 모르십니까? 결국 모두 포기하기로 한 겁니까?” 이후 매카시의 인기는 추락했고, 6개월 후 상원은 그에 대한 불신임을 결의했다. 이는 그의 정치 생명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


미국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세 번째 위협은 닉슨 행정부의 전제주의 행보였다. 1950년대에 닉슨은 상호 규범을 완전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독재를 향한 움직임까지 공식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야당과 언론을 적으로 규정했고, 그와 그의 비서실은 무정부주의자나 공산주의자와 같은 국내 적들이 국가와 헌법 질서를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행정부의 불법 활동을 정당화했다. (...)


닉슨 행정부는 기자와 반정부 인사, 민주당 전국위원회, 그리고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 의원과 같은 주요 민주당 인사에 대한 광범위한 도청과 감시를 시작으로 점차 민주주의 규범과 멀어졌다. (...)


1972년 대선의 민주당 후보에 대한 공격으로, 이는 결국 실패로 끝났던 워터게이트 사건의 시발점이었다.


널리 알려졌듯이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닉슨 행정부의 불법적 파괴 활동은 거대한 반발에 직면했다. (...)


어빈이 이끄는 특별위원회는 양당의 합의에 따른 것으로서, (...) 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열 명 이상의 공화당 상원 의원들이 민주당 의원과 손을 잡고 독립적인 특검을 요구했다. 그리고 5월에 아치볼드 콕스가 특검을 맡았다. (...) 콕스는 닉슨에게 테이프 공개를 요구했고, 양당 지도부 역시 힘을 보탰다. 그러나 닉슨은 완강하게 저항했다. 테이프를 넘겨달라는 요청을 묵살하면서 콕스를 해임했다. (...)


콕스 해임은 닉슨 대통령 사임에 대한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


닉슨이 골드워터에게 탄핵에 반대하는 표가 얼마나 남았는지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많아야 열 표입니다. 아마도 그보다 더 적을 것입니다.” 이틀 후 닉슨은 사임했다. 미국 의회와 법원은 양당의 협력에 힘을 얻어 대통령의 권한 남용을 저지할 수 있었다. (P.175~181)


미국 민주주의 제도는 20세기를 거치는 동안 여러 차례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매번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했다. 민주주의 가드레일은 온전히 유지되었고 양당정치인, 때로는 사회 전반이 민주주의를 침해하는 시도에 저항했다. (...)


그러나 이제 우리는 경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


미국 민주주의 규범은 차별에 근간을 두었다. 정치 공동체가 대부분 백인의 영역으로 제한되었던 동안 민주당과 공화당에는 뚜렷한 공통점이 존재했다. 정당은 서로의 존재를 위협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시작된, 그리고 1964년 시민권법과 1965년 선거권법*을 통해 가속화된 미국 사회의 인종 포섭의 과정은 마침내 미국을 완전히 민주주의 사회로 바꾸어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화 흐름은 미국 사회를 양극화시켰고, 재건 시대 이후로 이어져 내려온 상호 관용과 자제의 규범에 최고의 도전 과제를 안겨다 주었다. (P.181~182)




* 미국과 한국의 필리버스터 제도는 모두 소수파가 다수의 일방적인 법안 처리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이지만, 운영 방식과 정치적 맥락에서는 차이가 있다. 미국 상원의 필리버스터는 무제한 토론을 통해 법안 표결을 지연하거나 저지할 수 있으며, 이를 종결하려면 상원의 60명 이상이 찬성하는 종결 투표가 필요하다. 이로 인해 필리버스터는 실질적으로 입법을 막는 강력한 수단으로 작용한다.


반면, 한국의 필리버스터는 2012년 국회법 개정으로 도입된 제도로, 본회의에서 일부 법안에 대해 의원들이 순서대로 무제한 발언을 할 수 있게 허용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국회의장이 종결 동의를 표결에 부칠 수 있고, 과반수 찬성으로 토론을 종료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보다 제약이 많고, 주로 여론 환기나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필리버스터는 입법 과정에서 매우 강력한 제동 장치로 작용하는 반면, 한국의 필리버스터는 제한된 범위에서 정치적 상징성과 저항의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 매카시즘은 1950년대 초 미국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과도한 불신과 공포 속에서 벌어진 반공주의 운동을 말한다. 이는 당시 상원의원이던 조지프 매카시가 주도했으며, 공산주의자나 그 연루자로 의심되는 인물들을 증거 없이 고발하고 탄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정부, 군, 언론, 영화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이 조사를 받고 해직되거나 사회적으로 매장되었으며, 표현의 자유와 기본권이 심각하게 침해되었다.


결국 매카시의 주장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열풍은 사그라들었지만, 매카시즘은 미국 현대사에서 반민주적 광풍의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 있다.


* 미국의 1964년 시민권법과 1965년 선거권법은 인종 차별을 종식시키고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제정된 핵심적인 민권법이다.


1964년 시민권법은 공공장소에서의 인종 차별을 금지하고, 고용과 교육 등에서 차별을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이 법은 특히 남부 지역의 분리 정책(예: 흑인과 백인의 학교나 식당 분리)을 철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법 통과 당시에는 남부 출신 상원의원들의 강력한 필리버스터가 있었으나, 결국 이를 돌파하고 제정되었다.


1965년 선거권법은 투표권 행사에서의 인종 차별을 금지한 법으로, 특히 남부에서 흑인의 투표를 방해하던 문해력 시험, 투표세 등의 장벽을 철폐했다. 또한, 연방 정부가 차별 가능성이 있는 주의 선거 제도에 개입할 수 있도록 했다.


두 법 모두 미국 내 인종 평등과 민주주의 확대에 있어 역사적으로 큰 전환점을 이룬 법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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