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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인터뷰를 마치며, 번외 편/ 초단편소설

by 천둥


광장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소개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게 느껴진다. 그때의 감정과 온도와는 달라진 것이다. 파면선고가 났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완연히 달라진 반응이 온다. 계속 같은 주제로 인터뷰를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시리즈를 마무리하면서 소개하고 싶은 글이 있다. 광장에서 만난 이의 글이다. 커미션을 넣어 받았다. 주제는 '광장 이후 우리가 원하는 세계에서 사는 우리들의 모습'. 제목은 '천국'이다.

원래는 개인소장을 위해 커미션을 했는데, 인터뷰 마무리로 딱 좋을 것 같아 번외 편으로 덧붙인다. 왜 굳이 이 글을 덧붙이냐면, 우리가 원하는 천국을 소개하고 싶어서다. 일단 내게는 천국이 되었다. 그의 말대로 '각자의 조각난 천국'이기는 하지만, 천국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 어려운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다. @Seven_Ryo7(https://x.com/Seven_Ryo7?t=QDVvZN1dWweqaPdUX_KZoQ&s=09)


그동안 읽어주시고 관심 가져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한 마리가

철탑 위를 날아간다.

오래전 누군가가 그 위에서 비닐과 천막으로 둥지를 틀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새는 그저 바람에 잘게 흔들리는 그것을 가로질러 제 무리를 찾아 날갯짓한다. 그들은 아마 도시 곳곳에 세워진 분수대 주변에서 깃을 다듬고 있을 것이다. 본디 몸을 다듬는 행위와 청결한 것을 좋아하는 습성을 따라서.

한때 날개 달린 도시의 빈민이었던 그들―비둘기―이 봄철마다 가지가 뭉텅뭉텅 잘리는 가로수로부터 머물 곳을 빼앗기지 않고 투명하고 반짝이는 유리창에 부딪혀 죽지 않고 덥다 못해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갈증과 화상과 역한 냄새에 허덕이지 않게 된 사건은 갑작스럽고도 점진적으로 일어났다. 모든 혁명과 변화가 그러하듯이. 보에 갇혀 썩어가던 강물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벌겋게 뒤집혀 흙 맺힌 산에는 풀과 나무가 자라나 새순을 올리기 시작했고 온갖 쓰레기가 쌓여 있던 바다에는 연안까지 물살이들이 돌아와 알을 낳고 대를 이어갔다.

그리고 인간들은―그렇다, 이 모든 세계의 희망이자 절망인―여전히 들판에 모여 그들 나름의 싸움을 계속해나가고 있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하여. 어떤 사람도 소외되지 않는 세상을 위하여. 누구도 억울하고 허망하게 죽지 않는 세상을 위하여. 각자의 손에 들린 조각난 천국들을 애써 모아 맞추기 위하여…….

바람을 타고 날개를 퍼덕이던 새는 잠시 어떤 들판에 내려앉았다. 몇 달 전 아스팔트와 벽돌이 모두 걷히고 흙과 잔디가 깔린 곳이었다. 갓 자란 들풀이 발걸음에 짓이겨진 냄새가 진동하는 5월. 그 위에서 새는 근방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에 벌레라도 몇 마리 나오지 않을까 하여 땅을 몇 번 쪼아댔다. 어차피 그들의 말은 알아들을 수도 없었기에. 그러나 안타깝게도 벌레를 불러내기에는 진동이 약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새는 그들에게 다가가기로 했다.


“어? 비둘기 온다.”

“비둘기?”

“오, 비둘기.”

“진짜 오네?”

“비둘기 안녕-”

숲속 버섯들처럼 제멋대로 둥글게 둘러앉은 이들은 입에 빵과 과일을 집어넣으며 깔깔대고 있다가 시선을 한 곳으로 모았다. 뒤뚱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새는 누구에게서 먹을 것을 요구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야, 누가 간택당하나 내기할까? 무리 중 누군가가 도발적으로 외치자 모두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제 음식을 떼어 내밀며 새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쪽이야, 아니 이쪽으로 와, 착하지, 옳지, 그렇지!

새는 고민에 빠졌다. 머리가 하나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모든 음식을 다 먹을 수 있다면 참 행복했겠지만, 도무지 그럴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는 눈을 몇 번 빠르게 깜빡였다.

바로 왼편에 수줍게 손을 내밀고 있는 얼굴이 둥글고 머리가 짧은 사람이 있었다. 인간들은 그를 ‘이카’라고 불렀다. 오른편에는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를 높게 묶어 늘어뜨린 ‘홍가’가 있었고, ‘이카’와 ‘홍가’ 사이에는 ‘세영’, ‘녹림’, ‘유진’, ‘럭스’, 그리고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여러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그를 보고 웃고 있었다.

웃는 건 좋은 거야. 웃고 있는 사람 중에서 그에게 발길질을 하거나 위협을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새는 원 안을 느릿느릿 거닐다가, 가장 손끝이 가늘고 섬세한 입꼬리를 가진 이에게로 다가가 부리로 빵조각을 떼어먹었다.

“와, 유진 동지한테 갈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알고 보니까 드루이드*였던 거 아니에요?”

럭스와 세영이 손가락질을 하며 몇 번을 규탄하고 빵 조각을 가운데로 던지자 나머지 이들도 떼어낸 빵을 던져 주었다. 그들 사이를 내키는 대로 오가며 배를 채우는 동안 계속 대화가 이어졌다.

“근데 이카, 실밥은 잘 풀었어? 지금 여름이라 덧나기 쉬울 텐데.”

녹림이 묻자 이카가 대답했다.

“아, 네. 사실 그동안 땀 차는 부분에 조금 염증이 생겨서 걱정하긴 했는데 소독 자주 해 주니까 다행히도 금방 가라앉았어요. 당분간은 좀 시원한 재질로 입고 다니려고요.”

이카는 그렇게 말하고 얇은 겉옷을 들추어 가슴 밑, 갈비뼈가 시작되는 부분에 붉게 그어진 두 개의 호를 보여주었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그곳을 따라 유선과 지방들이 긁혀나간 자리는 납작하고 편평했다. 붕대나 압박용 속옷으로 누르지 않아도 충분히 가볍고 자유로울 만큼. 수술이 잘 되어서 다행이에요, 옷을 다시 내리고 평이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면서도 이카는 가끔 이것이 꿈이고 꿈이 현실인 것만 같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떤 꿈에서 그는 여전히 새벽에 일어나 가장 먼저 가슴을 단단하게 누르는 보호대를 꺼내어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을 정도의 공간만을 남겨두고 몸을 조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니까. 깃발을 들고뛰는 것이 머리가 핑핑 돌고 어지러울 정도로 벅찼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웃는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하게 가슴을 들썩이며 웃는다.

“아, 그렇지. 세영 씨 조만간 공연 있다면서. 밴드는 잘 되고 있고요?"

이카가 문득 묻자 세영은 급히 정신을 차린 듯 가방에서 무언가를 뒤지기 시작한다. 손에 잡혀 들려 나온 것은 단색으로만 이루어져 있는데도 단번에 눈길을 휘어잡는 세련된 디자인의 홍보물. 세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쾌한 말투로 그것을 한 장씩 앉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말했다.

“자, 우리 밴드 정상영업 합니다. 이날 안 오면 동지팥죽 되는 거야.”

“야, 그동안 영업을 했어야 정상영업이지. 이거 첫 공연이잖아.”

“아이, 그런 건 좀 넘어가주고요.”

“내가 한 번만 봐준다.”

럭스가 가볍게 눈을 흘기고는 삼 주 남짓하게 남은 날짜를 들여다본다. 밤새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깎아냈을 이미지들의 귀퉁이를 매만지다 묻는다.

"너 요즘도 디자인 외주 받아?"

그러자 다시 자리에 앉은 세영이 답한다.

"받지. 가끔. 왜?"

“아니 그냥, 요즘도 호구 잡히고 사나 해서.”

“에이, 요즘은 안 그러지.”

못 그래, 정부에서 예술인 보호 정책 빡세게 실시한 지가 언젠데. 이제 특정 규모의 거래는 일정 금액 이하로는 절대 못 하게 되어 있어. 공식적으로 나오는 거면 다 기관 거쳐서 인증받아야 돼. 여기저기서 설명을 덧붙였다.

“다행이네. 이 녀석아. 난 네가 또 십만 원 받고…….”

“아 또! 그만 얘기해. 진짜 쪽팔려!”

“하지만 사실이죠?”

정부가 널 살렸다, 진짜. 럭스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담배를 피우겠다며 건물 뒤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홍가가 저도 한 대 피우고 오겠다며 재빠른 걸음으로 럭스를 뒤따랐다.

“럭스!”

“어, 뭐야. 왜 따라왔어?”

“당연히 담배 피우려고 왔지. 나 하나만.”

“아이스 스톰 괜찮아?”

“응.”

잘 정비된 흡연구역 안에서 두 개비의 담배에 불이 붙는다. 몇 모금을 태울 때까지 말이 없던 두 사람은 두어 번 정도 재를 떨고 나서야 눈을 마주한다.

“있잖아.”

“어.”

“나 지난번에 항공정비 넣은 거 2차 면접 합격했어.”

“뭐?”

“진짜야. 마지막 어떻게 될지 몰라서 아직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 안 했는데.”

“아니, 거기 엄청 빡세다고 그랬잖아. 일단 너무 잘 된 일이다. 정말 축하해. 그럼 이제 임원면접만 남은 거야?”

“응. 사실 조금 떨려. 면접 준비할 때 다들 많이 도와줬는데도.”

럭스는 인생의 모든 과정을 ‘제때’ 끝냈어야만 했던 시절에 중졸과 자퇴라는 딱지를 달고 거칠고 척박한 시간을 보내야 했던 그의 옛일을 알기에 한참을 얼굴만 바라보다가 개라도 쓰다듬듯 머리를 석석 쓰다듬어 주었다. 잘 됐다. 정말 잘 됐다. 앞으로도 잘 될 거야. 그런 말들을 손바닥에 꾹꾹 눌러 담아서.

“쉽지는 않겠다.”

“응.”

“그래도 잘할 수 있지?”

“당연하지.”

누가 가르쳤는데. 홍가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정오의 태양처럼 밝고 해사하게. 누군들 이 웃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한 치의 의심 없이 말할 수 있는 그런 웃음이었다. 럭스는 또 한참 말이 없다 단호하게 한 마디 내뱉었다.

“야, 재 떨어.”

“네.”

그들이 돌아가자 그 자리에는 다른 새 몇이 더 날아와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둘이 무슨 얘기했어? 비밀.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여기 있다, 이놈아. 그런 말이 오가는 동안 건물 앞 들판에서는 유진이 주하와 담소를 나누었다. 움직임이 부드럽고 조심스러워서 그런지 유난히 몰려드는 새들 탓에 그들은 난처하게 웃으며 제 몫의 빵을 더 떼어주었다. 그때 누군가가 멀리서 새빨간 옷깃을 휘날리며 그들을 향해 소리치며 달려왔다.

“아, 왜 편의점 샌드위치를 먹고 있어!”

맛도 없는 걸! 휘날리는 머리카락에서는 졸아든 설탕과 녹은 버터와 겹겹이 쌓인 밀가루 반죽이 잘 구워진 풍미 깊고 달큰한 냄새가 진동을 했고, 숨을 고르며 바닥에 털썩 앉아버리는 이의 양손에는 빵이 가득 든 커다란 상자가 들려 있었다. 아니, 너 퇴근 늦게 한다길래 먼저 점심 먹고 있었지. 녹림이 변명하듯 대답하자 춘류는 고양이들이 흔히 짜증을 내듯 눈을 가늘게 뜬 채 머리를 녹림의 어깨에 대고 마구 문질렀다.

“내가 아까 일찍 끝난다고 카톡 했는데! 노느라 바빠서 안 봤잖아!”

“아, 카톡을 했어?”

“이런다니까!”

그 사이 서희는 슬금슬금 손을 뻗어 상자를 열더니 눈이 휘둥그레져서 무엇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먹어도 돼요.”

서희의 표정을 읽은 춘류가 녹림의 무릎에 누워 심통이 난 표정으로 말하자 서희가 되물었다.

“이거 다 직접 만든 거예요?”

“네, 저도 이제 반죽팀 인수인계받고 연습도 충분히 다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공정 다 할 수 있거든요.”

이거는 크림브륄레라 빨리 먹어야 맛있고, 이거는 속에 햄이랑 루꼴라랑 치즈. 그거? 그거는 토마토랑 바질이랑 위에 모짜렐라 치즈 얹은 건데 되게 맛있어. 먹어봐. 퀸아망은 안에 사과잼 들어있어서 되게 다니까 녹림은 다른 거 먹고…….

춘류가 바삐 설명하는 사이 상자는 금방 비어갔고 휘어진 들풀 사이로 빵가루만 무수히 흩어졌다. 새는 커다란 조각 몇 개를 두고 참새와 날개를 퍼덕이며 싸우다가 자신의 배가 어느 정도 차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는 피곤한 짓은 관두기로 하고 양지바른 곳에 앉아 털을 부풀리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무지갯빛 깃털로 가볍게 덮인 귓가에는 이러저러한 말들이 스쳤다. 대부분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병든 자.

약한 자.

괴로운 자.

마음이 찢어진 자.

눈물이 그칠 날이 없는 자.

그런 자들에게 어떻게 가닿을 것인가. 어떻게 함께 울 것인가. 어떻게 위로하고 잡아끌어 빛을 보게 할 것인가. 어떻게 삶의 다음 발을 내딛도록 도울 것인가…….

그것은 태초부터 인류의 숙제였으며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리라는 사실을 새는 모른다. 문명의 시작이 부러졌다가 다시 붙은 정강이뼈로 정의되는 까닭이 왜인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새는 지금의 세상이 참으로 평온하다고 느낄 뿐이다. 어딜 가나 먹을 것이 있고 어딜 가나 한 몸 기댈 풍성한 가지가 있고 어딜 가나 마음 놓고 씻고 마실 물이 솟아오르니 말이다. 그것들이 어떠한 싸움 끝에 누구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일들인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 그곳까지 다다르기에 새는 너무 작고 미약하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그를 위해 누군가가 대신 싸워온 것이겠지만.


다시 깔깔대는 소란한 웃음소리. 이제 일어날까? 슬슬 가서 자리 잡아야지. 옷을 정리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땅에 길고 단단한 막대가 박힌다. 그로부터 색색의 기旗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간다.

『녹림칠십이채 보문산지부』, 『빨강은 혁명의 색이다』, 『성소수자를 차별하지 마세요! 우리의 친구일 수도 있는 게 아니라 나다! 나라고 이 자식들아!』, 『YOU ARE BEING WATCHED』, 『광장에서 골병든 사람들』, 『노동자는 소모품이 아니다!』, 『전술인형노동조합총연맹』, 『INDIFEDNEDCE』, 『수호자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천년소림』, 『체력이 없는 협회』……. 초여름 낮의 선선한 실바람에 흔들리는 깃발들은 오래 공중에서 흔들린 탓에 빛이 바래 조금씩은 제 색을 잃었으나 그 또한 그것대로 아름다웠다. 가장 먼저 기를 세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럭스는 문득 그 말을 떠올렸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들이 지금 깃발을 들고 향하는 곳은 집창촌 재개발 지역이다. 여전히 포주들만이 보상금을 무더기로 받으며 창녀들은 맨몸으로 쫓겨나 길바닥에서 손가락질을 받고 죽어가야만 하는 세계. 그 높고 두꺼운 성벽을, 우리는 또다시 부수러 간다. 그 틈 사이에서 또 다른 천국을 기어코 찾아낼 것이다. 천국은 언제나 침노하는 자의 것이므로.


다시 새 한 마리가 그들의 머리 위를 날아간다.



noname01.bmp Gustave Dore, 『Paradiso』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W)에서 자연의 힘을 다루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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