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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학부모회'로 나아가려면

천둥 편: 부모에서 학부모 '되기'

by 천둥

키키: 천둥은 어때? 새로운 학부모회를 위해 어떤 제안을 하고 싶어?


천둥: 우선 학부모회의 역사를 인정하자는 말부터 하고 싶어. 그간의 역사를 아는 것만으로도 나는 큰 힘이 되었거든. 학부모회라는 것이 처음에 어떻게 탄생했고 지금까지 어떻게 변화해왔고 교육청에서는 왜 그렇게 교육 3주체를 강조하게 되었는가를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다음에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조금은 알아차릴 수가 있잖아.

사실 여전히 파벌을 유지하고 확장하려는 사람들을 만나면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거든. 학부모 활동을 한 대가로 아이의 장학금 같은 혜택을 바라는 사람들. 학부모회장이나 운영위원 자리를 마치 지역유지나 되는 걸로 착각하면서 거들먹거리는 사람들... 근데 그들은 그저 멈춰있는 거구나, 그것이 지금까지는 교육 발전을 위해 나름 유용했구나, 인정하게 되니까 그다지 밉지 않더라.
그걸 몰랐을 때는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다 보니 자꾸 비난하는 마음이 들었지. 그런데 학부모회의 역사를 알고 나니 어느 정도 이해가 돼. 과거의 방식은 현재를 유지해주는 바퀴이고, 미래의 방식은 다시 현재를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바퀴라는 생각이 들어.


키키: 맞아, 나도 처음에는 학교 일에 관심 없으면서 오로지 자기 사익을 위해 학교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화가 났던 적이 있었던 것 같아. 근데 결국 그조차도 좌우의 날개처럼 두 개의 바퀴로 균형을 이루었던 거네?

천둥: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다음 단계로 나아갑시다, 하고 손을 내미는 거지.


키키: 손을 내밀고 다음 단계로 가봅시다 라니, 너무 좋네. 근데 그걸 안 받아들일 거 같긴 해.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테니까. 역시, 끼리끼리 파벌의 문제!


천둥: 그건 그래. 사실 다른 학교에 가봐도 학부모들이 가장 공감하는 부분이 파벌이야. 학교도 그렇고. 다들 골머리를 앓지만, 손을 대지 못하고 있어. 쉽게 바뀌지는 않을 거야. 지금이 익숙하니까.

그래서 ‘학부모주체화’가 필요한 거야. 언젠가 어떤 논문에서 ‘학부모주체화’라는 표현을 보고 번개를 맞은 것 같았거든.

아무리 좋은 정책과 제도가 있어도 학부모 스스로 주체적 인식이 없으면 소용없다는 말이야. 아마 푸코가 그랬다지? 사회적 구조와 권력관계에 의해 주체가 형성된다고. 주체화되지 않은 주체들은 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해. 지금은 학부모는 존재하지 않은 거지.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정책을 수정하거나 교장 등 관리자들을 교육해야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전에 우리 학부모 스스로 주체화되는 게 최우선인 것 같아. 학교민주주의나 학교자치를 강조하는데, 교사가 자기주체화되고 학생이 자기주체화되고 학부모가 자기 주체화되어야 자치든 민주주의든 할 수 있는 거겠지.


키키- 결국, 자기 중심이 있어야 돼. 나는 요즘 중심 없는 사람들 때문에 혼란스러워. 여기 가면 이게 맞는 것 같다고 하고 저기 가면 저게 맞는 것 같다고 하는 사람들이 처음엔 미웠는데 요즘은 밉지도 않아. 중심이 없어서 그런다는 걸 이해하게 되었거든.


천둥: 아, 내가 말하는 주체화는 지금 키키가 말하는 중심 세우기하고는 조금 다른 개념이야. 내가 학부모라는 인식 자체, 학부모는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학교 안에서 학부모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는 그 자체가 주체화야. 좀더 쉽게 말하면 학부모 ‘되기’.

무엇이 되려면, 나의 인식도 달라지고 나의 행동도 달라지고 나의 환경도 달려져야 하잖아. 내가 작가가 되려면 쓰는 사람으로서 세상을 바라보고, 글을 써야 하고, 쓰기 위한 환경을 만들겠지. 똑같이 학부모가 되려면 부모를 넘어 학부모로서의 인식이 생겨야 하는데, 여전히 부모로서만 학교를 바라보니까 ‘요구’를 못 벗어나는 거지. 아까 말한 학부모라는 이름 속에 담긴 사회적 의미를 인식해야 한다는 말이야. ‘되기’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부모일지는 몰라도 아직 학부모가 된 적은 없는 거야.

만약 학부모가 하브루타 교육을 듣고, 이 하브루타 교육이 학교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떻게 작동될지, 학부모로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해야 되는지 고민하지 않고 내 아이한테 써먹을 생각만 한다면 부모 교육으로는 의미 있을지 몰라도 학부모 교육으로 확장되지는 못한 거지.

지금까지 학교와 학부모가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실제로 우리 스스로 학부모로서 주체가 되겠다는 의지도 없었던 거야. 학교를 향해 이러니저러니 말할 자격도 없는 거지. 아무리 좋은 교육정책이 주어지고 학교의 태도가 바뀌면 뭐 해. 주체의 의지가 없는걸. 사실 나도 학부모회 활동을 안 했으면 이런 사실을 몰랐지.


키키: 그래서 경험을 해봐야 되는 거 아닐까 싶어. 이건가 아닌가 흔들리면서 경험하지 않고서는 볼 수 있는 게 없는 거 같아.


천둥: 많은 경우 딱 경험만 하지. 학부모 활동 10년 한 사람이 그렇게 많아도 여전히 학부모 주체가 안 돼 있잖아. 그냥 자원봉사를 한 거지 학부모 활동을 한 게 아닌 거야.


키키: 아, 그 말이 딱이다! 자원봉사 말고 학부모 활동.


천둥: 또 하나 강조하고 싶은 건 우리 학부모들에 ‘교육권’이 있다는 사실이야. 그러니까 교사들은 제대로 된 수업을 할 권리가 있고(수업권), 학생들은 제대로 된 수업을 받을 권리(학습권)가 있고, 학부모는 제대로 된 교육을 요구할 권리가 있어.


키키: 교육권이 교사에게만 전담된 건 아니다?


천둥: 아니, 교사에게 전담된 게 아니라, 아예 교사에게는 교육권이 없어. 교사는 수업권이 있을 뿐이야. 수업권과 교육권은 완전히 다른 건데, 그걸 모르는 사람들이 꽤 많아. 수업권은 교사들이 자신의 뜻대로 수업을 할 권리이고, 교육권은 학생과 그 보호자인 학부모에게 있는 거야.

우리가 나라 살림을 국회의원에게 맡기지만 주권은 국민에게 있듯이, 교육권은 교육을 받는 당사자와 그 보호자에게 있는 거지. 즉 교육권은 너무 당연한 민주주의 권리에 해당하는 거야.

키키 말대로 우리는 학부모가 원하는 ‘아이들이 보호받고 성장하는 공동체’를 요구할 수 있어. ‘평가와 기록’이 아니라 진짜 교육을 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어.

내 생각에 교육권이 학생과 학부모에게 있다는 사실을 교사들도 잘 모르는 것 같아. 수업권을 교육권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고. 하긴 우리 스스로도 우리의 권리를 알지 못했으니까.

좀 무거운 얘기지만 하지 않을 수 없네. 작년에 서이초 교사의 죽음으로 교사들이 거리로 나왔을 때, 매년 죽어가는 아이들을 위해서 학부모는 왜 거리로 나오지 않는가, 교사들은 왜 아이들을 위해서는 나오지 않았던가. 학생들은 왜 교사들처럼 거리로 나오지 않는가. 세월호를 통해 ’가만히 있으라‘를 거부하기로 해놓고 왜 가만히 죽어가는가. 그런 생각을 했어.

교육권이 있는 우리 학부모들이 나서서 제발 교육의 방향을 바꿨으면 좋겠어. 입시 위주의 교육이 아이들을 죽이고 있고,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자살1위 오명을 수십년째 이어오고 있고, k-컬쳐의 이면에는 kill-컬쳐가 숨어있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 마치 기후위기가 닥쳐오고 있는 걸 외면하듯이 죽어가는 아이들도 외면하고 있잖아. 이제는 공정한 ’평가와 기록‘ 말고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을 논의할 때도 되지 않았나?


키키: 워워, 진정하고. 교육권 이야기를 마저 해보자. 교육권이 학생과 학부모에게 있다니 좀 부담스러운데? 권한이 있다는 건 어떤 측면에서는 귀찮은 일이기도 하잖아. 그러고 보니 교육 3주권이라는 말도 최근에 나온 말인 거 같은데, 교육3주체라는 말은 언제부터 생겼어?


천둥: 97년 7차 교육과정으로 바뀌면서 만들어진 정책이라고 알고 있어. 7차 교육과정은 세계화와 정보화 시대에 대비한 학생중심교육을 강조하는데, 학습자의 주도성뿐 아니라 사회 속의 상호작용을 통해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거든. 여기서 사회 또는 환경은 지역사회, 나라 전체, 전세계가 포함되는데, 교사들만으로는 타인과의 관계를 배울 수 없잖아. 그래서 교육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교육적 역할을 하지 않으면 7차 교육과정이 정한 교육목표를 이룰 수 없다면서 만들어진 정책이야.

즉, 학부모들에게 철벽을 치는 많은 교장선생님들은 교육부가 정한 교육목표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못하거나 실행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거야. 그게 바로 내가 말하는 공무원으로서 직업적 윤리를 다하지 않는다는 말의 연장선이야. 교사들이 전문가니까 알아서 하겠다고, 학부모는 관여하지 말라고 하지만 학교는 새로운 교육정책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전히 과거에 정체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 거지.


키키: 학부모를 교육적 동반자로 받아들이지 못하다니...


천둥: 정책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학부모를 끼워 넣는 제도가 얼마나 거추장스럽게 여겨지겠어. 정치적인 논리로 만들어진 거라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도 있더라. 진보 교육감이 혁신교육이나 시민교육, 학부모들의 참여를 만든 거라면서 거부하기도 한대. 그래서 교육감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바뀌기도 하는데, OECD에서도 미래교육을 위해 ‘OECD2030교육프로젝트’라는 걸 발표하면서 사회의 변혁을 이끌어낼 수 있는 역량을 키우기 위해 공동체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어. 구성원 모두의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학부모를 교육3주체로 설정한 거지. 그냥 이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고.

이런 정책적 배경을 학부모들이 알게 되면 직접 발을 떼지는 않더라도 앞장서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은 하지 않을까. 아이들의 미래교육을 위해 자신은 못하더라도 누군가가 해주면 좋을 테니까. 나는 그 정도만 해주면 좋겠는데.


키키: 학부모들이 알아야 할 게 많네. 교육청에서 정책이 나오면 최소한 그 배경이 뭔지는 살펴야 하는구나. ‘아이들이 보호받고 성장하는 공동체’가 되는 길이 첩첩산중이네.


천둥: 그러니까 지금의 교육과정이 교육 3주체로서 학부모를 필요로 한다는 걸 학부모들에게 그걸 제대로 알리는 것부터 해야지. 아니 그전에 교육정책을 만드는 사람들과 관리자들이 먼저 제대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과정을 거쳤어야지. 아니, 학부모회가 모든 학부모들의 조직이라는 것. 그것 하나만 바로잡혀도 어마어마하게 달라질 거야.

학생들은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어디로 가야 할까? 엄마? 선생님? 상담실? 다 아니지. 친구지. 그러니까 친구들과 논의할 수 있는 구조, 학생회가 자신들의 조직으로 자리잡아야 한다고 생각해. 급식에 애벌레가 나왔을 때 엄마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 학생회에서 논의하는 거지. 민수 같은 아이가 무리를 모으고 친구를 도발할 때도 학생회에서 먼저 논의를 한다면, 문제의 핵심에 좀더 깊숙이 들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방식이 지금 교육청에서 하고자 하는 학교민주주의의 기초여야 하지 않아?


키키: 자신들의 조직이라는 말이 굉장히 낯설지만 설레는 표현이다.


천둥: 그렇지? 최근 내가 쓴 광장 인터뷰집 <팬덤에서 자유로>에서 나오는 사례인데, 특성화고 아이들이 졸업전에 취직을 하잖아. 그때 직장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선생님한테 얘기하라고 말한대. 그래서 아이들은 졸업한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는 거야. 사실 선생님도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없지만, 그래도 말할 데조차 없어지는 거니까. 그러다 광장에 나와서 노조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대. 무슨 문제가 생기면 노조에 말하면 된다는 사실이 엄청 든든했다고 하더라.

예전에는 이웃이 있었고 지역 공동체가 살아있었잖아. 그런데 지금은 내 문제를 같이 공감해 주고 해결해 줄 수 있는 공동체가 없어. 소속감이 없다는 데서 오는 치명적인 불안감과 모든 걸 사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피로감이 있는 거지. 그래서 이렇게 악성 민원인이 많이 생기는 것 같아. 조금만 유리한 입장이다 싶으면 일단 목소리를 키우고 보는 거지. 만약 학부모회가 자신들의 조직이 된다면, 지역의 중심기관인 학교에서 지역 주민들로 구성된 학부모회가 자리를 잡는다면 마을공동체도 되살아날 수 있지 않겠어?

키키: 하지만 학부모들은 일단 학부모총회에 오는 것도 싫어하잖아.


천둥: 그동안 학부모회가 한 번도 학부모 조직인 적이 없었으니까. 참 웃기는 게 뭐냐면, 문제가 생기면 학부모회에 들어가는데 아무 문제가 안 생기면 학부모회랑 거리를 둬. 학교와 연결되는 것 자체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해. 그러니까 점점 더 학부모회는 아이가 문제가 있거나 민원인, 또는 학교 편에 서서 봉사하는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라는 선입견이 반복되는 거 같아.

나는 지금이라도 '궁금하면 500원'이라는 유행어를 되살려, '궁금하면 학부모회'를 외치고 다녔으면 좋겠어.

키키: 지금의 학부모회로는 궁금해서 가도 아무것도 못 해주잖아.


천둥: “그 궁금증을 같이 풀어봅시다.” 하면 되지. 하나씩 하나씩 함께 알아가고 서로 기대면서 그렇게 학부모를 위한 조직이 되어가야지.


키키: 천둥이 말하는 학부모회는 정확히 누구를 말하는 거야? 임원들? 아님 대의원회?


천둥: 그건 학교마다 대의원이 있는 데가 있고 없는 데도 있으니까,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

우리 학교는 학년 학부모회가 그나마 안전한 대화를 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되면 일단 거기서 시작하는 거고, 임원들이 주로 그런 역할을 한다면 임원들로 시작하면 되겠지.

어쨌든 교육청에서 교육3주체에 대한 이해부터 제대로 자리 잡으면 좋겠어. 키키가 말한 대로 봉사나 감시가 아니라 환대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정책을 바꿔야지. 관리자들과 교사들까지 그야말로 대인식의 전환이 필요해. 물론 학부모들이 학부모주체화가 되는 게 우선이고.

키키: 어쨌든 내가 학부모라는 역할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고 그런 다음에 행동을 해야 한다는 얘기인 거네.


천둥: 선후의 문제가 아니지만, 그런 셈이야.


키키: 학부모들이 주체화되면서 깨달은 성찰과 도전 같은 걸 이야기 나누는 장이 마련되면 재미있겠다.


천둥: 예전에 키키가 아이들 키우는 것과 내 삶을 별개로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한 적이 있어. 얼른 아이들 키우고 내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이 모든 것이 다 내 삶이고 나의 성장이고 현재를 살아가는 방식이다.”라고. 나는 그게 학부모주체화와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해. 나와 내 아이의 삶의 서사가 학부모 활동 속에 녹아있는 거지.


키키: 앞서 말한 학부모라는 이름의 공공성과도 연결되는 것 같아.


천둥: 내 아이의 학교에서 우리나라의 교육으로 좀더 확장시켜볼 수도 있겠지. 내 아이가 다니는 학교를 넘어서 우리나라의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내 아이가 좋은 교육 못 받잖아.

키키: 맞아, 나는 내 아이가 혼자 공부하는 게 아니고 더불어 함께 어울리고 또한 그 안에서 배우고 나누는 거니까 당연히 공공성이 필요하다고 확신해. 내 아이만 잘한다고 해서 사회에 나가서 더불어 살 줄 모르고 갈등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거나 주변의 도움 안에서도 자기를 직면하거나 성찰하지 못하면 결국 내 아이의 관계성에 문제가 생기는 거잖아. 그러니 아이가 독립하기 전에 연습하고 훈련할 수 있는 장인 학교에서 배우고 익힐 수 있기를 바라는 거지. 나 혼자 아이를 가르치기보다 책임 있는 부모들과 연결되고 싶기도 하고.


천둥: 물론 지금의 교육은 너무나 사적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이 또한 그 누구도 아닌 우리 학부모가 이루어내야겠지.


키키: 그전에 학부모들끼리 먼저 서로에게 안전한 기댈 데가 되어주어야겠지. 그리고 학교와 학부모가 서로를 안전한 존재로 인식하도록 천천히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야 하고.


천둥: 예전에 교사대회 같은 곳에 학교랑 같이 간 적이 있는데, 한 교사가 이런 질문을 했어. 악성민원인 같은 학부모가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내가 그랬지. “학부모회가 제대로 자리잡고 있으면 그런 문제가 없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으면 학부모회로 보내시라. 학부모회는 모두의 의견을 모으고 걸러서 학교에 제안하니까 그런 목소리 큰 사람도 학부모 중 한 명이 되는 거다. 그러니까 학부모회는 학부모들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라 학교에도 이득이다.” 내 말에 그 교사뿐 아니라 다른 관리자들도 엄청 공감하더라. 학부모회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해.

결국 학교나 학부모 모두가 원하는 안전한 관계로.


키키: 외롭고 불신 가득한 사회라서 더욱 안전한 공간이 필요한 것 같아.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자라는 공간만큼은 그렇게 지켜주고 싶어.


천둥: 그러게, 학부모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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