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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그릇 Sep 11. 2019

미역국 없는 산모 식단

일본 출산기-2

이 글은 일본인과 무통분만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분만 과정과 조산사의 역할


첫째 때 한 달간 육아휴직을 받기로 한 남편은 예정일부터 휴가에 들어갔다. 예정일 당일부터는 유급휴가로 처리되고 아이가 태어나면 그때부터 육아휴직으로 카운트된다고 한다.

출산 준비도 얼추 끝마친 상태였기에 남편과 나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둘 만의 하루를 여유롭게 산책도 하고 데이트를 즐기며 보냈다. 그리고 그 날은 정말 둘이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 되었다.


예정일 저녁 이슬이 비치고 그때부터 허리가 아파왔다. 규칙적인 진통이 아니라 그냥 계속 허리가 아팠기에 진통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일단 잠자리에 들었다.

통증은 갈수록 심해져 도저히 누워있기 힘들 정도가 되었지만 진통 주기가 10분을 훌쩍 넘기기도 하고 5분 미만이기도 하는 등 일정하지 않아 병원에 전화하기가 망설여졌다. 먼저 출산을 한 친구가 진통은 깜짝 놀랄 정도로 주기가 일정하다는 말을 했었기 때문이다.

이게 정말 진통이 맞을까 하는 의심을 거두지 못한 채로 새벽 3시쯤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간호사는 출산이 가까워지면 아이가 내려오면서 허리가 아프게 된다면서 진통일 가능성이 크니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남편을 깨우고 미리 싸 놓은 짐을 챙기고 진통 택시를 불렀다. 택시에 타면서도 긴가민가 했던 나는 운전수 아저씨께 혹시 가진통이어서 집에 돌아가게 되면 다음에 다시 진통 택시를 불러도 되냐고 물었다. 그런데 병원에 가까워질수록 그 질문이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이건 진짜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엄습해 올 때마다 뒷좌석 손잡이를 부여잡고 간신히 버텼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2분 간격으로 진통이 오고 있었고, 이동하는 중간중간에도 진통이 와서 걷다가 쉬다가를 반복했다. 당직 의사는 자궁문이 4센티 정도 열렸으니 입원하라고 했다.


초반에는 그래도 견딜만했다. 평소 생리통이 심한 편이었는데 가장 심했던 생리통보다 조금 더 심한 정도로 허리가 아팠다.

그런데 2시간 정도가 지나자 이제껏 겪어본 적이 없는 극강의 고통이 밀려왔다. 금방이라도 아이가 튀어나올 듯이 아래쪽에 강한 자극이 30초에서 1분 간격으로 있었지만, 조산사는 자궁문이 완전히 열릴 때까지 힘을 주면 안 된다고 했다. 진통이 올 때마다 심호흡으로 버텨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나도 모르게 경련하듯이 몸을 튕기며 동물의 울음소리에 가까운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내가 미쳤지, 미쳤어! 왜 임신을 해가지고. 이런 건 줄 알았으면 그냥 아이 없이 사는 건데. 아이는 왜 낳겠다고 해서 이 고생을 하는 거야?! 둘째는 절대 절~~~대 안 낳을 거야!!'

라고 수십 번을 생각했다. 이성적인 사고가 안 되는 순간이었다.


보다 못한 조산사는 옆에 있는 남편에게 테니스볼을 들려주며 진통이 올 때마다 항문을 틀어막듯이 세게 누르라고 했다. 그 방법은 나름 효과가 있어서 조금씩 몸을 비틀지 않고 심호흡을 하며 진통을 견딜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그 고통을 언제까지 견뎌야 할지 알 수 없다는 막막함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아침이 되어 당직 조산사가 퇴근하고 새로운 조산사가 왔다. 내진을 해보더니 자궁문이 다 열렸다고 했다.

고통스러운 와중에 그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처음 본 조산사에게 감사인사라도 하고 싶은 지경이었다.

분만실까지는 걸어서 이동해야 했지만 고지가 멀지 않았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


분만실 침대에 누워서도 바로 힘을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링거 바늘을 꽂고 아래쪽에 시트를 까는 등 준비가 끝날 때까지 몇 분이 걸렸고 그 사이 진통이 여러 번 왔다 갔다. 드디어 조산사의 허락이 떨어졌고 힘을 주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나는 아이를 낳게 되면 순산을 하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었다. 몸에 볼륨이라고는 없고 키만 삐죽하게 커서 학창 시절에 단체 사진을 찍으면 항상 젓가락이 서 있는 것 같았다. 당연히 골반도 작았고, 유연성도 부족해서 남편보다도 다리 찢기 각도가 작아 스트레칭을 할 때마다 남편의 놀림을 받았다.  

그랬기에 첫째를 임신하고 조금이라도 출산에 적합한 몸을 만들어 보고자 발버둥을 쳤다. 누워있기를 좋아하는 게으른 나의 본성을 무릅쓰고 산책을 다녔고, 유튜브에 있는 임산부 요가도 열심히 따라 했다. 나의 그런 발버둥이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첫 번째 힘을 주었을 때 아이의 머리가 보인다고 했고, 두 번째 힘을 주었을 때 머리가 끼었다고 했다. 그리고 세 번째 힘을 주었을 때 아이의 머리가 쏙 하고 빠져나왔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지 4시간여 만에, 분만실에 들어간 지 10여 분 만에 첫째가 태어났다. 뻣뻣한 젓가락 몸이 이루어 낸 기적이었다.



다른 나라의 출산과정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일본 산부인과에서는 조산사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정기검진 때까지는 의사가 주도하지만 막상 진통이 오고 출산이 진행되면 의사의 역할은 거의 없다. 조산사가 진행상황을 체크하고 내진도 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분만실로 이동시킨 다음 의사에게 콜을 하면 의사는 마지막에 나타나 아기를 받고 뒤 처치를 해주는 정도이다. 물론 별다른 이상이 없이 진행되는 자연분만에 한해서다.


다행히도 나를 담당해준 조산사는 최적의 타이밍에 나를 분만실로 데리고 갔기에, 진통을 견디는 과정은 힘들었지만 막상 분만실에 들어가서는 수월하게 출산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내 친구의 경우 적절한 타이밍을 놓쳐 진통이 다시 약해지는 바람에 분만 과정이 꽤 힘들었다고 한다.



둘째는 절~~~대 낳지 않겠다는 나의 다짐은, 첫째의 귀여움이 무르익어 갈수록 점점 옅어지다가 끝내는 바람에 날리는 민들레 홀씨처럼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첫째를 출산하고 2년 남짓이 지나 출산의 고통이 거의 기억이 안 날 때쯤 둘째를 임신했다.


임신한 몸으로 첫째를 돌보는 일은 임신 후기로 갈수록 벅찼다. 첫째를 유모차에 태우고 장을 봐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발걸음이 너무 무거워 발이 땅에 붙어버릴 것만 같았고, 배뭉침도 심해서 매일 저녁이 되면 앉았다 일어서기도 힘들 정도로 몸이 무거웠다.

결국 34주쯤에 약간의 하혈이 있었고, 절박 조산(조산의 위험이 있는 상태) 진단을 받고 절대 안정을 취해야 했다. 다행히 정산기인 37주를 무사히 넘겼지만 예정일을 며칠 앞두고 양수가 터지고 말았다.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 미리 부탁해 둔 지인에게 연락해 첫째 아이를 맡기고 출근한 남편에게도 연락했다. 약한 생리통 정도의 진통이 주기적으로 있었지만 그마저도 점점 약해져 하룻밤 자면서 진통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면회시간이 끝나는 저녁 8시가 되어 남편은 집으로 돌아갔다. 아이도 남편도 없는 병실에서 오랜만에 해방감을 맛보았지만,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잘 못 자는 예민한 기질에 언제 진통이 올 지 모른다는 조마조마한 마음이 더해져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새벽녘에 겨우 잠이 들어 3시간쯤 자고 일어났다. 당직 조산사가 밤새 진통이 오지 않으면 다음 날은 촉진제를 투여한다고 했으므로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고 기다렸다.


조산사의 안내를 받고 진통실로 이동하여 모니터를 달았다. 촉진제는 한 시간에 한 알씩 먹으면서 서서히 혈중 농도를 높여가며 하루 최대 6알까지만 먹을 수 있다고 했다.

거기까지 설명을 듣고 9시 반에 첫 한 알을 먹었다. 그즈음 남편도 도착했다. 다시 약한 생리통 정도의 진통이 주기적으로 왔지만 본격적인 진통은 아니었다. 한번 겪어봐서 알고 있었다. 그 정도로는 절대 애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촉진제를 3알까지 먹었는데도 진통은 미미했다. 간밤에 잘 못 잔 탓에 졸음이 쏟아져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어 밥까지 먹어치웠다. (혼자 다 먹을 수 있었지만 남편의 식사를 자꾸 신경 쓰는 조산사를 의식해 남편에게 조금 양보했다.)

애도 낳기 전에 벌써 병원에서 3끼를 먹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남편과 함께 웃었다. 그때만 해도 웃을 여유가 있었다. 잠시 뒤에 다가올 시련을 알지 못했으니까.


점심을 다 먹고 나자 담당의사가 와서 내진을 했다. 자궁문은 반쯤 열렸지만 자궁이 아직 약간 딱딱해서 자궁을 부드럽게 하는 근육주사를 놓겠다고 했다.

내진빨이었을까. 의사가 돌아가고 주사를 맞는데 좀 다른 느낌의 진통이 느껴졌다. 간신히 화장실에 다녀온 뒤 다시 침대에 누워 4번째 알약을 삼켰다.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좀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다가 갑자기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진통이 몰려오니 몸도 마음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유도분만은 갑자기 진통이 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첫째 때와 마찬가지로 이성적인 사고가 마비되고 마음속에서 자책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내가 미쳤지. 한 번 겪어봤으면서 왜 둘째를 낳는다고 했을까. 그냥 하나만 잘 키울걸. 이 짓을 왜 또 하고 있는 거야?!!’

아이를 낳아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 순간에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이미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후회가 밀려왔다. 정말 딱 죽고 싶었다.


옆에서 지켜본 남편은 첫째 때보다 내 상태가 나아 보였다고 했지만 실제로 겪는 나는 둘째 때가 더 힘들었다. 첫째 때는 진통이 서서히 단계별로 세지는 느낌이었다면, 둘째 때는 0에서 10으로 갑자기 뛰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고통이 그리 길지 않았다는 점이다. 본격적인 진통이 시작되고 머지않아 자궁문이 완전히 열렸다. 첫째 때와 마찬가지로 분만실까지 걸어서 이동했고 분만실 침대에 누워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힘을 주고 싶은데 참아야 하는 그 시간이 가장 고통스럽다.


준비는 얼추 끝난 것 같은데 힘을 주라는 지시가 떨어지지 않았다. 몸을 이리저리 배배 꼬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힘을 주고 말았는데 조산사가 잘한다고 더 힘을 줘 보라고 했다.

‘뭐야! 힘줘도 되는 거였어? 진작에 말 좀 해주지!’

조산사가 다급하게 의사를 부르려는 찰나 때마침 담당의사가 들어왔다.

센세, 나이스 타이밍!


두어 번 힘을 주자 둘째의 머리가 빠져나왔다. 진통이 시작된 지 한 시간여 만이었다. 폭풍같이 휘몰아친 출산이었다.

짧고 굵게 끝났지만 두 번은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조사산의 숙련도는 첫째를 낳은 대학병원이 둘째를 낳은 동네 산부인과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첫째 때를 돌아보면 정확한 지시와 리드로 우왕좌왕하지 않고 출산에 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둘째 때는 내가 경산부여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조산사가 자기 할 일만 하면서 나를 내버려 두는 느낌이었다. 만약 초산이었다면 언제 힘을 줘야 되는지 몰라 좀 당황했을 것 같다.

물론 나의 경험만으로 모든 대학병원과 동네 산부인과를 일반화해서 이야기할 수는 없다. 사실 병원의 차이보다는 조산사 개인의 역량 내지는 스타일의 차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두 병원 모두 출산 후에 아이를 안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출산 직후 간호사들이 데려가 씻기고 몸무게와 키, 머리와 가슴둘레를 재고 돌아온 아이는 몸 이곳저곳에 모니터를 위한 장치 달고 있었다. 아이의 심박을 확인하는 장치라고 생각되는데, 그 때문에 남편과 나는 아이를 침대에서 안아 올리지 못하고 그저 바라보고 손을 잡아주고 사진과 동영상을 열심히 찍어대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안아줄 수 없었기에 당연히 젖을 물려볼 수도 없었다.


첫째는 아침에 태어났는데 24시간이 훌쩍 지난 다음날 점심때가 되어서야 안아보고 젖을 물려볼 수 있었다. 출산 당일 날 오후 늦게 신생아실로 면회를 가긴 했지만 그때도 안으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아기를 그저 바라만 보다가 돌아왔다.(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첫째 아이를 보듬어 안아줄 텐데.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둘째는 이른 오후에 태어나 분만실에서 헤어진 뒤 약 20시간이 지난 다음 날 오전에 다시 만났다.


첫째도 둘째도 병원에 있는 동안은 젖도 잘 빨고 분유도 잘 먹었는데, 병원을 퇴원함과 동시에 젖을 거부하고 젖병만 찾기 시작했다. 나는 이것이 꼭, 태어나서 엄마 젖보다 젖병을 먼저 접한 탓인 것만 같아서 속이 상했지만 병원의 방침을 거스를 수도 없었다.



입원생활과 모자동실


일본의 경우 출산한 당일 날은 산모가 휴식할 수 있도록 하고, 출산한 다음 날부터 모자동실(母子同室)을 하게 된다. 아침에 잠깐 아기를 데려가 씻겨주는 것 외에는 산모와 아기가 병실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수유를 하고 기저귀를 갈고 우는 아기를 달래고 재우는 모든 과정을 산모가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산모의 컨디션에 따라서는 휴식을 위해 신생아실에 맡기는 것도 가능하다.  


첫째 때는 초산이었기 때문에 출산한 다음 날 점심때쯤 신생아 케어와 수유에 관한 지도를 받고 그때부터 모자동실이 시작되었다.

진통시간이 짧았던 만큼 비교적 체력소모가 덜한 편이었기에 사실 출산 당일 날은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그런데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아침 눈을 뜨는 순간 온몸의 통증이 한 번에 밀려와 한동안 몸을 일으킬 수조차 없었다. 갑자기 안 하던 운동을, 그것도 격하게 한 다음날에 눈을 뜸과 동시에 느껴지는 극한의 근육통, 딱 그것과 같았다. 특히 테니스공으로 무차별 공격을 당한 항문과 엉덩이 근육이 말할 수 없이 아파서 제대로 걷기도 힘들었다.


대학병원은 소독된 젖병과 분유가 신생아실에 구비되어 있어 수유를 위해서는 반드시 신생아실로 가야 했다.

두세 시간에 한 번씩 배고프다고 우는 아이를 신생아용 이동식 침대에 태워 아픈 몸을 이끌고 병원 복도를 가로지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난 근육들을 진통제로 달래지 않으면 배고픈 신생아의 앙칼진 울음소리에도 등짝이 침대에 달라붙은 듯 몸이 움직이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한밤중에 일어나 잠결에 아기 침대를 밀고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모습은 흡사 좀비와 같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모자동실이 좋았다.

물론 신생아실에서 아기를 케어해주는 한국의 방식은 그 나름대로 장점이 있겠지만, 일본에서 출산한 이상 이곳의 방식을 따라야 했고, 그 방식의 장점과 단점도 모두 수용해야 했다.

출산 다음날부터 이루어지는 모자동실은 몸이 다소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신생아를 돌보는 일에 빨리 익숙해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한국처럼 산후조리원이 일반적인 것도 아니고 산후조리를 해주실 부모님이 가까이 계신 것도 아니었기에 신생아를 돌보는 일은 퇴원하면 바로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이었다. 따라서 병원에 있는 동안 그 일에 익숙해지는 것은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더불어 갓 태어난 내 아이를 내 손으로 돌보면서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기도 하고 잠든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따금씩 보여주는 배냇짓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되는 그 순간들이 참으로 행복했다.  

혹시 일본에서 출산을 앞둔 분이 계시다면 부디 모자동실을 겁내지 마시길. 생각보다 할 만하다.


둘째를 낳은 동네 산부인과의 신생아실은, 신생아의 이동식 베드가 들어가면 꽉 찰 정도의 크기였으므로 그곳에 산모가 출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신에 분유와 젖병, 세척솔과 소독액과 전용 케이스(일본에서 젖병을 소독하는 방식 중에 하나로, 전용 케이스에 소독액을 붓고 그 안에 젖병이 잠기도록 넣어 한 시간 이상을 담가 두면 소독이 된다. 소독액의 성분은 체내에 들어가면 소금으로 바뀌므로 인체에 무해하다고 한다)를 주고 산모가 알아서 관리하도록 했다.

세척하고 소독하는 과정이 조금 번거롭긴 했지만, 이동하지 않고 병실에서 해결할 수 있어 개인적으로는 더 편했다.



대학병원 산부인과 병동의 병실은 개인실과 4인실로 나뉘어있었다. 개인실은 욕실과 화장실이 방에 딸려 있고, 4인실은 욕실과 화장실을 공용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차이가 있었다.

지금보다 형편이 더 쪼들렸던 우리는 당연히 저렴한 4인실의 희망했다. 공간이 비좁긴 했지만 미니 냉장고도 달려있었고, 남편과 나와 아이가 옹기종기 모여있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공용 샤워실은 문에 걸려있는 메모판에 미리 원하는 시간과 이름을 써놓고 그 시간에 가서 샤워를 하는 방식이었다. 시간은 30분 단위로 끊어서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너무 이른 아침이나 밤늦게는 이용할 수 없었다. 병동에 인원이 많지 않아 큰 불편함은 없었지만, 간혹 원하는 시간이 차 있는 경우가 있어서 가능하면 아침에 일찍 가서 이름을 적어 놓아야 했다.  


산부인과를 비롯한 일본 병원의 일반적인 면회 시간은 오후 2시부터 저녁 8시까지였지만, 대학병원이라 오가는 사람이 많아서였는지 한두 명의 보호자가 오후 2시 이전에 와 있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남편도 일찌감치 와서 같이 점심도 먹고 시간을 보내다가 집에 돌아가 늦은 저녁을 먹곤 했다.


입원기간은 초산의 경우 5박 6일, 경산의 경우 4박 5일이었고, 제왕절개의 경우는 7박 8일 정도였던 것 같다. 산후조리원이 일반적이지 않은 대신 병원 입원 기간이 한국보다 긴 편이었고, 그 기간 동안 몸의 회복과 더불어 신생아를 돌보는 일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질 수 있었다.  



둘째를 출산한 병원은 개인 실과 2인실 중에 선택할 수 있었는데, 4박 5일 기준으로 개인실이 2인실보다 3만 엔 정도 비쌌다. 첫째를 낳을 때보다 3년만큼 더 노화를 거친 나는 조금이라도 더 편한 쪽을 택하고 싶었다. 눈치작전 없이 내가 원하는 시간(아침이든 밤중이든)에 샤워를 하고 싶었고, 첫째 아이가 면회를 와서 오후 시간을 함께 지내기에도 개인실이 나을 것 같아 고민 끝에 개인실은 희망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둘째 아이가 태어난 날 개인실이 다 차있었고, 2인실 중에 한쪽이 비어있는 방을 배정받았다. 다행히 내가 퇴원할 때까지 다른 한쪽이 비어있어 결과적으로 우리는 적은 비용으로 2인실을 개인실처럼 쓸 수 있었다.

덕분에 첫째 아이는 병원 바닥에서 기차놀이도 하고, 내 침대에서 낮잠도 자다가 밖에서 사 온 도시락으로 함께 저녁을 먹고 아빠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샤워실과 화장실은 공용이었지만, 대학병원보다 훨씬 적은 인원이 입원해 있었기에 거의 원하는 시간에 샤워실을 이용할 수 있었고,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동네 산부인과의 가장 좋았던 점은 입원기간 중에 한 번 아로마 마사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요일을 정해서 맛사지사가 병원을 방문했고, 입원 기간 중 겹치는 요일에 마사지를 받을 수 있었다.

나는 미용실에 가서도 헤어 디자이너와 필요한 얘기만 주고받고 줄곧 입을 다물고 있는 낯가림이 심한 성격이지만, 마사지를 해주시는 분이 김남길과 이민호를 좋아하고 몇몇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좋아하는 분이었기에 다행히 어색하지 않게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역시 전문가의 손길은 달랐다. 남편처럼 세게 주무르지 않는 대도 뭉쳐진 근육이 풀리고 몸이 개운해졌다. (물론 남편의 손길도 나쁘지 않다. 좀 아픈 것만 빼면. 여보 계속 잘 부탁해!)



미역국 없는 산모 식단


당연한 이야기지만 일본 병원에서는 산모에게 미역국을 주지 않는다. 산모라고 특별히 무언가를 챙겨 먹거나 혹은 가려먹기보다는 그저 골고루 영양소를 섭취하기를 권장했다. 한국에서는 산모에게 금기시되는 빵이나 면도 나왔고, 튀김 같은 기름진 음식이나 달달한 간식도 나왔다.

처음에는 '산모가 이런 거 먹어도 되나?' 하는 약간의 거부감이 들기도 했지만, 출산한 다음이라 그런지 뭐든 입에 착착 감기고 돌아서면 배가 고팠기에 주는 대로 다 먹었고(남기는 사람도 있었던 걸 보면 나만 그랬나 싶기도 하다), 남편이 따로 끓여다 준 미역국까지 맛있게 호로록했다.  


첫째 때는 대학병원이긴 했지만 흔히 생각하는 병원식은 아니었고, 산부인과 병동은 따로 식단을 준비해주는 것 같았다. 나름대로 균형 잡힌 식단에 맛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그냥 내 입에는 다 맛있었다.

아침 메뉴: 주로 빵과 과일 샐러드 유제품 위주였고, 스프나 스크램블 에그 등의 따뜻한 메뉴도 곁들여 나왔다.
점심 메뉴: 파스타 등의 면류도 나왔다. 한국에서는 아마도 산모에서 면을 주진 않을 듯 하다.
저녁 메뉴: 새우 칠리나 튀김은 지금 봐도 먹고 싶다. 생선이 나오는 날은 특히 양이 부족해 배가 고팠다.
오후 3시의 간식. 한국에서는 산모한테 이런 단 거 안 주겠지?



둘째 때는 소규모 산부인과였기에 대학병원보다 맛있고 가정식에 가까운 정성스러운 식단이라고 홈페이지에서도 강조를 했었고, 병원 후기에도 맛있고 양도 많다는 평이 꽤 있었다.  

물론 맛있었지만 나는 대학병원 밥도 맛있게 먹었기에 그것과 비교해서 특별히 맛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나 혹시 맛알못?) 그리고 후기와는 달리 한국인인 내가 먹기에 많은 양은 아니었다. 역시 일본인과 한국인은 식사량의 기준이 다른 듯하다.

하긴 밥그릇 사이즈부터 달라서 우리 집에서는 국그릇을 밥그릇으로 쓰고 있다.

아, 그리고 대학병원과 달리 오후 3시의 간식이 없어서 좀 아쉬웠다.


아침 메뉴: 빵과 죽이 하루씩 번갈아가면서 나왔다
점심 메뉴: 역시나 면이 등장. 오이와이젠(お祝い膳)이라고 출산을 축하하는 특별식이 한 번 나왔는데 두 번째 사진의 꽃 모양 젤리(?)가 인상적이었다. 내용물은 세번째 사진.
저녁 메뉴: 한국식 불고기가 나오기도 했다. 저녁에 주로 딸기가 나와서 딸기 킬러인 첫째 아이에게 모두 빼앗겼던 기억이.. 크흑



출산 비용


일본에서는 자연분만을 할 경우 보험적용이 되지 않는다. 대신에 건강보험에서 출산육아일시금이라는 명목으로 42만 엔이 지급된다. 병원에서 주는 서류에 사인하면 퇴원 시에 출산 비용에서 42만 엔을 제한 금액만 지불하면 되는 식이다.

아이 한 명당 42만 엔 이므로 쌍둥이의 경우 84만 엔 세 쌍둥이면 126만 엔이 된다.


42만 엔은 꽤 큰 금액이긴 하지만 출산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2016년 통계로, 출산 비용의 전국 평균이 50만 엔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평균이다. 가장 비싼 도쿄도가 62만 엔이고 가장 저렴한 돗토리현이 39만 엔이라고 하니 지역별로 차이가 많이 난다.


내 경우는 첫째를 대학병원에서 낳았기에 상대적으로 비싼 편이었다. 출산을 앞두고 조산사에게 물었을 때, 42만 엔을 제하고도 25만 엔 정도가 더 들 거라고 했다. 전국 평균은커녕 도쿄도의 평균도 훌쩍 넘는 금액이었다.


입원날짜는 밤 12시를 기준으로 바뀌기 때문에 밤늦게 진통으로 입원하여 다음 날 출산을 하게 되면 입원날짜가 하루 늘어나게 된다. 그 사실을 알고 나는 혹시 저녁이나 밤늦게 진통이 오면 가능한 자정 이후까지 참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새벽 입원에 아침 출산이었고, 아이도 나도 모든 게 정상이어서 비용이 발생할만한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 결과 조산사가 말한 금액보다 훨씬 적은 금액인 20만 엔 정도로 출산이 가능했다.


둘째 때는 동네 산부인과였기에 대학병원보다는 저렴했다. 임신 16주 정도가 되면 먼저 10만 엔을 보증금으로 걸고 출산을 예약하는 방식이었는데, 퇴원할 때 거기에 더해 2만 엔 남짓을 지불했던 것 같다.

양수가 터져 하루 먼저 입원했기에 입원기간은 첫째 때와 같이 5박 6일이었는데 지불한 비용은 12만 엔 정도였으니 확실히 대학병원보다는 동네병원이 저렴했다.

앞서 말했듯이 개인실을 이용할 경우 여기에 3만 엔 이상이 추가된다.


제왕절개의 경우는 겪어보지 않아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일단 수술비 등의 의료비 항목은 보험이 적용되어 30%만 개인이 부담하면 되고, 고액의료비제도를 이용하면 자기부담금(수입에 따라 차등적용)을 제외한 금액만 지불하면 된다고 한다.

그 외에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입원비, 신생아관리보험 등의 항목에 대해서는 자연분만과 동일하게 발생하고 결과적으로 자연분만보다 몇 만 엔 더 드는 정도라고 하니 크게 차이는 안 난다고 볼 수 있겠다.


어쨌거나 우리는 두 아이를 낳는데 출산비용으로 32만 엔 이상을 지불했고, 지난번 글에 언급한 대로 정기검진 비용이 둘이 합쳐 10만 엔 정도라고 하면 병원비로만 총 42만 엔 정도의 비용이 들어간 셈이다.


키우는 건 둘째치고 낳는 데 만 저 정도의 비용이 든다니 외벌이 월급쟁이의 빠듯한 수입으로는 부담스러운 금액이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중한 생명이 둘씩이나 주어졌지만, 돈이 없으면 애도 못 낳겠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드는 각종 비용과 혜택에 대해서는 또 언젠가 글로 정리해 볼 계획이다.


이것저것 쓰려다 보니 생각보다 글이 길어졌지만 나의 부족한 글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그렇지 않더라도 ‘일본은 이렇구나’ 하고 재미로 읽어주시면 좋겠다. 그리 재밌는 글이 못 되어 걱정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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