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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시작은 미약하지만 단단하게

창대하고 싶은 유혹은 뿌리칠 수 있는 기획자

by Yoo

기획 실행의 시작은 창대합니다.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 많은 이해계자들에게 공감을 받고 의사결정자에게 결재를 받으며 박수 속에서 시작합니다. 모두가 힘을 모아 금방이라도 의미 있는 변화가 이루어질 것 같은 기대 가득 찹니다. 내가 그렸던 기획의 큰 그림 아래서 각 구성요소를 이루고 있는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약속한 역할을 수행하며 스템을 제대로 바꾸는 진전을 상상합니다.


창대한 기획은 많은 네모와 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전체 시스템관점에서 각 구성요소와 역할을 정의하고 역할 간의 선후관계를 그려 상식적이면서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그림은 그리곤 합니다. 그러나 창대한 시작은 금방 절망/좌절/실망/짜증 등의 감정으로 변합니다. 과 앞에서는 분명히 모두가 하나가 되어 공감하고 약속했는데, 약속의 유효기간이 실행 전까지였던 듯 막상 실행에 들어가니 아무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습니다.


창대한 기획에서 하나하나의 네모와 선이 기꺼이 되어주며 큰 그림을 완성해 주었던 조력자들은 그 숫자만큼 실행의 걸림돌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옵니다. 나마 실행의 첫 해에는 아직은 의사결정자의 관심과 약발이 유지되지만, 그 이후로 넘어가면 창대했던 대부분의 기획은 미약하게 끝이 납니다. 많은 이해관계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이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임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기획은 기본적으로 시스템을 구성하는 네모들과 그것을 연결하는 선으로 이루어진 구조를 건드는 일입니다. 없던 네모(기능)를 추가하거나, 없던 선(기능 간 연계)을 추가하거나, 기존의 네모와 선을 다른 방식으로 변경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창대한 기획은 많은 네모와 선을 동시에 건드려 큰 변화를 일으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창대한 기획이 성공적으로 실행되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네모하나 선하나를 바꾸는 것도 어려운데 변화시키려는 요소가 늘어나면 실행의 난이도는 제곱으로 올라갑니다. 대하지만 단단하지 못한 불안정한 구조는 지속가능하지 못합니다.


지속가능한 실행의 관점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미약하지만 단단하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아니라 내가 그리고 우리 조직이 변화를 지속할 수 있는 작은 범위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작은 범위를 고민과 시행착오를 응축하여 단단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 단단한 작은 알맹이는 때로는 무관심의 시절, 때로는 피치 못할 과도한 관심의 시설에서도 휘둘리지 않고 중심을 잡아줍니다. 실패라는 눈보라가 불어 치는 실행이라는 여행에서 시행착오와 경험이라는 눈을 붙여가며 커다란 눈덩이를 만들 수 있는 핵이 됩니다. 핵이 되는 알맹이가 없으면 눈은 흩어지기만 할 뿐 하나로 축적되어 쌓이지 못합니다.


작고 단단한 알맹이를 만드는 작업은 미약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그 작은 알맹이를 만들기 위한 눈도 쉬이 뭉쳐지지 않습니다. 그러 분명한 것은 창대한 기획을 2~3년마다 만들고 부수고 해서는 아무것도 쌓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변화를 빨리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은 모든 기획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향입니다. 그러나 천천히 땅을 다지면서 나아가는 지속가능한 실행은 창대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단단한 알맹이를 만드는 지루한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소수만의 특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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