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자고 오른 다리 위에서 새 생명을 얻은 지 3년, 나는 지금 수염이 났다. 어이없게도 내가 털의 토양이 돼버린 거다. 또다시 다리 위에 선다 해도 거리낄 게 없을 희대의 절망. 그렇다고 바로 다리 위에 설 순 없었다. 이제 나는 재빨리 계산부터 때려봤다. 안 할 줄도, 못할 줄도 모른 채 살아온 계산. 바로 뛰어내리기엔 어쩐지 서운해 다리 위에서 뭉그적뭉그적 하던 그때, 마침내 계산은 절망의 뿌리에서 꽃피었다.
이건 신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재검토해볼 만한 일이었다. 곰곰이 따져보니, 뒤통수만 공개한 채 노래를 해온 건 진정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도운 일 같았다. 만약 얼굴을 공개한 채 영상을 찍어왔다면 수염이 난 지금은 어떻게든 얼굴을 가리는 콘셉트로 전환해야 했을 테고, 그로 인해 나는 지금보다 더한 혼란에 빠졌을지도 몰랐다. 사람들은 내 변화 속에서 어떻게든 허물부터 찾아냈을 테니까. 그게, 그것들의 셈법이니까.
격변의 겨울방학 이후로도 나는 꾸준히 격변했다. 키는 진작 183센티를 넘겼고, 몸무게는 물론 뼈대와 잔근육들도 키에 뒤질세라 세력을 키웠다. 이런 내 소식을 어디서 어떻게 들었는지 전국 스포츠계의 잇단 대시가 있었다. 운동 쪽은 꿈꿔본 적도 없었기에 단칼에 거절하곤 했지만, 제정신으론 뿌리치기 힘든 호화로운 조건을 제시하는 이들도 있었다. 온라인 세상에선 한솥밥 먹는 식구인 양 살갑게 쪽지를 보내오던 그들. 딱 한 번만 만나달라고 애원하던 그들. 그들은 현실에서 나를 직접 대면하고 나면 돌아서기가 그 아이 저리 가라 싶게 매몰찼다. 하나같이 두 번은 없는 만남이었다. 안다. 문제는 비율이라는 걸
"모델 쪽은 어떨까."
그 무렵 언젠가 야식차 컵라면을 먹는 내게 사수가 말했다. 나는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아니야, 아니야. 모델은 굶는 게 일일 텐데 먹고살려고 굶는다는 건 말이 안 되지. 먹거라, 먹어."
사수는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했다. 나는 컵라면 국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자신의 키가 140센티 대가 아닌 딱 150센티라고 주장해온 사수는 이쪽 세계를 아예 몰랐다. 나를 캐스팅한 그분 말마따나 살은 내 의지로 뺄 수도 있겠지만, 키만 멀대같이 클 뿐 이렇게 짧은 팔다리로 모델이라니. 그야말로 예수님이 귀신이랑 씻나락 까먹는 소리였다.
나는 구독자들 사이에서 '뒤통수인'으로 불린다. '오소리'라는 깜찍한 활동명을 내걸었지만 그들은 관심이 없다. 목소리와 떡 벌어진 어깨를 보면 남자가 분명하지만, 이따금 튀어나오는 가느다란 고음과 화면에 종종 비치는 섬섬옥수를 보면 여자인 것도 같다나. 일관성이 없다는 건 참으로 고달픈 일이었다. 내가 가장 자신 있는 신체 부위인 작고 흰 손은, 굵직굵직한 나머지 신체와 완벽한 부조화를 이루며 뒷모습 속에서도 성별 논란을 부추겼다.
구독자들의 관심은 내 노래가 아닌 외모에 집중되어 있었다. 처음엔 노래에만 관심을 보이던 이들도 결국엔 외모 쪽으로 기울어졌다. 관심이 의심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그들이 자연스레 남발하는 이모티콘 표정처럼 간단했다. 호흡 하나하나에 진심을 담아 열창하는 내 영상은 고른 속도로 쌓여 갔지만, 그 아래에 달린 댓글은 죄다 노래와 더불어 고조되는 몸의 반응, 그러니까 내 특유의 떨림에 관한 것뿐이었다.
-BEST: 대박!노래 엄청 잘함! 뭔 머리로 노래를 함! 머리를 저렇게 흔드는데 노래가 되긴 됨! 놀라운 인체의 신비!
⤷ 고음 올릴 땐 손도 같이 흔듦! 완전 신기!
⤷ 클라이맥스에선 머리+양손임!
⤷ 남자임? 여자임?
내 의지와는 무관한, 인간의 본능이 주를 이루는 이러한 댓글과 함께 나는 뒤통수녀도 뒤통수남도 아닌 뒤통수인으로 불리고 있다. 애매한데, 사람임은 확실한. 식구들 말대로 과연 이게 힘이 나는 댓글일까, 곱씹어보는데……
'이 냄새는!'
문틈으로 한층 짭조름해진 사수표 제육덮밥 냄새가 새어들었다. 단언컨대 그만 볶고 불에서 내릴 때였다.
'다이어트에 치팅데이는 필수지!'
얼마나 오래 상념에 빠져 있었던 걸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은 듯했다. 바로 이 허기처럼, 지금도 몽롱하게 내 몸 구석구석으로 번져나가고 있을 털들. 그 혼란의 궤적들을 불치병의 신호탄이 아닌 아픈 호르몬이 보내온 구조 신호라고 깨끗하게 인정해버린 결과일까. 배달 온 밥상을 문밖에 그대로 둘 만큼 흐려졌던 식욕이 산부인과를 나온 순간부터 물밀듯 되돌아오고 있었다.
'데뷔는 해보고 죽어야 한다. 그러려면 먹어야 한다.'
나는 다시 한번 사수표 제육덮밥의 힘을 빌려보기로 마음먹었다. 독감을 떨쳐내던 그날보다 더한 리필이 이뤄질지도 몰랐다. 행여 사수가 저녁마다 1등급 고기를 간장에 볶는다 해도, 그 쿰쿰함을 이전보다 오랜 시간 감내할 용의도 있었다. 나는 지금 그만큼 배가 고팠고, 결정적으로 털이 나고 빠지는 과정 자체가 특별한 신체적 고통을 수반하진 않았다. 씹고 삼키는 건, 목이 부어 물 한 모금 넘기기 쉽지 않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식사를 여러 번 리필했던 독감 때보다야 훨씬 수월할 듯했다.
나는 벗어놓았던 마스크를 다시 썼다. 잘 먹겠습니다! 곧 밥을 배달해 올 사수에게 감사 인사도 건넬 겸 본격적으로 입도 풀었다. 푸르르르…… 두 번, 세 번, 네 번…… 푸르르르…… 계속 입을 푸는데…… 잠깐, 뭐지, 이 꺼림칙함은…… 뭔가 잘못돼 가고 있다는 서늘한 직감이 등골을 휘감았다. 아무리 냄새를 들이마셔 봐도, 마스크 틈새를 파고드는 짭조름함이 진해지기는커녕 오히려 희미해지고 있었다. 신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었다. 배달에 나섰어도 진작 나섰어야 할 타이밍 아닌가.
초조해진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팅- 어그러지는 쇳소리와 함께 내 몸을 지탱하고 있던 쪽의 매트리스가 폭삭 내려앉았다. 안 그래도 위태위태하던 스프링이 결국 주저앉아 버린 거였다. 언제 망가져도 이상할 게 없다 싶게 삐걱이던 침대였다. 그러므로 지금껏 버텨준 게 용할 뿐 놀라울 건 없었다. 어기적어기적 침대에서 마저 내려와 바닥에 발을 디뎠다. 그때였다.
"자비야아아아아!"
쏟기라도 한 걸까. 사수였다. 사수의 날카로운 비명이 좁다란 보육원 복도 벽을 타고 핑퐁핑퐁 메아리쳤다. 사수의 비명은 다급했고, 내 이름을 부르짖는 그 한마디로 짧게 끝이 났다. 그것은 단 한 번의 마지막처럼 쏟아부어지곤 이내 사라졌다. 내 몸은 이미 방문 밖으로 뛰쳐나와 있었다.
멀리 복도 끝에 사수가 엎드려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닥에 점처럼 웅크린 사수를 응시했다. 사수의 등이 불규칙하게 오르내렸다. 보육원 식구들이 여기저기서 우르르 튀어나왔다. 모두 똑같은 표정으로.
*
사수와 나는 다급히 택시에 올랐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흰머리를 베일 틈으로 밀어 넣으며 사수가 눈을 감았다. 나는 허겁지겁 챙긴 가방을 움켜쥐며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내일 보육원으로 오기로 했잖아. 내일 만났으면 됐잖아. 왜 오늘…… 도대체 왜…… 도다리…… 고대로……'
우리 동네 큰 사거리에서 굉음이 울렸다. 놀란 상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커다란 자동차가 자그마한 자동차 옆을 들이받았다. 자그마한 자동차는 저만치로 밀려났고,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고대로는 구겨진 자동차 운전석에서, 도다리는 그 뒷좌석에서 발견되었다. 들것에 실리는 그들이 동네 보육원에서 자라난 아이들임을 알아본 늙은 상인들이 앞다투어 보육원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커다란 자동차 운전자는 구급차 주변을 알짱거렸다. 달아오른 얼굴로. 비틀거리며. 음주 측정기를 부수고, 민중의 지팡이의 코에 고의로 마늘 냄새를 뿜어댄 커다란 자동차 운전자는 일단 공무 집행 방해죄로 경찰차에 올랐다.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불렀어. 내일 온다는 걸, 제육덮밥 해놨다고 내가 불렀어. 올 때까지 기다릴 거라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한 술도 안 뜨고 기다릴 거라고 내가…… 겁을 줬어. 애 낳은 지 한 달인데 코빼기도 안 비치냐고, 외국인 노동자 센턴지 뭔지 그딴 일 다 집어치우라고 내가…… 죽는소릴 했어…… 마귀라도 씐 것처럼…… 내가…… 내일 온다는 걸…… 내일 온다는 걸……"
사수가 입꼬리를 떨며 울먹였다.
'자비! 진짜 별일……'
도다리에게 내 멋대로 건 전화를 내 멋대로 끊어버리기 전,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던 걱정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서 쟁쟁거렸다. 나는 숨이 막혔다. 마스크를 찢어버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