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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삶을 살 것인가?

사십 중반 즈음 우리는 기로에 선다

by 투명물고기

사십 중반 즈음 되니 나뿐 아니라 정말 많은 주변인들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여태까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이미 선택하거나 모색하는 것을 보게 된다. 누구도 이때 이럴 것이라 말을 해줄 수가 없었던 것이, 여태 누구도 이런 속도로 변하는 세상을 경험하고 직접 그 나이로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 가지 불변의 진실 하나는 온 시대를 관통한다.

그것은 바로, "누구나 매일 자신의 죽음에 하루씩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1. 한 사람의 죽음


최근 나의 베스트 프렌드 엄마의 절친이 돌아가셨다. 나는 직접 본 적도 없는 한 사람의 부고 소식이 묵직하게 다가왔던 이유는, 그분의 마지막이 외부에서 듣기만 했던 내 기준으로는 안타까움이 꽤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두 번째 부인으로 평생 남편의 큰 사랑을 받지는 못했으며, 아들 하나를 낳았으나 일찌감치 외국으로 보냈다. 인생의 많은 기간을 암투병에 할애하였고, 아들은 공교롭게도 현재 외국에서 단 하루도 나올 수 없는 상황이라 최근 몇 년부터 죽기 직전까지, 심지어 장례식도 못 오게 되었으니 죽어서까지도 유일한 자식 얼굴 한 번을 못 보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죽어서도 살아생전 원했던 방식대로 묻히지도 못하고, 결국 현실적으로 남은 자들의 편의에 의해 다른 종교의 납골당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2. 겨우 찾은 롤 모델의 최후


다들 부러워하던 회사에 다녔던 적이 있다. 전반적인 컬처는 나쁘기보다 좋은 점이 상당했는데, 속을 알게 되면서부터 실망하게 되는 것들이 상당히 생겼었다. 그중에서도, 회사 내에서 어느 레벨 이상부터는 비슷한 능력치라면 희한하게 인간성이 나쁠수록 더 위로 올라가고, 인성이 좋을수록 더 빨리 한계에 봉착하는 패턴을 발견하게 된 것이 가장 컸었다. 그 정도라고 하는 것은, 본인들은 회사 돈으로 허다하게 특급 호텔 파티를 벌이면서도 새벽까지 고생하는 실무진들은 일 년이 넘도록 야근 식대는 커녕 점심 한 끼의 비용도 못쓰게 한다거나, 어려운 일 있으면 개인적으로 말하라고 해놓고 도와주는 건 고사하고 완전히 뒤통수도 아닌 앞통수를 날리는 일 등 나로선 이해 못 하는 일 천지였다. 그런 세상에서도 유일한 등불 같은 전설의 롤모델을 겨우 하나 찾았는데, 그분은 결국 미혼인 채 업무로 모든 개인의 삶까지 다 채우고, 온갖 부조리한 상황에서도 스트레스를 본인이 다 끌어안아 아래위의 존경을 두루 받았으나 허무하게도 결국 50 초반의 나이로 단명하시고 말았다.


3. 내가 원한다고 생각했던 것과 정말 원했던 것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 회사'에서의 방정식을 채워서 그곳에서 올라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세상 어딘가에는 그래도 정의가 실현되면서 돌아가는 곳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버리지는 않았었다. (아직까지도 솔직히 세상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버리고 싶지는 않은 것이 사실이다.) 최근에 커리어 타이틀적으로 내가 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방향으로 잘 나가고 있는 지인이 글을 올린 것을 보았다. 본인은 출산을 하고도 단 3주밖에 쉬지 않고 바로 밤낮없이 업무와 자기 계발에 매진하였고, 아이가 어린 지금도 매일 이른 아침마다 운동을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글과 그 내용을 칭송하는 댓글들을 보고 나는 더 이상 그 길이 부럽지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인생에서 가장 잘했고 보람 있던 시기를 손꼽으라면 육아휴직을 1년 통째로 과감하게 하고, 그 시간 동안 갓난아기를 100% 온전히 내가 보았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도 아침마다 눈뜨면 가장 먼저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아들 옆에서 기다렸다 웃어줄 수 있는 것이 인생에서 몇 년 아침 운동을 못하더라도 훨씬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 어쩌면 내가 원한다고 생각했던 길이 결국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와 부합하는 길은 아니었던 것이다.


4. 적당히 열심히 사는 것과 잘 사는 것


그렇다고 완전히 전업주부가 되어서 아들과 가정에만 온전히 목매는 것 역시 나다운 길은 아니다. 결국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직업적인 의미를 충분히 찾으면서도' '가족과 내 인생의 소중한 가치를 결코 놓지 않는 것'이었나 보다. 물론 무엇이든 그 '적당히'라는 지점을 찾는 것이 가장 어려울 것이다. 일도 적당히 하고, 삶도 적당히 챙기고, 돈도 적당히 버는 그런 삶이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그것을 증명해 내는 것이 이제 40대 중반에 새로운 길을 시작하는 나의 진짜 과제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가 틀에 박힌 교육에 따라 "열심히만 하면 한만큼 잘 산다"와 같은 세뇌를 너무 오래 당했던 것은 아닐까? 아마 택배 기사가 어느 AI 유튜버보다 하루 종일 훨씬 더 '열심히'는 일할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세상의 공식은 이미 바뀌고 있는데 우리의 관념은 세상의 속도를 완전히 따라가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피부과 대표 원장들은 장사가 잘 되기 시작하면 실제로 거의 출근을 하지 않는 것을 본다. 돈은 그만큼 많이 벌고 여유가 생겨 좋겠지만, 과연 그들이 그만큼 더 행복해졌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돈이 충분해져도 여전히 계속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갓난아기의 말랑말랑한 발바닥을 조물 거리고, 하얗게 다시 돋아나는 이를 같이 거울로 보고 함께 설렘을 느끼는 것, 무서워서 우는 아이의 버팀목이 되어주다가 라디오에서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오면 손 잡고 함께 춤을 추는 것, 누군가와 같이 부르던 추억의 노래들이 늘어나고, 내 일보다 더 기쁘고 슬플 소중한 사람들의 일생에서 손꼽는 이벤트들을 나누는 것, 그리고 눈을 감기 직전에는 그동안 인생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았었고 나도 마음껏 사랑했노라고, 이제 남은 여한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 나는 그런 것들이 내 인생에서의 성공이라고 정의한다.


인생은 너무도 짧은 소풍이 맞다. 그 모든 찬란한 순간들을 우리는 지나고 나서야 아쉬워한다.


사십 대 중반은 그런 것들을 깨닫기에 너무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딱 좋은 나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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