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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라기 흥망성쇠

by 정희주

결혼하면 흔히 찾아오는 며느라기(期)가 있다. 드라마로도 방영되었던 웹툰 <며느라기>에서는 며느라기를 "며느리+아이(사람)"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아닌 인생의 시기(時期)라고 설명한다. 웹툰 <며느라기>의 정의에 따르면 며느라기는 흔히 결혼 초에 나타나며 시댁 식구들에게 이쁨 받고 싶어서 온갖 착하다고 알려진 일들을 자처하는 증상으로 이다. 이 시기는 보통은 1~2년의 시기를 거치고 누군가는 10년, 누군가는 평생을 간다고도 한다.


나에게도 며느라기가 있었다 이 시기는 단지 개인이 겪는 감정의 흐름이 아니라, 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형성되고 해체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며느라기는 사춘기나 갱년기처럼 삶의 리듬이 바뀌는 시점에 찾아온다. 대부분 결혼 초, 시댁 식구들에게 ‘착한 며느리’로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애써 웃고, 열정적으로 배우며, 궂은 노동을 자처한다. 그러나 그 착함이 지나치면, 어느새 ‘나’의 이름은 사라지고 ‘며느리’라는 역할만 남게 되는 고약함을 겪게 된다. 나 역시 그 시절, 좋은 며느리로 보이고 싶다는 마음에 '나'를 잃은 채로 시댁이라는 세계(시월드)를 헤매었다. 누가 더 성실한가, 누가 더 희생하는가에 따라 서열이 매겨지는 세계, 침묵이 미덕이 되는 세계. 그 세계에서의 며느라기 흥망성쇠를 기록해 본다.


김선민 <여자의 집, 이순자의 집#1-제사 풍경> 2004, 출처:sunminlee.com



며느라기 태동기 : 무조건 참았다. '사랑'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20년 전 결혼 후 처음 맞이한 명절날이었다. 차례상을 준비하기 위해 설 전날 시댁에 갔다. 시어머니는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식당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자리가 잡히지 않은 시기였다. 시어머니께서는 연휴에도 식당을 열어 손님을 맞이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차례 음식을 준비할 여유가 없으니 음식은 간단히 준비하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말 그대로 '간단히' 하실 것이라 생각했다. 결혼 전에도 전거리를 늘 내가 담당했기에, 비록 멋모르는 새댁이지만 '간단히' 정도는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댁으로 향하는 오후 3시경에 시어머니께서 전화가 한 통을 걸어오셨다.


“야!!! 너 어디냐? 몇 시인데 아직도 안 오고 있어?” 인사말도 없이 다짜고짜 큰소리로 지르셔서 그만 얼음이 되고 말았다. 이런 하대는 콜센터에서 일할 당시 화가 난 '고객님'을 제외하고는 처음이었다. 어리둥절했다. 분명 며칠 전 통화에서는 별말씀이 없으셨다. 만일 필요한 일이 있었다면 그날 통화에서 일찍 오라고 말씀하셨으면 될 것을, 왜 이렇게 화를 내시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식당에 도착하자 어머님의 푸념이 쏟아졌다. 평소와 달리 아들에게도 화를 내셨고, 설 당일 남편을 대하는 태도도 매서웠다. 난 그때야 알았다. 명절에는 시어머니가 이 집의 대장이 되는 날이라는 것을. 나는 직장생활을 하는 마음을 갖기로 했다. 직장 상사를 대하는 직원의 마음으로, 갑님을 대하는 을의 마음으로 임하기로 했다. '나'를 지웠다. '나'를 잊는 것이 도리이며, 그래야 명절을 조용히 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한 사람이라는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었다.


김선민 <여자의집Ⅱ, 이순자의 집#2-제사 풍경> 2004, 출처:sunminlee.com



며느라기 전성기 : 여전히 '사랑'을 포기할 수 없었다.


출산 이후부터 조금씩 삐딱선을 타기 시작했다. 출산을 하고 나자 나는 역할로써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며느리, 아이들 엄마라는 역할로써만 인정받았다. 그 역할을 잘할 때만 지지를 받았다. 어디에도 나란 사람은 없었다. 씁쓸했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 아니었다.


이때부터 난 “음식은 집에서 해 갈게요.”라고 했다. 부엌을 따로 쓰니 한결 살 것 같았다. 좁은 부엌에서 서로 부딪히며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직장에서도 일이 많아 힘든 것보다 사람 관계가 힘든 것처럼, 집안일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주방을 누군가에게 빌려주는 것도, 남의 주방을 쓰는 것도 불편해 서로 예민해졌다. 혼자 전거리를 해가니 홀가분했다. 감정 노동 없는 이 정도 수고는 해줄 만했다.


몇 년이 더 흘렀다. 시어머니는 손주들을 예뻐해 주셨다. 외가댁 어른이 모두 돌아가시고 없는 우리 아이들을 예뻐해 주시니 고마웠다. 그 고마움 속에서 시어머니가 안쓰러워지기 시작했다. 시어머니도 큰며느리 역할이 당연한 것은 아니다. 몸이 아프고 고단해도 큰아들 좋아하는 갈비찜, 작은아들 좋아하는 홍어무침, 소고기 못 먹는 큰며느리를 위한 돼지고기, 작은 며느리 좋아하는 아귀찜을 해야 했다. 의무적인 제사상도 차례야 하지만 자식들 좋아하는 음식도 먹이고 싶은 어미니까.


난 어머니를 ‘진심’으로 위하기 시작했다. 어머님이 제사상 전통을 거부할 수 없다면 내가 기꺼이 일손을 도와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진심’을 가진 후 마음이 편해졌다. 명절 이후 시댁 흉을 본 적도 없고, 명절 후유증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어머니와 나는 같은 전쟁을 치르는 동지 같았고, 같은 며느리 처지라는 연대감까지 느꼈다.


김선민 <여자의 집Ⅱ, 권혁희의 집#1-추석 풍경> 2004, 출처:sunminlee.com



며느라기의 쇠퇴기 :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2년 전 추석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 명절에 가족들의 ‘진심'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명절 당일 식사를 하시면서 어머니께서는 뉴스에 성균관에서 전은 올리지 않아도 되고, 음식도 간소화해도 된다고 발표를 했다고 한다. 어머니께서 음식 장만할 때마다 한숨을 쉬곤 하셔서 나는 "참 잘 되었네요.”라고 맞장구를 쳤다. 옆에 있던 아주버님께서는 “그런 거 발표하면 뭐 해. 어차피 다 그대로 다 할 건데. 다 소용없어.”라고 말씀하셨다. 평소 듣기로는 아주버님도 차례 문화에 반대한다고 들었다. 그럼 이참에 분위기를 몰아 차례상을 없애던지 간소화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난 이참에 쐐기를 박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음 명절에는 전 하지 말까요?”라고 말했다. 뭔가 썰렁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어머니께서는 좋아하시기는커녕 내게 핀잔을 주셨다. 명절이면 음식을 바리바리 해서 싸주셨던 시할머니를 거론하시면서, 음식을 해주고 싶은 어미의 마음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셨다. 나는 어리석었고, 아주버님은 현명하셨다. 어차피 변할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성균관 이야기는 왜 하신 걸까? 안 하고 싶지만, 하고 싶은 이 마음은 무엇일까?


어머니는 명절에 유독 유능감을 느끼셨다. 큰며느리, 시어머니, 어머니로써 전통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가부장적 조직에서는 일종의 권력이다. 그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은 힘을 내려놓는 것과도 같다. 어머니는 명절이 힘들지만 한편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 성균관에서도 간소화하라고 해도 간소화하지 않는, 전통적 역할의 수호자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나 역시 착한 며느리 병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차례문화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나 역시 어머님을 도와주는 착한 며느리가 되어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니 말이다. 불량 며느리가 되어 돌아올 비난과 불편함을 감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불평불만을 하면서도 매해 전을 부쳤다. 마음은 싫지만 전을 부처야 하는 현실 속에서 인지부조화가 일어났고, 마치 어머님을 도와주고 싶은 짐 심 어린 선의로 내면의 분열을 포장했다. 그야말로 정신승리였다..


김선민 <여자의 집Ⅱ, 김부남의 집 #1-추석 풍경> 2004, 출처:sunminlee.com



며느라기의 멸망기 : 역할에서 벗어나자, 진짜 '사랑'이 도래했다.


그날의 대화의 분위기는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기분이었다. 역시 바위는 견고했고 내 머리통은 깨졌다. 그날 계란이 깨짐과 나의 며느라기는 종식의 길을 걷고 있다. 바위는 여전했지만 계란은 하나의 껍질을 벗겨낼 수 있었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 기존의 질서(관습, 제도, 상식)를 따랐다. 아주 모범적으로 열심히 따랐다. 하지만 때로 그것은 자기 모욕이 되는 순간들이 많았다. 원하지 않는 것을 해야 할 때도 있었다. 자기 모욕을 해야 한다면 사랑할 수 없다. 그리고 사랑받을 수 없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자기를 모욕한다면 그 모욕하는 만큼 상대를 미워하게 된다. 나는 내 마음에 있는 만큼만 사랑하기로 했다. 내 손에 돈이 있는 만큼 기부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랑이 있을 때 사랑을 주기로 했다. 인정받기 위해 빛을 내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내가 며느라기를 보냈던 시기를 이해하게 되자 시댁 식구들을 보는 마음이 투명해졌다. 편견이 사라졌고 더불어 피해의식도 사라졌다. 내 마음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안 하면 될 뿐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내가 감당하면 그만일 뿐이었다. 착한 며느리가 되어 얻게 되는 힘(인정, 칭찬)을 포기하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이제 나는 명절이나 제사 때 무리해서 역할을 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일이 있는 날은 참석하지 않기도 했고, 가능한 범위에서 할 수 음식만 보내는 날도 있다. 그런 일들일 쌓이며 내게도 힘이 생겼음을 알게 되었다. 역할이 주는 힘이 아닌 스스로 삶을 이끌 힘을 느끼게 되었다. 내가 스스로 서게 되자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힘, 그렇게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더불어 생겨났다.


이제는 나의 역할에 연연하지 않는다. 가족들 모이는 자리에 음식 한 접시 더 해가는 것은 그다지 수고로운 노동이 아니다. 역할이 주는 의무감에서 벗어나자 오히려 행동이 자연스러워졌다. 이제는 차례를 지내던 안 지내던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이 즐거움이 오롯이 느껴진다. 시부모님도 자식들에게 무언가 전통을 가르쳐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신 것 같다. 그저 우리 편한 대로 하라고만 하신다. 아마 이전부터 그런 분이셨을 수도 있다. '시'자 콤플렉스 때문에 미쳐 보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내가 며느라기를 보냈던 시기를 이해하게 되자 시댁 식구들을 보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여전히 명절이 되면 전을 부친다. 새아가 시기부터 해오던 내 담당이다. 이제는 피해의식 없는 마음으로, 가족들과 함께 음식을 나눠먹는 정다운 마음으로, 한 여자의 일손을 돕고 싶은 마음으로 전을 부친다.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만큼, 내 힘이 있는 만큼 마음을 쓴다. 이제 내가 부치는 전에는 슬픈 맛이 없다. 우리 집 전에는 적당히 간이 밴 고소한 육즙이 입안 가득 퍼진다. 이제는 사랑받고 싶은 마음보다 사랑을 주고 싶다. 역할이 아닌, 사람을 향한 사랑을 하고 싶다.


오늘 미션 클리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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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주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미술치료사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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