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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경기

옷장 속으로 들어간 나의 명랑테니스클럽

by 맨모삼천지교

계절이 바뀌어 옷장 정리를 하다 보니, 이번 여름 한번 입지도 못한 운동복들이 서랍 가득 쌓여있었다. 빼어난 각선미의 소유자도 아니면서, 짧은 테니스 스커트는 왜 그리도 사 모았을까. 마치 그것을 입고 뛰면 비너스 윌리엄스라도 된 마냥 코트를 휘저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을까. 밑창이 닳을 틈도 없었던 새 테니스화까지, 줄줄이 모습을 드러냈다.


“명랑테니스클럽”


30대 후반에서 40대까지의 여성들 넷이 모인 우리들을 바라보며 채 30대도 되지 않은 코치님이 어느 날인가 붙여주신 별명이었다.

골프던, 운동이던, 등산이던, 한번 뭘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근성의 A.

늘 느릿느릿 한 박자 천천히 걸어오지만 치는 공마다 정확히 코트에 들어가는 B.

시작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힘과 열정 못지않게 웃음소리도 가장 큰 C.

그리고 승부욕은 제로지만, 그저 코트에 나오는 것만은 누구보다 좋아하는 나까지.


모두 아이 엄마들이라, 아이가 아프면 빠질 수밖에 없는 일들이 부지기수였고, 아이 학교에 행사가 있으면 레슨이 끝나자마자 신발을 신기 무섭게 코트를 벗어나기 바빴으니까. 방학이라도 할라치면, 날씨가 아무리 좋아도 코트로 나올 수 없던 우리였다. 그래서 더 소중했던 것 같다. 스스로의 의지로 올 수 있는 날이라면 절대 빠지지 않을 우리였으니까. 그 꾸준함 하나는 인정해 줄 만한 했다. 비록 테니스를 열심히 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브를 하다가 점수를 다 내주거나 “…그래서 우리 지금 몇 점이라고요?”같은 질문을 무한반복하다 게임을 끝내고는 했지만. 땀 흘리며 긴 다리로 코트를 가로지르며 포효를 내뿜으며 공이 라켓 중앙을 강타하는 경쾌한 타격음.. 같은 것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느슨한 우리의 경기였지만 말이다.


그래서 넘치는 코치님의 한숨 소리가 있었지만,

거기에 지지 않는 우리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있었다.


늘 우리 넷을 레슨 그만 받아도 될 정도로 졸업시켜서 다른 수준급 테니스 클럽에 가서 잘 치고 지내는 것을 보는 것이 본인 목표라시던 코치님이었다. 세월이 지나도 포핸드 몇 개에 힘들다며 코트 구석에 큰 대자로 드러눕기 일쑤인 우리였으니까. 게임에 이기겠다는 강력한 의지는 엿보이지 않는 그런 우리가 어쩌면 코치님 눈에도 그다지 비전이 있어 보이는 학생들은 아니었을 것 같다. 어쩌면 이해가 어려웠을 수도. 젊고 건강한 미혼의 남자 코치님과 내 몸 하나뿐 아니라 돌보아야 할 아이들도 있는 엄마인 우리 넷은 분명 사뭇 다른 삶의 궤적을 지나는 중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롯이 자신의 좋아하는 취미에 시간을 소중히 쓰고 있다는 것의 기쁨을 아는 모습은 남녀도, 나이의 많고 적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돈 버는데 크게 관심이 없어서 늘 수강료는 제대로 받고 있는지 거꾸로 걱정을 해주어야 하는 코치님도, 제자리걸음인 실력이지만 수업을 어떻게든 나가려고 하는 우리들도. 그렇게 느슨하게 서로의 공을 치고받으며 한 계절을 보내고, 두 계절을 보내고, 일 년을 보내고, 이년을 보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만나는 매주 금요일을 기다렸다. 공이 라켓을 비껴가도, 서브로 점수를 다 내주는 날이 부지기수여도, 그래도 ‘취미’ 란에 테니스라고 쓰며 슬며시 웃게 되는 추억들이 쌓였으니까.


그래서 처음 루푸스라는 진단명을 들은 날. 당황스러운 마음에 눈물은 뚝뚝 떨어지는데 울던 내가 선생님께 던진 첫 질문도 테니스였다.


“선생님. 전 그럼 언제부터 운동할 수 있어요? 테니스도 못 치는 거예요?”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나를 난감한 얼굴로 잠시 바라보시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적당한 운동은 괜찮아요. 다만 지금은 염증 수치가 너무 높으니, 통증들이 가라앉을 때까지 좀 쉬는 게 어떨까요.”

“네.. 그.. 그럼.. 통증 가라앉으면 해도 되는 거죠?”

“네. 환자분에게 적절한 수준의 운동을 찾게 되실 거예요. 다만, 햇빛을 많이 보는 상황은 피하시는 게 좋아요.”

“왜 햇볕을 피해야 해요?”

“보통은, 햇볕을 쪼이면 전반적인 면역력이 올라가요. 면역력이 올라가면.. 환자분을 공격하는 면역력도 강해집니다. 증상이 심해지는 거죠.”


딱 잘라 [테니스를 치면 안 된다]고 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말끝을 흐리시는 선생님의 이야기의 뉘앙스를 난 제대로 읽지 못했다. 일단은 회복에 집중하고 나면 그 후에 다시 칠 수 있을 테니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싶었다. 좀 나아지면, 다시 라켓을 들고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과 함께. 그래서 당장 금요일에 잡혀있던 테니스 수업은 나갈 수 없겠지만, 그다음 수업, 그게 아니라면 그 다다음 수업에는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날 나의 질문이. 얼마나 어처구니없었는지를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앉았다 일어설 때마다‘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오는 통증들이 무릎과 발목, 발바닥을 점령하고 있던 날들이 지나고 어딘가 전보다 나아진 컨디션에‘어…이 정도면 운동해도 괜찮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 날. 이전처럼 운동복을 입고 우선 강도가 세지 않은 그룹 필라테스 교실로 향해 보았다. 과거에는 잠시 몸살이 나거나 장염이 걸려 허약해진 체력을 운동으로 끌어올린 적도 많았으니까. 온몸에 땀이 나게 운동하다 보면 어느새 엔가 다시 튼튼해져 있던 적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전에는 분명 수월하게 따라가던 그룹 수업 내내 나는 무던히도 애를 써야 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횟수들의 2/3만 따라갔는데도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옅은 동작들에도 심장은 터질 듯 두근거렸다.

그리고 다음날.

많이 괜찮아졌다 생각한 컨디션은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시 손이 퉁퉁 부어올랐고 결국 이틀을 앓아눕고서야 알게 되었다. 똑같은 루푸스 환자라고 하더라도 ‘적절한’ 운동의 기준은 병의 활성도에 따라서, 기초 체력에 따라서도 다 제각 기라는 것을. 그리고 적어도 지금의 나는 걷는 것 외에는 어떤 운동도 무리라는 것을 두드려 맞은 것 같은 관절들과 다시 둔해진 손의 감각이 말해주었다.


지난여름의 옷들을 정리하고, 쌀쌀해진 날씨에 걸맞은 옷을 꺼내면서도.

며칠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거실에 꺼내둔 테니스복을 오늘은 집어넣어야 할 것 같다. 주름결이 고운 스커트도, 추운 겨울날 야외에서 칠 때 입으려고 사둔 플리스 점퍼도, 아직 밑창에 먼지도 안 묻은 새 운동화도. 모두 모두 옷장 속 깊이 넣기로 했다. 그리고 함께 정리해 넣어야 할 것은, 공을 향해 달리던 순간, 명랑 테니스 클럽의 웃음, 그 안에서 자라던 내 행복이었다.

난 무엇을 잃은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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