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 보겠어.
지난 달 보다는 염증 수치가 감소했다는 주치의 선생님 말씀에 아주 오랜만에 용기 내어 찾아간 요가 수업.
오랜만에 만난 내 건강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수업을 이끌어주시던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몸의 한 군데가 아프면,
온 정신이 그곳으로만 쏠려서 다른 곳을 돌보지 못해요.
그래서 한 곳만 고치려 애쓰다 보면,
꼭 다른 데도 탈이 나 있답니다.
우리 몸은 다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전체적인 몸과 마음을 함께 들여다봐야 해요.”
잘 돌아가지 않는 목과 허리의 통증에 긴장하며 살살 동작을 따라 하는 내내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정신이 거기로만 쏠려서 다른 곳을 보지 못해요.”
마치 눈앞에 검고 긴 터널만 놓인 것 같은 기분.
오직 그 터널 속만 들여다보이는 기분.
딱 그런 기분이었다는 것을 어찌 아셨을까.
각기 다른 아픈 부위들을
나름 돌본다 생각하며 지내왔지만,
사실은 ‘건강’이라는 것 자체를
잃어버린 뒤였다는 걸 깨달은 순간,
내 온 마음은 오직 그 결핍에만 매달려 있었다.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센딜 멀레이너선·엘다 샤퍼 지음)에는 흥미로운 실험이 하나 실려 있다.
서너 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실험자 중
절반은 식사를 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굶긴 채 단어 맞추기 시험을 봤다.
단어가 0.033초 만에 사라지는 상황 속에서,
배고픈 사람들은 [음식]과 관련된 단어를 대조군보다 훨씬 빠르게 인식했다.
특히 ‘케이크(cake)’ 같은 단어에서
압도적으로 높은 정답률을 보였다.
배고픔에 민감해진 사람들에게는
음식이 가장 먼저 눈에 뜨였던 것.
즉, 이들이 집착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실험 결과였다. 이런 결과는 무의식의 차원에서도 동일하다고 하니, 결핍이 만들어내는 인간 사고의 변화의 폭은 상상 이상이다.
결핍은 이렇게 우리의 주의를 지배한다.
그 결핍이 무엇이든,
우리의 시야는 그것으로만 좁아진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러했다.
루푸스와 쇼그렌 증후군이라는 낯선 병명을 처음 들은 날부터,
내 시선은 오직 그것으로만 향했다.
과거 ‘그저 너무 피곤해서 그런가’라며 흘려보냈던 증상들이 모두 이 병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내 머릿속의 안테나는 그쪽으로만 확장되어 갔다. 그때부터, 내 관심의 세계 안으로 ‘비슷한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이를 기다리며 잠시 들른 서점의 매대에서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낯선 바다에서 가장 나다워졌다"
아이돌 그룹 포미닛의 멤버였던 허가윤의 에세이였다.
친오빠의 죽음 이후
삶의 방향을 잃고 방황했다고 고백한 그녀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갑상선 저하수치가 저하되어 있고,
전신 알레르기처럼 몸이 빨갛게 변했어요.
자가면역체계에 문제가 생겨
제 몸을 스스로 공격한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결국 모든 아픔을 떠나 발리로 건너가 서핑을 즐기며 새로운 삶을 택했다. 바다와 햇살,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다시 건강을 되찾아가는 그녀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나는 묘한 위안을 느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배우 서우.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에서 문근영의 이복동생으로 등장하던 그녀의 얼굴이 오랜만에 연예면 기사 창에 떠올랐다.한때 여러 작품에서 자주 보이던 그녀는 언젠가부터 활동이 뜸해지며 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그러다 최근 우연히 본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런 고백을 했다.
“자가면역질환으로 면역력이 약해져,
조금만 피곤해도 염증이 생겨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배우로의 데뷔 후 쏟아진 악플, 이어진 질병으로 인해 2016년 이후 배우 생활을 멈추고 현재는 어머니가 계신 미국에서 지내고 있다는 기사였다.
이전같으면 스쳐갔을 두 사람의 문장들이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비록 내가 앓고 있는 루푸스와는 다른 질환일지 몰라도,
자가면역 질환이라는 큰 범위 안에서는
우린 같은 환우일테니.
그들이 통과한
‘결핍'의 터널을 나 또한 지나고 있었으니까.
‘건강’을 잃고 ‘면역의 결핍’ 속에 빠진 나에게는
비슷한 상처를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유난히 잘 들렸고 잘 보였다.
사람들은 나를 보면
자신이 아는 자가면역질환 사례를 털어놓았고,
내가 읽고 쓰는 세상의 대부분을
그 이야기들로 채워 갔다.
병이라는 것이 찾아온 뒤에 알게 된
‘건강한 생애’라는 것에 대한 큰 결핍은
내 정신을 사로잡았다.
이 알 수 없는 병과 함께하는 삶을
새로이 만들어 가야 한다는 사실에
좌절했고, 외로워했다.
사고하는 방식 역시 이를 중심으로 변화하였다.
나에게 주어진 “길지 않은 건강한 삶”이라는 명제를 받아 들고 부족해진 ‘시간’과 ‘건강함’이라는 결핍을 돋보기 삼아 생을 바라본다.
‘길지 않을지도 모를 건강한 삶’을 받아들이며
부족해진 시간과 체력을 되뇌이며
짧아진 생의 하루하루를 새롭게 보고 있다.
책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속에는
또 다른 재미있는 실험이 실려 있었다.
심리학자 제이미 커츠는 대학 4학년생들에게
“대학 생활이 여섯 달밖에 남지 않았다” 혹은 “아직 여섯 달이나 남아 있다”라고 전했다.
그 결과,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에 더 집중한
전자의 학생들은
하루하루를 훨씬 열심히, 그리고 더 행복하게 보냈다.
시간이 유한하다는 인식은
삶을 선명하게 만든다.
루푸스와 쇼그렌은
내 시선을 완전히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그전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삶을 바라보게 했다.
이 병과 함께 하는
앞으로의 50대, 60대는 솔직히 잘 그려지지 않는다.
견뎌야 하는 증상들과, 매일 털어넣는 약의 부작용들이 이미 그 예후를 예고하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오늘을 더 진하게 살기로 했다.
마치 내일이 대학 생활의 마지막 날인 학생처럼,
누구보다 즐겁게, 누구보다 치열하게.
그래서 다음 주 월요일부터, 이전이라면 좀 고민을 했거나 주저했을 일을 하나 시작해 보기로 했다.
저 터널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터널의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오늘을 좀 더 열심히, 조금은 더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p.s.
이번 글의 표지로 쓴 이 사진은.
눈이 엄청나게 많이 온 어느 겨울날.
센트럴파크에서 엉덩이가 시린 것도 모르고 신나게 썰매를 탔던 날 찍었던 사진이에요.
큰 터널 너머의 더 높은 언덕을 찾아 걸어가던 중,
빠른 걸음으로 먼저 터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편을 찍었더랬습니다.
나름 있는 힘껏 열심히 터널 안을 걸어가고 있는 중인데도 더 빨리 걸어 오라고 보채는 하는 남편이 원망스러워서 였던 것 같기도 하고 ,썰매를 들고 든든하게 어두운 터널 밖에 서있는 그가 든든해서였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 어느쪽이었더라도,
그는 그가 있는 밝은 곳으로 절 불렀던 날이었네요.
지금 걷는 터널 밖에도
그가 기다릴 것 같습니다. 딸 아이와 함께요.
그러니, 멈추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걸어가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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